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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역사 재구성의 복잡성과 현대적 도전

by KEN

고대 이스라엘 역사의 연구에 관한 원칙과 방법

요약
제1장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필요한 원칙, 방법론, 그리고 현대 학계의 주요 논쟁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이 문서의 기반이 되는 자료는 이스라엘 역사 서술을 위한 ‘서설(prolegomena)’로서,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라는 인식론적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핵심적인 통찰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역사 재구성의 출발점은 텍스트가 아니라 1차 사료, 특히 고고학적 증거와 비문이어야 한다. 이러한 물질적 자료는 과거의 실재(realia)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문헌보다 더 객관적인 기반을 제공한다.

둘째, 고고학 자료 또한 해석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점차 인식되고 있다. 최근의 ‘인지-과정 고고학(cognitive-processual archaeology)’과 같은 이론적 발전은, 고고학적 해석 역시 연구자의 인식 구조와 문화적 전제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특히 이스라엘 핀켈슈타인이 제기한 ‘저연대(Low Chronology)’ 논쟁은 철기시대 연대기 설정 문제를 둘러싸고 학계 전반에 심대한 파장을 일으켰다.

셋째, 고대 이스라엘 역사 연구는 사회과학적 접근, 장기지속(longue durée) 관점, 고전학적 분석 등 다양한 학문적 도구를 비판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역사적 실체를 탐구하는 과정은 단일한 학문 방법에 의해 완결되지 않으며, 복합적 자료의 교차 분석을 통해서만 의미 있는 재구성이 가능하다.

넷째, 지난 40여 년간 성서학계는 족장 시대와 정복 모델의 역사성을 거의 포기하고, 초기 왕정기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점점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소주의자(minimalist)’와 ‘최대주의자(maximalist)’라는 구도가 형성되었으나, 현재는 많은 학자들이 최소주의적 관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절충적 입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고대 이스라엘 역사 연구는 모든 잠재적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어떠한 재구성도 잠정적(hypothetical)이라는 인식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역사적 논증은 오직 검증 가능한 사료와 엄밀한 역사적 원칙에 근거해야 하며, 신학적·이념적 전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역사 재구성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역사 재구성의 복잡성과 현대적 도전 과제


이번 장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활용되는 다양한 방법론적 접근 방식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평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과거에는 학계 전반에 일정한 합의가 존재했지만, 오늘날의 고대 이스라엘사 연구는 고고학, 사회과학, 역사기록학 등 여러 학문이 충돌과 융합을 반복하는 복합적인 지적 장(場)으로 변화하였다.

따라서 본 정리는 주요 연구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이 분야의 전문가와 관련 연구자들에게서 현재의 학문적 지형에 대한 그들의 심층적 통찰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40여 년 동안 고대 이스라엘 역사 연구는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겪었다.

한때는 올브라이트(Albright) 학파와 알트–노트(Alt–Noth) 학파가 양대 축을 이루며 학계를 주도했지만, 1970년대에 들어 족장 시대의 역사성에 대한 근본적 회의(Thompson, Van Seters)가 제기되면서 기존의 합의는 급속히 붕괴했다.


이후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모델을 둘러싼 논쟁이 심화되었고, 1990년대에는 통일왕국의 역사성 문제를 계기로 소위 ‘최소주의(minimalist)’와 ‘최대주의(maximalist)’ 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학문적 흐름은 역사 연구가 더 이상 단일한 서사에 의존할 수 없으며, 모든 사료와 해석을 엄밀한 방법론적 검증 아래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복잡성을 다루기 위한 핵심 도구 중 하나가 바로 사회과학적 접근법이다.

이는 개별 사건의 서술을 넘어,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구조와 역동성을 거시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이다.



사회 과학과 장기 지속(Longue Durée): 거시적 관점의 반영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별 사건이나 위대한 인물의 연대기로만 이해하려는 시도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역사는 단기적인 정치적 격변의 산물이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거의 변하지 않는 지리적 환경, 기후, 경제 구조, 그리고 사회적 관습이라는 장기적 흐름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과학적 이론과 ‘장기 지속(Longue Durée)’이라는 거시적 관점을 도입하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를 움직였던 근본적 동력과 구조적 변인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접근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참고) 장기지속(longue durée) 관점은 프랑스 아날학파 역사학자인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이 창안한 개념으로, 역사를 연구할 때 단기적 사건이나 변화가 아닌 수백 년에 걸친 사회적, 지리적, 경제적 구조와 지속성을 중점적으로 분석하는 접근법이다.


