잔나비의 첫 앨범에 수록된 곡에 대한 감상 소고
리사 오노의 노래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감정을 억제한 듯 읊조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유리벽 너머의 진술실을 들여다보는 듯한 차가운 객관성만을 남깁니다. 그런 거리를 두는 감정이 오히려 위안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리사 오노를 찾곤 합니다.
그런데 문득, 잔나비의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특히 그의 초기 앨범 마지막, 열두 번째 트랙에 실린 「꿈과 책과 힘과 벽」이었습니다.
이 곡은 리사 오노의 보사노바풍 단조로운 리듬 위에 얹힌 건조한 정서와는 사뭇 다릅니다.
우수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그의 음악에는, 스무 살 청년 특유의 치기 어린 감상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 안에 담긴 실존적인 질문들이 불쑥불쑥 얼굴을 내밉니다. 젊음의 언저리에서 자신에게 던지는 진지한 물음들 말입니다.
해가 뜨고 다시 지는 것에 연연하였던 나의 작은방
텅 빈 마음 노랠 불러봤자 누군가에겐 소음일 테니
꼭 다문 입 그 새로 삐져나온 보잘것없는 나의 한숨에
"나 들으라고 내쉰 숨이 더냐" 아버지 내게 물으시고
제 발 저려 난 답할 수 없었네
“해가 뜨고 다시 지는 것에 연연하였던 나의 작은 방”이라는 도입부는 일상성과 무력감이라는 실존적 정서를 효과적으로 드러냅니다.
왜소해진 자아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이 표현은, 반복되는 하루의 흐름이 자신을 얽어매는 굴레처럼 느껴지는 상황을 암시합니다.
더 나아가, “누군가에겐 소음”일뿐이라는 자조적인 고백은, 자신의 내면적 목소리가 외부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현실을 드러냅니다. 이는 단지 화자의 고립감을 넘어서,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억눌린 채 살아가는 이 시대 대부분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감정을 암묵적으로 비추고 있습니다.
결국 이 노래는 소시민이자 불확실한 젊음을 살아가는 존재가 겪는 소외와 단절, 그리고 그 안에서 점차 흐려져 가는 ‘개인성의 부재’라는 실존적 고민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는 어째서 어른이 된 걸까
하루하루가 참 무거운 짐이야 더는 못 갈 거야
꿈과 책과 힘과 벽 사이를 눈치 보기에 바쁜 나날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무책임한 격언 따위에
저 바다를 호령하는 거야
이러한 현실적 상황 속에서 등장하는 “꿈과 책과 힘과 벽”은,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기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을 상징하는 핵심적인 메타포로 기능합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와 같은 낭만적 이상은 이제 “무책임한 격언”으로 전락하고, 현실의 벽 앞에 무력해진 자아는 결국 어린 시절의 순수한 꿈마저 부정하게 됩니다. 이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된 깊은 상실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우리 사회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과도한 책임과 그로 인한 압박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던 나의 어린 꿈 가질 수 없음을 알게 되던 날 두드러기처럼 돋은 심술이 끝내 그 이름 더럽히고 말았네.
노래는 마침내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어째서 어른이 된 걸까”라는 가사는 단순히 생물학적 성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회에 편입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겪게 되는 내적 갈등과 자기 타협에 대한 질문입니다.
“하루하루가 참 무거운 짐”이라는 고백은, 성인이 된다는 것이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짊어지는 일과도 같다는 인식을 드러냅니다. 이는 곧 성장을 순응과 자기부정으로 연결 짓는 씁쓸한 자각이며, 잃어버린 자아에 대한 조용한 탄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던 나의 어린 꿈 가질 수 없음을 알게 되던 날.
참 무서운 밤인 걸, 잘도 버티는 넌,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루는 더 어른이 될 테니.
무덤덤한 그 눈빛을 기억해 어릴 적 본 그들의 눈을
우린 조금씩 닮아야 할 거야
결말부에서 가수는 “무덤덤한 눈빛”이라는 표현을 통해, 어린 시절 우리가 바라보았던 기성세대의 모습과 점점 닮아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씁쓸히 되돌아봅니다. 이 장면은 결국 인간의 성장과 성숙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자기 상실과 체념의 순간을 포착하며, 그 속에 깃든 실존적 비극을 조용히 드러냅니다.
어처구니없던 나의 어린 꿈 가질 수 없음을 알게 되던 날
두드러기처럼 돋은 심술이 끝내 그 이름 더럽히고 말았네.
멈춰 선 남겨진 날 보면 어떤 맘이 들까
하루하루가 참 무서운 밤인 걸
잘도 버티는 넌 하루하루가 참 무서운 밤인 걸
잔나비의 이 노래는 개인의 내밀한 감정과 사회적 현실을 깊이 성찰하는 가운데, 동시대 청춘들이 마주하고 있는 철학적이고 실존적인 질문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냅니다.
쓸쓸한 정조가 감도는 이 노래는 청자의 내면 깊숙한 감정과 공명하며, 우리가 무심히 흘려보냈던 삶의 본질적인 질문들을 다시금 마주하게 만듭니다. 청춘의 초상 너머에 자리한 실존의 무게를 정제된 감성으로 노래한, 시대적 자화상이자 감정의 기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나에게도 언젠가 있었던, 그런 고민의 밤.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문득 그 밤들이 내 안에서 소환되는 것은
그 시절의 고뇌가 얼마나 깊고 때로는 두려웠는지를 반증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부모가 된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만큼은
그 차갑고 외로운 밤의 고뇌가 없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부모가 품는 공통된 소망일 테지요.
하지만 노래는, 잔나비는 조용히 속삭입니다.
그런 바램은 어림없다고. 누구도 그 밤을 비켜갈 수는 없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내라”, “야망을 가져라”고.
그리고 한편으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을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느냐”며 조용히 위로해 봅니다.
아들아. 사랑해~
그렇게, 조용히 속삭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