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본래 어떠했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
_19세기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_
수십 년 동안 동일한 텍스트인 ‘성경’을 읽어왔다.
그러나 주어진 텍스트는 이차원적이고 단편적이어서, 그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 데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었다.
당연히 “왜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었는가”에 대한 배경 설명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전통적 주장은 마음으로도 쉽게 동의되지 않았다.
그동안의 학습과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자연스럽게’ 혹은 ‘은혜로’ 이해된다는 말로는 현실적으로 설득되지 못한다.
지난 6월부터 12주 동안, J. 맥스웰 밀러와 존 H. 헤이스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박문재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를 주요 교재로 삼아,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권지성 교수 등과 함께 학습하였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적 전개를 바탕으로, 구약성경의 형성사를 요약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이었다.
초기에는 낯설고 버벅거렸지만, 학습을 마친 지금 시점에는 어렴풋하게나마 전체적인 맥락이 잡히는 듯하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심층적인 학습을 위해 레스터 그래비(Lester L. Grabbe)의 ⟪Ancient Israel: What Do We Know and How Do We Know It?⟫을 본격적으로 읽고자 한다.
한글 번역본(류광현 역, ⟪고대 이스라엘 역사⟫)이 있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2017년 개정판(Rev. Edition) 원서를 중심으로 요약과 학습을 병행하고자 한다.
이는 성서의 각 권과 장절이 기록되던 당시, 히브리 민족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함이다.
그러한 맥락을 이해함으로써 성경의 내용을 보다 깊이 있고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울러, ‘역사’를 공부하는 또 다른 의미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과거를 탐구하는 일은 단지 신학적 이해의 수단을 넘어, 인간과 문명의 형성과정을 통찰하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알아갈수록 점점 더 흥미로워진다는 사실은 덤이다.
책의 숨겨진 이름: '이스라엘의 역사 서설'
들어가며: 책의 원래 제목에 담긴 비밀
이 책은 처음부터 지금의 제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전언이다.
저자가 집필하던 당시 마음속에 두었던 원래의 작업 제목은 “이스라엘의 역사 서설(Prolegomena to a History of Israel):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아는가?”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설(Prolegomena)’이란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왜 저자는 이 책을 완전한 ‘역사’가 아니라, ‘역사를 위한 준비’라고 생각했을까?
저자는 그의 글 서문에서 이 책이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설명한다.
이제 이 책의 숨겨진 이름 속에 담긴 저자의 깊은 고민과 의도를 함께 살펴보자.
'서설'이란 무엇인가?
‘서설(Prolegomena)’이라는 용어는 언뜻 보면 다소 어렵고 학술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다.
하지만 그 핵심 개념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쉽게 말해,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필요한 예비적 고찰”, 또는 “어떤 학문을 제대로 시작하기 위한 기초 다지기” 정도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책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단순히 나열한 역사서만은 아니다.
그보다 한 걸음 앞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떻게 연구하고 서술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종의 방법론적 준비 작업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저자가 밝히는 이 책의 성격이다.
“이 책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그러한 역사를 위한 준비 — 즉 서설 — 이다.”
(This book is, however, not a history of Israel but the preparation – the prolegomena – for such a history.)
결국 저자가 ‘서설’을 통해 이루고자 한 핵심 목표는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어보인다.
첫째, 주요 1차 사료의 제시: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사용되는 고고학적 유물, 비문, 성서 등 핵심 근거 자료들을 독자에게 명확히 제시하는 것.
둘째, 학문적 논쟁의 조명:
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쟁점을 드러내고, 그 다양한 입장과 논거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셋째, 역사 서술의 문제와 방법론 탐구:
원래의 부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역사학이 과거를 탐구하는 방식과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한계를 성찰하는 것.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러한 깊이 있는 ‘서설’을 통해 독자에게 말을 걸고자 했던 걸까?
저자가 책을 통해 대화하고 싶었던 사람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여러 부류의 독자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고 밝힌다.
그가 처음 염두에 둔 주요 독자층은 동료 학자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학문적 담론 속에서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자신의 연구를 통해 고대 이스라엘사 연구의 논의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비단 학계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저자는 보다 넓은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책의 내용과 형식을 세심하게 다듬었다고 밝힌다.
학문적 동반자들과 비전공 역사학자들 그리고 이 분야를 처음 접하며, 체계적 교재나 입문서를 찾는 나와 같은 입문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들을 위해 저자는 히브리어 원문과 음역을 병기하고, 주요 참고문헌을 상세히 제시하는 등 비전문가라도 연구 자료에 직접 접근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였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왜 ‘서설’이라는 의미심장한 단어가 최종 제목에서 빠지게 되었을까?
이는 출판사 측이 일부 독자들이 이 단어를 어렵게 느낄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결정은 단순한 상업적 판단을 넘어, 저자 자신의 깊은 고민이 깃든 선택이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저자는 원래의 제목을 사용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아쉬움이 남는다(It is with some regret)”고 솔직히 고백했다.
동시에, 만약 자신이 ‘서설’이라는 제목을 고집했다면 동료 학자들이 그것을 ‘오만한 행동(an act of hubris)’으로 볼 수도 있었다는 겸손한 우려도 덧붙인다.
결국 이 제목의 변화는 단순한 명칭의 문제가 아니라, 저자가 추구했던 학문적 진정성과 대중적 전달력 사이의 균형점을 보여주는 상징적 선택이었던 것으로 읽힌다.
결어: 그렇다면 '서설'을 이해하는 것은 왜 중요할까?
이제 우리는 ‘서설’이라는 개념이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이 책의 정체성과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임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어떤 시각으로 읽느냐에 따라, 우리가 얻게 되는 지식의 깊이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느껴진다.
단순한 ‘역사서’로 읽을 때
→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의 나열과 사실 관계 파악에 그침.
‘역사 서설’로 이해할 때
→ 역사가들이 어떻게 과거를 탐구하고 재구성하는지를 통찰하게 됨.
결국, 이 책의 원래 제목이었던 ‘서설(Prolegomena)’은 저자의 집필 의도를 꿰뚫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
이 책을 ‘서설’로 이해하고 읽는 독자는 단순히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아는 데서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이제부터 학습해 가는 나와 또 다른 독자들은 지속적으로 묻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 일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그 지식은 얼마나 확실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무엇인가?”
즉, 독자(인 나)는 역사적 사실의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그 사실이 어떻게 구성되고 해석되는가를 함께 탐구하는 능동적 학습자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물론 저자의 의도대로 제대로 된 학습을 한다면 말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서설’이라는 이름 아래 담긴 저자의 문제의식과 탐구 정신을 따라,
과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본격적인 역사 탐구의 여정을 시작할 준비가 모두 갖춰졌다.
계속 나아가 보자.
참고서적
1. ⟪Ancient Israel: What Do We Know and How Do We Know It?⟫ Lester L. Grabbe, 2017, t&t Clark Ltd.
2. ⟪고대 이스라엘 역사⟫ J. 맥스웰 밀러 & 존 H. 헤이스, 박문재 역, 1996, 크리스챤다이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