(1) 사회 과학적 접근의 기여와 함정

사회인류학과 사회학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예를 들어, 초기 이스라엘의 정착 과정을 단순한 군사적 정복으로 보지 않고 사회·경제적 현상으로 분석하거나, 유목민과 부족 사회의 역동성을 탐구하며, 복잡한 사회 구조가 어떻게 국가 형성으로 발전했는가를 설명하는 데 사회과학적 모델은 매우 유용한 분석 도구로 작용했다.

이러한 접근은, 성서 본문 이면에 숨겨진 사회적 현실과 구조적 맥락을 조명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이 사회과학 이론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방법론적 문제점들은 결코 가볍지 않으며,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다음은 고려해봐야 할 주요 함정들이다.


이론의 오용

사회과학 이론은 우리에게 자료를 바라보는 틀(프레임)을 제공하지만, 그 자체가 역사적 결론을 미리 정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 연구는 특정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뒤, 그 틀에 맞춰 성서 데이터를 재단하는 오류를 범했다.


본문의 무비판적 수용

성서 본문은 고대 사회를 직접적으로 관찰한 객관적 ‘인류학 보고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일부 연구는 본문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간과하고, 마치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역사 기록으로 취급했다.


데이터의 과잉 해석

특정 사회학적 이론의 틀에 맞추어 본문에서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끌어내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이는 종종 언어학적 분석의 오용과 결합되어, 근거가 부족한 추측을 ‘학문적 결론’으로 포장하는 결과를 낳는다.


현대적 가치의 투영

연구자가 자신의 현대적 윤리관이나 신학적 관심사를 과거에 투영하는 것은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

예컨대, ‘도시 = 악’, ‘시골 = 선’ 혹은 ‘가나안 도시국가 = 부패’, ‘이스라엘 정착민 = 순수’와 같은 이분법적 가치 판단을 사회학적 분석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객관적이어야 할 사회 분석을 이데올로기적 해석으로 변질시키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2) 아날학파와 장기 지속(Longue Durée)의 관점

프랑스의 아날(Annales) 학파, 특히 페르낭 브로델(F. Braudel)은 역사를 세 가지 시간적 층위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 단기적 사건 (Histoire événementielle)

— 정치, 전쟁 등 빠르게 변화하는 개별 사건의 역사


2) 중기적 과정 (Histoire conjonctures)

— 경제 순환이나 사회 변동처럼 수십 년에 걸쳐 나타나는 구조적 변화의 역사


3) 장기 지속 (Longue Durée)

— 지리, 기후, 지질 구조 등 수백 년 이상 거의 변하지 않으며 역사의 근본적 틀을 형성하는 요인의 역사


이 관점을 적용하면,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적 경로가 왜 근본적으로 달랐는가를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지리, 강수량, 토양, 천연자원과 같은 ‘장기 지속’ 요인들은 두 지역의 운명을 깊이 규정했다.


북부의 이스라엘은,

상대적으로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자원을 기반으로 강력한 경제력과 정치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반면 남부의 유다는,

척박한 산지 지형과 제한된 농업 생산량으로 인해, 오랜 기간 빈곤하고 약소한 세력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근본적 불균형은 두 왕국의 정치적·사회적 관계는 물론, 역사 전반의 흐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결국 이러한 ‘장기 지속’의 거시적 모델은 물질적 증거를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고고학적 논쟁, 특히 므깃도와 같은 유적지의 기념비적 건축물의 연대 문제는, 바로 이러한 북부와 남부 간의 구조적 권력 격차 모델을 뒷받침하거나 반박하는 핵심 데이터를 제공한다.


따라서 연대기 논쟁은 단순한 연도 문제를 넘어, 고대 이스라엘 지역에서 국가 형성이 언제, 누구에 의해 주도되었는가를 둘러싼 본질적인 역사 논쟁이라 할 수 있다.



