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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후기 청동기~철기 IIA(BC 1300~900)

고대 히브리인의 정착에서 국가형성에 이르기까지

by KEN

고대 이스라엘의 형성: 후기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 IIA까지의 역사와 고고학 (기원전 1300년–900년경)

요약
제3장은 후기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IIA 시대에 이르는 약 400년간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며, 이 시기를 둘러싼 주요 학술 논쟁과 고고학적 증거, 그리고 문헌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이 시기의 해석은 핑켈슈타인이 제기한 ‘저연대(Low Chronology)’와 전통적 입장인 ‘고연대(Conventional Chronology)’ 사이의 첨예한 대립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연대 논쟁은 주요 유적의 지층 연대를 재설정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성서가 묘사하는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왕국’이 실제 역사적 실체였는가 하는 문제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고고학적 자료는 북부 고원지대(에브라임, 므낫세)와 남부 유다 산지 사이의 현저한 발전 격차를 보여준다. 북부 지역은 후기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구 밀도가 높고 지속적인 발전을 이룬 반면, 유다는 상대적으로 인구가 희박하고 사회적 발전 속도가 더뎠다. 이러한 차이는 유다 중심의 강력한 통일 왕국이 이미 기원전 10세기에 존재했다는 성서의 기술과 명확히 배치된다. 특히 예루살렘의 성격에 대해서는, 10세기에 이미 거대한 수도였다는 견해와 8세기 무렵에야 비로소 주요 도시로 성장했다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는데,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증거는 후자의 주장을 더욱 뒷받침한다.

종합하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국가는 성서가 묘사한 대제국이 아니라, 제한된 영토를 통치한 부족 연맹 혹은 초기 국가 단계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 기념비적 건축물이나 발달된 행정 체계의 명확한 증거는 주로 기원전 9세기 이후, 특히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 시기에 나타난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은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이라는 단일 사건의 결과라기보다, 가나안 토착민, 샤수(Shasu) 유목민, 아피루(‘Apiru) 등 다양한 지역 집단이 점진적으로 융합하며 형성된 복합적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다.

마지막으로, 메르넵타 석비는 기원전 약 1208년에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이 존재했음을 증명하지만, 그들의 정확한 위치나 사회적 성격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는 이스라엘의 기원이 단선적 사건이 아닌 점진적 형성과 통합의 역사였음을 시사한다.



전환의 시대, 논쟁의 시작


제3장은 후기 청동기 시대 후반부터 철기 시대 IIA(기원전 약 1300–900년경)에 이르는 약 4세기를 심층적으로 다룬다. 이 시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국가 형성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결정적 전환기로, 이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적 증거, 성서 외 문헌, 그리고 성서 서술이라는 세 가지 핵심 자료를 비판적으로 교차 분석하는 접근이 필수적이다.


이 시대에 대한 해석은 학자들 사이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따라서 본 정리 자료는 특정 학파의 입장을 취하기보다는, 주요 논점과 상반된 견해들을 포괄적으로 검토함으로써 현대 학계의 논의 지형을 균형 있게 조망하고자 한다.


두 가지 근본 논쟁

이 시기를 둘러싼 학문적 논의의 중심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쟁점이 있다.


(1) 연대기 논쟁:

전통적 연대보다 고고학적 지층의 연대를 하향 조정하려는 ‘저연대론(Low Chronology)’은 고고학적 유물의 절대 연대와 이스라엘 역사 연표 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들었다.


(2) 성서 서술의 역사성:

출애굽, 가나안 정복, 통일 왕국 등의 서사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반영하는지, 아니면 후대의 신학적 기억과 문학적 재구성인지를 둘러싼 논쟁이다.


이 두 논쟁은 다윗과 솔로몬으로 대표되는 ‘통일 왕국’의 실체와 이스라엘 국가의 성립 과정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 시기의 역사 해석에 있어 결정적 분기점을 이룬다.


세 가지 주요 사료의 상호 보완적 활용

내용의 정리는 다음의 세 가지 사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1) 고고학적 증거:

토기, 건축물, 묘지 등 물질문화는 가장 객관적인 자료를 제공하지만, 연대 측정과 해석의 방법론에 따라 상이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2) 성서 외 문헌:

이집트, 아시리아, 모압 등 주변 제국의 비문은 당시 팔레스타인(지역)을 바라본 외부의 동시대적 시각을 제공하지만, 대부분 단편적이며 정치적 선전의 성격을 띤다.


(3) 성서 본문:

가장 상세한 서사를 담고 있으나, 후대의 신학적 목적과 공동체적 기억 속에서 형성된 ‘신앙의 역사’이기에 그 역사적 신빙성을 평가할 때에는 비판적 검증과 층위 분석이 요구된다.


이상의 논의에 따라, 이번 장은 먼저 고고학적 발견과 그 해석을 둘러싼 논쟁부터 살펴본다.

이는 후기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의 이행기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논쟁적인 자료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후 성서 외 비문과 성서 서술을 차례로 검토하며, 각 자료가 제시하는 이스라엘 형성사의 상(像)을 비판적·비교적으로 재구성하겠다.



고고학적 지형과 연대기 논쟁


고고학은 고대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 가장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근거를 제공하지만, 그 해석 특히 연대 측정의 문제를 둘러싼 학술적 논쟁은 여전히 치열하다.


이스라엘 핀켈슈타인이 주창한 저연대론(LC)과 아미하이 마자르 등이 지지하는 수정 통상 연대론(MCC)의 대립은 다윗과 솔로몬 시기의 ‘통일 왕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저연대론은 전통적으로 기원전 10세기(솔로몬 시대)로 여겨졌던 주요 기념비적 건축물들 예를 들어, 메기도·하솔·게셀의 6실문(六室門) 구조나 대형 성벽을 기원전 9세기(오므리 왕조 시대)로 재배치한다.

이로써 ‘통일 왕국’은 광대한 제국이 아닌, 소규모 추장 사회 수준의 느슨한 정치 연합으로 재해석된다.

따라서 연대기 논쟁은 단순히 연도를 조정하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 형성의 시기와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 쟁점으로 자리한다.


(1) 후기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의 전환

기원전 1200년경, 후기 청동기 문명은 동지중해 전역에서 급격히 붕괴했다.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에 자주 등장하는 ‘아피루(‘Apiru)’나 ‘샤수(Shasu)’와 같은 사회 주변부 집단은 이 혼란기를 틈타 활동 범위를 확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도 하솔, 므깃도, 라기스 등 주요 도시가 파괴되며 번영했던 가나안 도시국가 체제는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붕괴의 양상은 지역마다 달랐다.


이스라엘 핀켈슈타인은 해안 지역이 광범위한 파괴를 겪은 반면, 북부 계곡과 산악·농촌 지역에서는 인구와 물질문화의 연속성이 상당 부분 유지되었다고 본다. 이는 이스라엘의 기원을 외부 세력의 침입(정복)으로 설명하기보다, 기존 가나안 사회 내부의 점진적 변화와 재구조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함을 시사한다.

참고) 핀켈슈타인의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해양민족에 의한 지역 파괴 주장과 상충한다.

해양민족(바다 민족)에 의한 팔레스타인 지역 파괴는 주로 후기 청동기 시대 말기인 기원전 12세기경으로 추정한다. 당시 이집트와 가나안 지역은 해양민족들의 대대적인 침입과 공격을 받았는데, 이 민족들은 히타이트, 크레타, 이집트 등 주변 강국들을 약화시키고 여러 고대 문명을 붕괴시킨 요인으로 여겨진다.

특히 필리스티아인들은 해양민족 중 하나로, 크레타에서 기원해 남가나안 지역에 정착하여 결국 5개 도시국가 연합체인 필리스티아 연합을 형성했다. 이 시기가 이집트의 가나안 통치력이 약화되고, 팔레스타인 및 가나안 남부 해안 지역에 변동이 일어난 시기로 여겨진다.

이집트는 해양민족의 공격으로 국력을 많이 소모했고, 필리스티아인들을 남가나안에 거주하도록 허용하고 용병으로 삼아 남은 해양민족을 축출하려 했으나, 결국 필리스티아인들은 마치 자기 땅처럼 그 지역을 점유하며(블레셋) 이집트는 가나안의 지배력을 상실한다. 이 상황은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북쪽 산지에 정착하게 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2) 주요 지역별 고고학적 증거와 해석의 다양성

각 지역의 발굴 자료는 연대기 논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스라엘 형성사의 전체 그림이 달라진다.


1) 북부 계곡과 갈릴리: '솔로몬 건축' 시점의 재해석

북부의 하솔과 므깃도 유적은 고대 이스라엘의 초기 국가 형성을 둘러싼 연대기 논쟁의 핵심 무대다.

이스라엘 고고학의 선구자 이갈 야딘(Yigael Yadin)은 므깃도 VA–IVB 지층과 하솔 X 지층에서 발견된 성문과 성벽을, 성서에 기록된 솔로몬의 건축 사업 즉, “솔로몬이 예루살렘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였더라”(열왕기상 9:15)와 연결시켰다. 이 해석은 오랫동안 기원전 10세기 통일 왕국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을 지닌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핀켈슈타인은 저연대론(LC)을 통해 이 지층들의 형성 시기를 10세기가 아닌 9세기, 즉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 시대로 하향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10세기 이스라엘은 아직 기념비적 건축을 수행할 역량이 없는 초기 국가 단계에 불과했으며, 실질적인 도시화와 행정 체계의 발전은 9세기 오므리와 아합의 통치기에 이루어졌다.