고고학: 유물의 해석과 논쟁


고고학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 연구에서 이중적인 위상을 지닌다.

한편으로, 고고학적 유물은 문헌 자료와는 독립적으로 과거의 실재를 증언하는 객관적 1차 사료로서, 역사 재구성의 견고한 토대를 제공한다. 발굴된 도기, 건축 잔해, 인장과 비문 등은 성서에 기록된 사건이나 사회 구조의 실제적 배경을 탐구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동시에, 유물 그 자체는 침묵한다.

고고학적 자료는 그것을 바라보는 연구자의 해석 틀과 이론적 전제를 통해서만 의미를 획득한다. 같은 유적이라도 발굴자의 시대적 배경과 학문적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역사적 서사가 도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학자는 특정 파괴층을 ‘이스라엘의 정복’의 흔적으로 해석하지만, 다른 학자는 이를 ‘내부 사회 붕괴’의 결과로 본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곧 고고학의 객관성 한계를 드러낸다.


따라서 고고학 자료를 역사 연구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발굴 결과를 인용하는 것을 넘어 그 해석이 의존하는 이론적 배경과 방법론적 전제를 명확히 검토해야 한다.

고고학은 과거의 물질적 흔적을 제공하지만, 그 흔적을 역사로 재구성하는 과정은 언제나 이론, 해석, 그리고 인간의 상상력이 개입된 복합적 작업이기 때문이다.



(1) 고고학 이론의 발전과 적용

팔레스타인 고고학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론적·방법론적 전환을 거듭하며 큰 변화를 겪어왔다.

그 주요한 흐름은 다음의 세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성서 고고학 (Biblical Archaeology)

윌리엄 F. 올브라이트(W. F. Albright)로 대표되는 전통적 접근 방식이다.

이 시기 고고학의 주된 목표는 성서 기록의 역사성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성서는 발굴과 해석의 핵심 지침으로 사용되었으며, 고고학은 이를 뒷받침하는 보조 학문으로 기능했다. “한 손에는 삽을, 다른 한 손에는 성서를”이라는 이가엘 야딘(Yigael Yadin)의 말은 이 시기의 학문적 태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과정주의 고고학 (Processual Archaeology)

1960년대 ‘신 고고학(New Archaeology)’으로도 불린 이 접근은, 고고학을 보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 분야로 정립하려는 시도였다. 사회를 생계, 교역, 기술 등 여러 하위 시스템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하고, 문화 변동을 환경 적응의 결과로 설명했다. 가설 설정과 경험적 검증을 중시함으로써 연구의 과학성을 강화했으나, 지나치게 결정론적이고 인간 행위의 다양성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후기 과정주의 및 인지–과정주의 고고학 (Post-processual & Cognitive-processual Archaeology)

1980년대 이후 등장한 이 흐름은, 과정주의의 기계론적·객관주의적 한계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 해석의 주관성을 인정하고, 상징, 이데올로기, 개인의 행위와 인식 같은 인지적 요소를 중시했다. 물질문화(유물 등)는 단순히 사회를 반영하는 결과물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구성하고 재생산하는 능동적 행위자로 이해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과정주의의 과학적 방법론을 유지하면서도, 후기 과정주의의 통찰을 수용한 ‘인지–과정주의’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


요컨대, 팔레스타인 고고학의 발전사는 성서의 확인에서 출발하여, 사회 시스템의 분석을 거쳐, 인간 인식과 상징체계의 탐구로 확장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2) 고고학 자료 해석의 주요 난제

고고학 자료는 문헌과 달리 과거에 실제로 존재했던 물질적 증거라는 점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고고학자 데이비드 우시슈킨(David Ussishkin)이 지적했듯이, “고고학자의 작업은 경찰 탐정의 일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발굴은 그 자체로 데이터를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고고학자는 셜록 홈즈처럼 주어진 단서를 가장 객관적으로 조합하고 해석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닌다.


특히 고대 역사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 난제들이 존재한다.