반면 아미하이 마자르와 같은 학자들은 수정 통상 연대론(MCC)의 입장에서 야딘의 전통적 해석이 여전히 설득력을 가진다고 본다. 그들은 탄소-14 연대 측정 결과와 일부 도자기 양식 분석이 기존의 10세기 연대 배정을 지지하거나 최소한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동일한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이라도, 그 연대 해석의 방향에 따라 이스라엘 국가 발전사의 전체 서사가 완전히 달라진다. 즉, 10세기의 통일 왕국이 강력한 제국적 국가였는가, 혹은 9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체계적 국가 형태를 갖춘 북이스라엘 왕국이 등장했는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학계의 가장 첨예한 논쟁 중 하나로 남아 있다.


2) 중부 산지: '이스라엘' 정체성의 지표 논쟁

이스라엘의 심장부로 여겨지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등 중부 산지 지역에서는 철기 시대 I기(Iron I) 동안 정착촌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이 관찰된다. 이러한 급격한 인구 증가는 오랫동안 ‘초기 이스라엘 민족의 등장’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지표로 해석되어 왔다.


과거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물질문화적 특징들을 ‘초기 이스라엘인’을 구분하는 주요 근거로 제시했다.

- 계단식 경작

- 회반죽 저수조

- 네 칸 구조 가옥

- 깃 달린 입구 항아리

- 돼지고기 소비 금지


이러한 특징들은 한때 ‘이스라엘 정체성의 고고학적 표식’로 간주되었으나, 최근 연구들은 이 해석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우선, 이들 요소 대부분은 특정 민족의 고유한 문화라기보다는 산악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실용적 생활양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 계단식 경작은 이미 청동기 시대부터 광범위하게 사용된 농업 기술이었고,

- 깃 달린 입구 항아리 또한 해안 지역과 남부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 돼지고기 소비 금지 역시 단지 종교적 금기가 아니라, 기후·사육 효율·경제적 요인 등 다양한 이유로 고대 근동 여러 집단에서 독립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물질문화의 공통성만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명확한 민족 정체성을 규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중론이다. 즉, 중부 산지의 새로운 정착촌들은 단일한 민족적 ‘출현’의 결과라기보다, 후기 청동기 사회 붕괴 이후 지역 주민들의 재정착과 사회·경제적 재편 과정에서 형성된 다층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3) 남부 산지와 예루살렘: 발전 격차와 수도 논쟁

고고학적 조사 결과, 유다 산지의 인구 밀도와 사회 발전 수준이 북부 산지보다 현저히 낮았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비 오페르, 군나르 레만, 제에브 헤르조그 등의 연구에 따르면, 철기 시대 I–IIA 시기 유다 산지의 인구는 북부 에브라임·므낫세 지역의 약 25~50% 수준에 불과했다. 이러한 뚜렷한 남북 간 발전 격차는 성서가 묘사하는 유다 중심의 ‘통일 왕국’ 개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10세기 예루살렘의 위상을 둘러싼 논쟁은 학계의 대표적 대립 사례다.

제인 케이힐과 에일랏 마자르 등은 ‘계단식 석조 구조물’ 등의 유적을 근거로, 10세기 예루살렘이 이미 요새화된 복합 도시였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스라엘 핀켈슈타인과 다비드 우시시킨 등 ‘미니멀리스트’ 진영은 10세기 예루살렘이 작은 요새 혹은 지역 행정 중심지 정도의 규모에 불과했다고 본다.


마르가레트 슈타이너는 케년의 발굴 자료를 분석해, 계단식 석조 구조물과 그 아래의 테라스 체계가 서로 다른 시기에, 다른 공법으로 축조되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채움토에서 발견된 토기의 연대 차이는 해당 구조물 전체를 10세기로 볼 수 없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중기 청동기 시대에 건설된 수로 체계(예: 워렌의 수갱)가 기원전 8–7세기에 이르러서야 재사용된 점은, 10세기 예루살렘에 복잡한 도시 기반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는 성서가 전하는 ‘제국의 수도 예루살렘’ 이미지와 뚜렷이 배치된다.


4) 쉐펠라와 네게브: 외부 세력의 흔적

쉐펠라 지역의 라기스와 키르벳 케이야파, 그리고 네게브 지역의 아랏 유적외부 세력의 활동과 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우시시킨은 라기스 V층을 10세기가 아닌 9세기 초반의 유적으로 보며, 이를 성서의 르호보암의 요새화나 (이집트) 쇼솅크(시삭)의 침공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다.