시대 구분의 혼란

철기 II 시대(기원전 1000–586년)의 세부 연대 구분은 학자마다 달라 극심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이는 동일한 시기를 논의하면서도 서로 다른 자료를 참조하게 만들어 학문적 소통의 장애로 작용한다.

- 아미하이 마자르(Amihai Mazar): IIA를 1000–925년, IIB를 925–720년으로 구분

- NEAEHL(New Encyclopedia of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the Holy Land): IIA 1000–900년, IIB 900–700년, IIC 700–586년

- 가브리엘 바르카이(G. Barkay): IIA를 10–9세기, IIB를 8세기로 설정

- 헬가 바이페르트(H. Weippert): IIA 1000–900년, IIB 925/900–850년


이처럼 연대 구분이 통일되지 않아, ‘철기 IIA 시대의 유적’이라는 표현이 학자마다 전혀 다른 시기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저연대(Low Chronology)’ 논쟁

이스라엘 핀켈슈타인(Israel Finkelstein)이 제기한 ‘저연대(LC)’ 가설은 고대 이스라엘사 연구의 가장 근본적인 논쟁을 촉발했다. 그는 전통적으로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시대의 건축물로 여겨졌던 므깃도, 하솔 등의 대형 유적을 약 1세기 늦춰 기원전 9세기 오므리 왕조의 유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의 핵심 근거 중 하나는, 기존의 전통 연대기에서는 기원전 9세기에 설명되지 않는 ‘공백기’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저연대는 이 공백을 자연스럽게 메워주며, 결과적으로 기념비적 건축의 주체를 솔로몬 왕국에서 오므리 왕조로 이동시키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즉,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보다 먼저 ‘실질적 국가’를 형성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미하이 마자르는 ‘수정된 전통 연대(MCC, Modified Conventional Chronology)’를 제시하며 반박했다.


논쟁은 이후

- 방사성탄소연대측정,

- 에게해 지역 토기 연대 비교 (영국의 N. 콜드스트림 등은 저연대가 더 부합한다고 주장),

- 이집트 파라오 쇼솅크(Sheshonq)의 침공 시기 등 다양한 쟁점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방사성탄소연대의 경우, 마자르가 지적하듯 기원전 880–830년대의 ‘교정 곡선 고원지대(plateau)’ 때문에 정밀한 연대 측정이 본질적으로 어렵다. 결국 양측 모두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데이터를 제시할 수 있어, 이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학계의 가장 뜨거운 현안으로 남아 있다.

참고) 교정 곡선 고원지대
교정 곡선의 고원지대(plateau)란 분석화학이나 계측학에서 교정 곡선(calibration curve)을 작성할 때, 일정 구간에서 신호(signal, X값)의 증가가 실제 농도(concentration, Y값)의 증가에 비례하지 않고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는 비선형 구간을 의미. 기기의 응답이 더 이상 농도 증가에 반응하지 않는 안정 구간으로서, 정량 분석 범위의 한계점을 나타내는 구간.


위조품 문제

비공식 거래 시장을 통해 나온 유물, 특히 비문이나 인장(seal)의 경우, 출처의 불분명함 때문에 신뢰도가 낮다.

대표적 사례로, 한때 예레미야의 서기관 바룩의 인장으로 알려져 큰 반향을 일으켰던 유물이 최근에는 정교한 위조품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은 상업적 이익을 노린 위조 행위가 고고학계에 얼마나 깊이 침투했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공식적이고 통제된 발굴 과정을 통해 확보된 자료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경고이기도 하다.


요컨대, 고고학은 과거의 실체를 복원하려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지만, 그만큼 방법론적 엄밀성과 윤리적 신뢰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쉽게 오류와 왜곡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참고) 바룩의 인장(seal) 위조
예레미야의 서기관 바룩(네리야의 아들)의 이름이 새겨진 것으로 알려진 인장(seal) 유물은 1975년 예루살렘 남서쪽 발굴에서 발견된 약 250개의 점토 인상(bulla) 중 하나로 히브리어로 “네리야의 아들 바룩의 것”(לברוך בן נריהו הסופר) 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한때 성경 인물의 실존을 입증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로 주목받았으나 이후 이 인장은 위조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을 받게 되어 논란의 중심에 섰던 것