한편 키르벳 케이야파는 10세기경의 요새 도시로 평가되지만, 그 정확한 연대(발굴팀: 기원전 1025–975년 / 핀켈슈타인: 기원전 1050–915년), 민족적 정체성(유다, 이스라엘, 혹은 가나안?), 그리고 성서의 ‘사아라임’ 또는 ‘곱’과의 동일시 여부를 두고 학자들 간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참고) 성서에서 “사아라임(שָׁעָרַיִם, Shaaraim)“은 히브리어로 “두 개의 문들”을 의미하는 지명으로, 유다 지파 영토에 있던 고대 도시·성읍을 가리킨다. “곱”은 성경에 등장하는 지명으로 보이며, 문맥에 따라 ‘곡식’이나 ‘수확’을 뜻하기도 하지만, 사아라임과는 별도로 고대지명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사아라임은 주로 여호수아 15:36과 사무엘상 17:52 같은 구절에서 나타나며, 유다 지파의 경계 내에 있던 성읍으로서 엘라 골짜기 근방에 위치해 있다. 엘라 골짜기는 다윗이 골리앗과 싸운 유명한 장소다. 성경은 다윗이 블레셋과 싸운 후 병사들이 사아라임을 지나 각지로 흩어졌다고 기록한다(삼상 17:52).고고학적으로는 “키르벳 케이야파(Khirbet Qeiyafa)”를 사아라임으로 추정하는데, 이곳은 고대 도시의 성벽과 두 개의 문을 가진 구조가 보존된 유적지로 알려져 있다.성경에 “곱”은 여러 뜻으로 나오지만, 대표적으로 “곡식”이나 “풍요로움”을 의미한다. 고대 근동지역의 곡물 단위 혹은 지명으로도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사아라임과 곱은 직접 연관된 용어는 아니며, 곱은 특정 도시명보다는 주로 곡식이나 농산물 관련 맥락에서 등장한다.

특히 크리스토퍼 롤스턴은 이곳에서 발견된 오스트라콘(ostracon, 도편)이 왕권이나 행정 체계에 대한 구체적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왕국의 존재’를 전제한 과대 해석을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와 더불어, 이집트 파라오 쇼솅크 1세(성서의 시삭, Shoshenq I)의 원정은 이 시기의 연대기 설정에 있어 중요한 기준점으로 활용된다. 그의 침공과 관련된 가장 확실한 파괴층으로는 네게브의 아랏 XII층이 지목된다.

이 지층의 연대를 기원전 10세기 후반으로 고정하면, 다른 유적들의 상대 연대 역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쇼솅크의 원정이 전면적인 파괴를 동반한 정복이었는지, 혹은 특정 거점을 점령하는 제한적 작전이었는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3) 종합 및 전환

우시시킨이 지적했듯, 연대기 논쟁은 고고학적 방법만으로는 명확히 결론 내리기 어려운 영역에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기원전 10–9세기 팔레스타인의 발전 중심이 북부 지역에 있었으며, 남부 유다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북남 간의 현저한 발전 격차는 성서가 묘사하는 유다 중심의 거대한 통일 왕국상과는 근본적으로 상충한다.

이에 따라 다음 장에서는 이 모호한 고고학적 그림을 당시의 외부 문헌 즉, 성서 외 기록과 교차 검증하여 그 시대의 실체를 보다 입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성서 외 문헌에 나타난 이스라엘과 주변 민족


고대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서 외의 동시대 기록을 검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집트와 아시리아 등 주변 강대국들의 비문과 문헌은 성서의 서술을 검증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외부적 시각을 제공하며, 당시 근동 세계의 지정학적 구도와 세력 관계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 메르넵타 석비: 최초로 등장한 ‘이스라엘’

이집트 파라오 메르넵타의 석비(기원전 약 1208년)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확실한 문헌 기록이다. 이 석비는 리비아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한 것이지만, 그 말미에는 가나안 지역 원정의 성과를 열거하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고, 그의 씨는 더 이상 없다.”


이 구절의 해석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이스라엘’ 앞에 붙은 한정사이다.

아스글론과 게셀 등 다른 도시에는 ‘도시’ 또는 ‘영토’를 뜻하는 한정사가 사용된 반면, ‘이스라엘’에는 ‘민족’ 혹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한정사가 붙어 있다. 이는 기원전 13세기말, 이스라엘이 아직 중앙집권적 국가나 도시국가로 발전하지 않은 부족 연합체였음을 시사한다.


일부 학자들 예를 들어 케네스 키친은 석비에 나열된 지명 순서를 근거로 ‘이스라엘’을 가나안 산지 지역에 위치시켰으나, 나답 나아만은 이를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결국 이 석비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최초로 언급한 귀중한 자료이지만, 그 정확한 위치나 정치적 규모를 확정하기에는 불충분한 정보만을 제공한다.


(2) ‘바다 민족’과 블레셋의 등장

파라오 람세스 3세의 장례 신전인 메디네트 하부(Medinet Habu)의 부조와 비문은, 기원전 12세기 초 근동을 뒤흔든 ‘바다 민족’의 침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기록은 전통적으로 에게해 지역에서 온 블레셋을 비롯한 여러 집단이 팔레스타인 해안 평야에 침입하고 정착한 사건의 역사적 증거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미니멀리스트’적 관점은 이 기록을 이집트 왕실의 선전(프로파간다)으로 해석한다.

즉, 실제 사건이라기보다 왕의 업적을 과장하고 신격화하려는 정치적 문서라는 것이다.

고고학적 자료를 종합하면, 블레셋의 정착은 단 한 번의 침공이 아닌, 수십 년에 걸친 점진적 이동과 융합 과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대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

아미하이 마자르는 ‘중기 연대론’(ca. 1175 BCE)을,

핀켈슈타인과 우시시킨은 ‘저연대론’(ca. 1140–1130 BCE 이후)을 제시한다.

특히 우시시킨은 라기스 유적에서 블레셋식 토기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블레셋의 정착이 라기스가 파괴된 기원전 1130년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물질문화 특히 뮈케네 IIIC:1b 양식 토기는 기존 가나안의 문화와 결합하여, 서로 얽히고 뒤섞인 ‘혼성 문화’를 형성했다. 이는 블레셋의 정착이 단순한 침략이 아닌, 복합적 이주와 문화적 융합의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3) 쇼솅크 1세의 원정 기록 재검토

이집트 카르나크 신전에는 22왕조 창시자 파라오 쇼솅크 1세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정벌했다고 주장하는 지명 목록이 새겨져 있다. 전통적으로 이 비문은 열왕기상 14장에 기록된 “시삭(Shishak)의 유다 침공” 기사와 동일한 사건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케빈 윌슨의 연구는 이 전통적 해석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이 지명 목록이 단일 원정의 경로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군사 활동과 기존 문헌을 취합해 파라오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선전용 자료로 제작되었다고 본다.


실제로 목록에는 유다 지역의 지명은 거의 없고, 오히려 북이스라엘 지역의 도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또한 성서의 기록과는 달리 예루살렘이 언급되지 않는 점도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에 따라 학자들은 쇼솅크의 실제 원정 목적이 유다 정복이 아닌, 네게브 지역의 구리 교역로 및 경제적 이권 확보에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처럼 성서 외 문헌들은 성서의 기록과 때로는 일치하지만, 많은 경우 서로 다른 혹은 상충하는 역사적 상을 제시한다. 그렇기에 고대 이스라엘의 초기 형성과 발전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고학적·외부적 증거를 토대로 출애굽, 정복, 통일 왕국 등 성서의 중심 서사를 비판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이 불가피하다.



성서 서사 대 역사적 재구성


성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과 정체성을 가장 상세하고 강력한 이야기로 전한다.

그러나 이 서사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야훼 신앙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신학적 목적 아래 후대에 형성된 ‘신앙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 장의 목표는 성서 서사를 문자 그대로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앞서 살펴본 고고학적·문헌학적 자료와의 교차 분석을 통해 그 속에 담긴 역사적 핵심과 후대의 문학적 창작을 비판적으로 분리하는 데 있다.


(1) 출애굽과 정복 설화의 역사성 평가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서에 담긴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서사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설명하는 핵심 이야기지만, 이를 실제 역사로 보기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신화와 현실의 간극

이집트 문헌의 침묵: 장정 60만 명이 탈출하고, 이집트 군대가 전멸했다는 대규모 사건에 대해 동시대 이집트 문헌은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는다.


고고학적 증거의 부재: 40년간의 방랑지로 지목되는 시나이 반도, 특히 카데스 바네아(Tell el-Qudeirat)에서는 중기 청동기 이후 10세기 이전까지 인간 거주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참고) 카데스 바네아(Tell el-Qudeirat)는 이집트 시나이 반도 북부에 위치한 고고학 유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카데스 바네아(Kadesh Barnea)로 널리 인식되는 장소. 이 유적은 여러 단계의 요새가 겹쳐져 있는 형태로 발굴되었으며, 특히 이스라엘 왕국의 남부 국경을 지키는 중요한 전략적 요새로 추정됨.
고고학적 발굴 결과, Tell el-Qudeirat에서는 사각형 모양의 여러 요새층이 발견되었는데, 최초의 요새는 기원전 10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후 8~7세기, 그리고 기원전 약 6세기까지 덧붙여진 요새들이 발굴됨. 특히 마지막 요새는 유다 왕국의 요시아 왕 시대에 건설되어 바빌로니아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확인됨.


지명의 시대착오성: ‘고센’, ‘라암셋’, ‘비돔’ 등의 지명은 기원전 13세기 람세스 시대의 지리보다 기원전 8~5세기경의 행정 체계를 더 잘 반영한다.


비현실적 서술: ‘장정 60만 명(총인구 약 200만 명)’의 규모, ‘홍해의 갈라짐’, ‘만나의 기적’ 등은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 신화적 상징으로 이해된다.


② 출애굽 설화의 기원에 대한 학설

출애굽이 실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이 이야기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학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가설을 제시한다.