(3) 고고학과 민족 정체성

“토기는 민족과 동일한가?(pots equal people)”라는 질문은, 유물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규명하려는 시도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과거 고고학에서는 특정한 토기 형태나 건축 양식을 하나의 민족 집단과 직접적으로 연결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예를 들어, ‘4방형 주택(four-room house)’, ‘깃 달린 입구 항아리(collar-rim jar)’, 그리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은 식습관(유적지에서 돼지 뼈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 현상)' 등이 초기 ‘이스라엘 민족’을 식별하는 대표적인 고고학적 지표로 제시된 바 있다. 그러나 후속 연구를 통해 이러한 특징들이 이스라엘만의 독점적 특성이 아니라, 인접한 가나안 지역이나 주변 문화권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유물의 유사성이나 차이만으로 민족의 경계를 명확히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러한 차이는 종종 환경적 요인이나 생활양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유물만으로는 역사의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없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헌 자료, 특히 성서 본문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활용하여 역사 재구성의 또 다른 축으로 삼을 수 있을까?



역사 기록학과 본문 비평: 사료의 본질에 대한 성찰


성서를 비롯한 고대 본문 자료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가장 다루기 어려운 사료이다. 이들 텍스트는 과거 사건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저자의 신학적·이데올로기적 관점이 깊이 개입된 서사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본문을 역사적 사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비판적 분석과 본질에 대한 성찰, 즉 역사 기록학적 접근 원칙이 필수적이다.


이런 점들과 연계하여 이러한 원칙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그리고 현대 성서학이 직면한 주요 논쟁점들이 무엇인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1) 역사 서술의 원칙과 발전

현대 역사학은 19세기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로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했다.

그는 역사 연구의 목표를 “과거가 본래 어떠했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를 밝히는 데 두었으며, 이를 위해 1차 사료와 2차 사료의 구분, 그리고 엄격한 사료 비평(Quellenkritik)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유명한 문장은 종종 순진한 객관주의의 선언으로 오해된다.

실제 맥락에서 랑케의 주장은, 역사가가 과거를 도덕적 잣대로 재단하던 기존의 관행을 비판하고, 그 대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가능한 한 충실히 서술하려는 학문적 책임감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후 아날(Annales) 학파는 정치사 중심의 전통적 역사관을 넘어, 사회·경제사와 장기 구조적 변화에 주목함으로써 역사 연구의 지평을 확장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는, 특히 ‘언어학적 전환’으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아래, 역사 서술과 허구 서사 간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졌다.


일부 학자들은

객관적인 역사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역사 서술은 언어적 구성물, 나아가 ‘허구적 담론’에 가깝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역사 기록학의 흐름 속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사를 연구하는 고전학자들의 방법론은 고대 이스라엘사 연구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들 역시 투키디데스(Thucydides,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 같은 신뢰도 높은 사료뿐 아니라, 단편적이거나 신빙성이 낮은 문헌들 속에서 역사적 정보를 선별·재구성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왔다.


그 결과, 고전학자들은 수 세기에 걸쳐 불완전한 자료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정교한 방법론을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태도는 성서라는 복합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된 문헌을 다루는 우리에게도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2) 현대 성서학의 주요 논쟁


‘최대주의자’와 ‘최소주의자’ 논쟁

이 용어들은 성서 본문의 역사적 신뢰도에 대한 학자들의 접근 태도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최대주의자(Maximalist)’는 성서의 진술이 명백히 오류로 드러나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고 보며, 반대로 ‘최소주의자(Minimalist)’는 성서의 내용을 고고학이나 비성서적 자료로 입증될 때에만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은 학문적 논의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혼란과 대립을 심화시켰다.

실제로 주류 학계에는 성서의 증언을 “반증되기 전까지 무조건 수용”하는 의미의 진정한 ‘최대주의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용어는 상대의 동기를 의심하거나 공격하기 위한 인신공격적 낙인으로 변질되었고, 그 결과 건전한 학문적 토론의 기반을 훼손하게 되었다. 학문적 논쟁은 상대의 신념을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제시된 근거와 논증의 타당성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데올로기적 편향의 위험

모든 연구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특정한 관점이나 전제를 선호하는 경향을 지니며, 이를 흔히 ‘편안한 이론(comfortable theory)’이라고 부른다.