힉소스 추방설: 기원전 16세기 힉소스(Hyksos)인들이 이집트에서 추방된 사건의 집단적 기억이 후대에 변형된 것.


가나안 내 이집트 압제 경험설: 후기 청동기 시대, 가나안 지역이 이집트의 속주로 지배받던 시기의 정치적 압제 경험이 설화화된 것.


유배기 신학 창작설: 바빌론 포로기(기원전 6세기경) 저자들이 신앙적·정체성적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창작한 신학적 내러티브.


(2) 사사 시대: 사회적 기억과 문학적 구조

여호수아서는 ‘완전한 정복’을 선포하지만, 사사기는 ‘부분적 정복’ 이후의 혼란을 묘사한다.

이 모순적 구조는 성서가 단일한 역사 서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전통이 결합된 문학적 산물임을 보여준다.


사사기가 그리는 중앙 권력 부재의 사회상은 고고학적으로 철기 시대 I기 산지 정착촌들의 분산적 구조와 상당히 일치한다. 그러나 개별 사사들의 이야기는 역사 기록이라기보다, 다음과 같은 신학적 순환 구조를 지닌 문학적 설계물이다.

이스라엘의 죄 → 이민족의 압제 → 백성의 부르짖음 → 야훼가 사사를 세워 구원


이 구조는 ‘야훼의 구원’이라는 중심 신학을 반복적으로 강화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드보라의 노래〉(사사기 5장)는 예외적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자료로 평가된다.

언어학적으로 매우 고대적인 이 시편은, 초기 북부 이스라엘 부족 연맹의 성격을 엿보게 한다.

특히 유다 지파가 등장하지 않는 점은, 초기 ‘이스라엘’이 북부 중심의 연맹체였으며, 남부의 유다는 그와는 별개의 집단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참고) 〈드보라의 노래〉(사사기 5장)는 이스라엘의 사사이자 예언자인 드보라와 군사 지도자 바락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의 억압자 야빈 왕과 그의 장군 시스라를 물리친 승리를 찬양하는 고대 히브리 시가. 이 노래는 이스라엘 민족 자연적 및 신학적 역사와 전쟁 경험을 담아내어, 특히 하나님 여호와의 절대적 도우심과 인도 없이는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
노래는 고대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들의 전쟁 참여 및 불참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며, 용감히 싸운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등과 히브리인 군대의 열정을 찬양.


(3) ‘통일 왕국’의 실체에 대한 재조명

성서는 사울–다윗–솔로몬으로 이어지는 ‘통일 왕국’을 이스라엘 역사의 황금기로 묘사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와 비판적 문헌 분석은 이 서사를 후대의 정치·신학적 재구성으로 본다.


① 사울 왕권의 실상

사울은 역사적 인물로 보이지만, 그의 왕권은 중앙집권적 왕국이라기보다 북부 산지 중심의 소규모 정치체(Chiefdom)로 추정된다. 그는 군사적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크며, 성서의 부정적 묘사는 다윗 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후대 편집의 결과로 이해된다.


② 다윗의 역사적 본질

다윗 서사는 명백한 왕권 정당화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핀켈슈타인과 마자르 등은 역사적 다윗을 유다 산지의 주변부 출신 지도자, 즉 ‘아피루(‘Apiru)’ 유형의 용병 지도자로 재구성한다. 그는 블레셋 세력권 안에서 활동하며, 적대보다는 일시적 동맹 혹은 종속 관계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제시된다.


③ 솔로몬의 신화화

솔로몬의 부와 제국, 건축 사업은 이상화된 ‘동방 군주상(Königsnovelle)’의 전형으로,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

10세기 유다의 인구·경제력으로는 성서가 묘사하는 거대한 제국 유지가 불가능하며, 고고학 자료 역시 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참고) 동방 군주상(Königsnovelle)은 문학 장르 중 하나로, 고대나 중세 시기의 왕 또는 군주와 관련된 이야기 또는 전설을 다루는 단편 소설 혹은 이야기 형식을 의미. 독일어로 “왕의 이야기”를 뜻하는 이 용어는 특히 고대 근동이나 중세 유럽의 군주들이 겪는 극적인 사건이나 교훈적인 에피소드를 다루는 문학작품에 쓰임.
이 장르는 통상적으로 군주의 지혜, 용기, 정체성, 통치 철학, 혹은 도덕적 시련 등을 주제로 하며, 군주가 겪는 갈등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변화를 중심 줄거리로 삼음. 이는 군주 개인의 인격과 통치 행위에 대한 사상적 탐구와 동시에 당시 사회의 권력 구조, 이상 군주상(理想 君主像)을 반영하는 문학 형태로 기능.
동방 군주상의 구체적 사례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전설, 이슬람 세계의 칼리프 이야기, 몽골 칸국 군주 전기 등이 있으며, 이는 이후 유럽 중세의 왕과 황제에 관한 이야기들과도 연결되어 고전 문학과 역사서 사이에 걸친 문학적 장르로 자리 잡았음.

에른스트 크나우프는 솔로몬을 비유다계 찬탈자, 만프레드 니만은 그를 이집트 쇼솅크 왕의 봉신으로 해석했다. 이는 솔로몬 시대를 ‘황금기’가 아니라, 남부의 제한된 지역 권력기로 축소시킨 해석이다.


종합하면, 성서 서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 고대 이스라엘의 초기 국가는 성서가 전하는 거대한 통일 제국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발전한 지역 연맹체적 구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결론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형성과 발전을 설명하려는 여러 사회학적·역사학적 모델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국가 형성 과정에 대한 종합적 고찰


앞서 살펴본 고고학적·문헌적·성서적 자료를 종합하면, 이스라엘이라는 정치체의 등장은 단일한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여러 사회 집단의 상호작용과 점진적 변화가 축적된 복합적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학계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이스라엘 기원 모델을 제시해 왔으며, 그 해석의 변천은 고대 팔레스타인 사회의 동역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1) 이스라엘 기원 모델의 변천

20세기 중반까지 학계를 주도한 세 가지 대표적 모델

① 정복 모델,

② 평화적 이주 모델,

③ 내부 반란 모델은 각각의 고고학적·사회학적 한계로 인해 오늘날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이후 제시된 ‘혼합된 무리’ 모델은

앤 킬레브루가 체계화한 통합적 접근으로, 현재 학계의 가장 설득력 있는 합의 모델로 평가된다.

이 모델은 초기 이스라엘이 단일 민족이 아닌 다양한 배경의 집단 연합체였음을 전제로 한다.

그 구성에는

- 기존 가나안 농촌 인구,

- 도시국가 붕괴로 이탈한 농민·목축민,

- 사회 주변부의 아피루(‘Apiru)’·샤수(Shasu),

- 그리고 외부로부터 소규모로 유입된 이주 집단 등이 포함되었다.


이 공통 틀 안에서도 학자들 간의 강조점은 다르다.

핀켈슈타인은 토착 목축민의 정주화 과정을 핵심 동력으로 본 반면, 나답 나아만은 동지중해 문명 붕괴기에 유입된 외부 인구의 영향을 더 중시한다. 따라서 ‘혼합된 무리’ 모델은 단일 서사가 아닌, 다층적 기원과 상호교류의 역사적 복합성을 포괄하는 해석 틀이라 할 수 있다.


(2) 사회 구조의 이해: ‘부족’과 ‘유목민’ 개념의 재정의

초기 이스라엘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부족(tribe)’과 ‘유목민(nomad)’이라는 개념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인류학자 모턴 프리드는 이미 1960년대에

‘부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근대적 분류의 산물로, 고대 사회의 실제 조직 형태를 과도하게 단순화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성서의 ‘열두 지파 체계’는 혈연 기반의 실제 사회 구조라기보다, 후대 왕정 시대에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목적으로 재구성된 상징적 체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필립 잘츠만은 유목(nomadism)을 고정된 생활양식이 아닌, 정주 농경과 연속선상에 있는 유연한 경제 전략으로 설명한다. 즉, 고대 근동의 목축과 농경은 서로 대립된 체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으로 병행된 생존 방식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산지 지역 목축민이 정착촌으로 전환한 것은 외부의 강제적 변화가 아니라, 내부 사회·경제적 조건의 자연스러운 진화 과정이었다.


(3) 초기 국가의 성격 규명: 관료제, 문자, 그리고 이데올로기

기원전 10–9세기의 이스라엘과 유다를 ‘국가(state)’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인류학적 정치체 모델의 관점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의 고고학 자료 즉, 제한된 행정 흔적, 기념비적 건축의 부재를 고려하면, 이스라엘의 정치체는 완전한 국가보다는 ‘추장 사회’ 혹은 ‘분절적 국가’ 단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도시 국가 또는 영토 국가의 초기 형태로 규정하기도 한다.


특히 A. H. 조페는 기원전 10–9세기 레반트 남부의 정치체를 ‘정체성에 의해 통합된 영토 기반의 종족 국가’로 정의하며, 단순한 부족 연합과 구별되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문자와 관료제의 발달 정도 또한 국가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핵심 지표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이스라엘에는 국가 행정을 뒷받침할 광범위한 문자 사용이나 문서 행정의 증거가 거의 없다.