이는 진리 탐구보다는 자신의 신념, 신학적 입장, 혹은 세계관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경향에서 비롯된다.

특히 ‘신근본주의(Neo-Fundamentalism)’는 학문적 용어와 방법을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성서의 무오류성을 전제한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고수한다.


이러한 ‘편안한 이론’의 구체적 발현은 앞서 살펴본 사회과학 이론의 오용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예컨대 특정 사회학적 모델 즉, ‘도시는 악이다’와 같은 단순한 가치 판단을 데이터에 강요하는 행위는, 연구자가 가진 기저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이런 태도는 성서의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거부하려는 ‘성서 혐오(bibliophobia)’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형태의 독단주의(dogmatism)로서 경계되어야 한다.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방법론적 함정과 이데올로기적 위험을 고려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보다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역사 연구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 연구가 직면한 다양한 방법론적 도전 과제들을 살펴보았다.

사회과학적 모델의 적용과 그 한계, 고고학적 증거 해석을 둘러싼 논쟁, 그리고 성서 본문을 역사적 사료로 사용할 때 발생하는 근본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과거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따라서 특정 학파나 입장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 모든 자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다양한 관점을 통합하는 다각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다 엄밀하고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여섯 가지 핵심 원칙을 제시한다.


(1) 모든 잠재적 자료의 포괄적 고려

연구의 초기 단계에서는 어떤 자료도 선험적으로 배제해서는 안 된다.

성서, 비문, 고고학 유물, 주변국의 기록 등 모든 가능한 자료를 폭넓게 수집하고, 그 이후에야 각 자료의 가치와 신뢰도를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2) 1차 사료의 우선적 활용

역사 재구성은 가능한 한 사건 당대 혹은 그와 가까운 시기에 작성된 1차 사료에 근거해야 한다. 이에는 주로 고고학적 발견과 비문 자료가 해당된다.

반면, 성서 본문은 대부분 후대에 기록·편집된 2차 사료이므로, 1차 자료와의 교차 검증을 거쳐 신중히 활용해야 한다.


(3) ‘장기 지속(Longue Durée, 롱 뒤레, long duration)’ 관점의 필수적 인식

개별 사건의 이해는 그것이 놓여 있는 지리, 기후, 경제 구조 등 장기적 요인을 고려할 때에만 가능하다.

특히 이스라엘과 유다의 상이한 역사적 경로를 분석하는 데 있어, 이 장기 지속적 구조에 대한 인식은 핵심적 분석 틀이 된다.


(4) 사건과 자료의 개별적·비판적 평가

모든 사건과 자료는 자체의 맥락과 신뢰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하나의 자료가 불신된다고 해서 다른 모든 자료를 배제할 이유는 없으며, 반대로 한 자료가 신뢰할 만하다고 해서 전체 서사를 그대로 수용해서도 안 된다. 자료 간의 균형 잡힌 판단이 필수적이다.


(5) 모든 재구성은 ‘잠정적 가설’임을 인식

역사 연구를 통해 도달한 결론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현재까지의 증거를 토대로 한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일 뿐이다. 새로운 자료나 해석이 등장하면 언제든 수정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개방적 태도가 필요하다.


(6) 입증 책임의 원칙

역사 연구에는 ‘무죄 추정’이나 ‘기본 입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성서의 진술을 따르든 거부하든, 모든 역사적 주장은 논증을 통해 스스로 입증되어야 한다.

입증의 책임은 주장을 제기하는 연구자에게 있다.


이러한 원칙에 기초한 엄밀하고 자기비판적인 방법론적 접근만이 이념적 양극단을 넘어, 고대 이스라엘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역사적 실체에 대한 보다 신뢰할 수 있는 이해와 해석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이다.



참고서적

1. ⟪Ancient Israel: What Do We Know and How Do We Know It?⟫ Lester L. Grabbe, 2017, T&t Clark Ltd.

2. ⟪고대 이스라엘 역사⟫ J. 맥스웰 밀러 & 존 H. 헤이스, 박문재 역, 1996, 크리스챤다이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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