키르벳 케이야파 오스트라콘의 발견은 상징적이지만, 국가적 수준의 문자 행정 체계가 존재했음을 입증하기에는 부족하다. 실질적인 문자 행정·관료 조직의 정착은 기원전 8–7세기, 즉 북왕국 말기와 유다 후기 왕정기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국가 형성은 블레셋과 같은 외부 세력의 침입에 대한 즉각적 대응이라기보다,

산지 정착촌 내부의 인구 증가와 사회적 복합성의 심화가 서서히 축적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즉, 이스라엘은 외생적 충격의 산물이 아니라, 내생적 변화와 사회적 적응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종합적 관점은, ‘출애굽–정복–통일 왕국’이라는 직선적 서사가 아닌, 다원적 형성과 점진적 통합의 역사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실체를 보다 균형 있게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참고) 키르벳 케이야파(Khirbet Qeiyafa) 오스트라콘은 2008년에 발견된 고대 점토 조각 파편으로, 이곳은 예루살렘 서쪽 약 40km 떨어진 엘라 골짜기에 위치한 후기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요새 도시 유적. 이 오스트라콘은 약 3,000년 전, 즉 다윗 왕 시대(기원전 10세기경)로 추정되며,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히브리어 초기 문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오스트라콘에는 다섯 줄의 초기 히브리어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일부 단어는 “왕”, “노예”, “재판관” 등으로 해석되어 당시 사회 조직과 법률 체계가 존재했음을 시사. 탄소연대 측정과 고고학적 문맥을 통해, 이 비문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왕국의 초기 정체성을 보여주고, 성경에서 기술하는 다윗 왕과 솔로몬 시대와 연관된 역사적 증거로 받아들여짐.
이 발견은 초기 고대 이스라엘의 문자 사용과 행정, 정치적 조직 및 사회 구조의 기원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특히 성경 역사와 연관하여 여러 학문적 논쟁과 해석을 촉진해 왔음.



결론: 성서의 이스라엘에서 역사의 이스라엘로


본 자료는 후기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 IIA(기원전 약 1300–900년경)에 이르는 고대 이스라엘의 형성 과정을 고고학, 성서 외 문헌, 그리고 성서 서사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다층적으로 조명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기원은 성서가 묘사하는 극적인 출애굽·정복·통일 왕국 서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가나안 토착민을 중심으로 여러 사회 집단이 융합하며 점진적으로 형성된 복합적 과정이었음이 드러났다.


(1) 주요 합의점

현대 고고학과 문헌 연구를 종합할 때, 다음의 핵심적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


토착 기원론의 확립: 초기 이스라엘의 주된 구성원은 외부에서 이주한 민족이 아니라, 가나안 내부의 농민·목축민·사회 주변부 집단이었다.


북부의 주도적 발전: 철기 시대 I–IIA기에 북부(이스라엘)가 남부(유다)보다 인구, 경제력, 사회적 복합성 면에서 훨씬 발전되어 있었다는 점이 폭넓게 인정된다.

이러한 분석은 성서의 ‘유다 중심적 통일 왕국’ 서사를 비판적으로 재조명하게 한다.


(2) 지속되는 핵심 쟁점

그러나 학계 내에서는 여전히 몇 가지 본질적인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연대기 논쟁: 이스라엘 핀켈슈타인의 ‘저연대론’이 제시한 10–9세기의 재조정이 타당한가에 대한 이견.


예루살렘의 위상 문제: 10세기 예루살렘이 요새화된 도시였는지, 혹은 단순한 지역 행정 중심지였는지에 대한 논쟁.


‘통일 왕국’의 실체: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규모와 정치적 성격 즉, 그것이 제국이었는가, 아니면 소규모 추장 사회였는가에 대한 해석의 차이.


3. 역사적 이스라엘의 재구성

이 모든 논의를 종합하면, ‘역사적 이스라엘’은 성서가 그리는 거대한 제국이 아닌, 주변 문화와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서서히 발전한 지역적 정치체로 재구성된다. 특히 다윗 왕국의 성격에 대한 현대 학계의 접근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핀켈슈타인과 마자르처럼 상반된 입장을 가진 학자들조차, 다윗을 예루살렘과 남부 산지를 기반으로 한 소규모 정치체 지도자, 즉 ‘아피루(‘Apiru)’형 사회 주변부 지도자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놀라운 수준의 공통된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단순한 연대 측정의 문제가 아니라, ‘통일 왕국의 본질’에 대한 학문적 인식이 신화적 제국에서 역사적 공동체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적 재구성은 성서의 신학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성서 서사가 탄생하고 발전하게 된 구체적 역사적 맥락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성서의 이스라엘’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그 역사 위에서 신앙 공동체가 자신들의 정체성과 신학을 형성해 간 과정의 증언이었다.


결국, ‘성서의 이스라엘’에서 ‘역사의 이스라엘’로의 여정은 신앙과 역사, 전승과 비판이 만나는 자리에서 고대 이스라엘 문명의 실체를 더욱 깊이 성찰하게 하는 학문적이자 신학적인 탐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관련서적

1. ⟪Ancient Israel: What Do We Know and How Do We Know It?⟫ Lester L. Grabbe, 2017, T&t Clark Ltd.

2. ⟪고대 이스라엘 역사⟫ J. 맥수웰 밀러 & 존 H. 헤이스, 박문재 역, 1996, 크리스챤다이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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