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스라엘의 흥망성쇠에 대한 역사적 고찰
철기시대 IIB(기원전 900-720년): 북이스라엘 왕국
요약
제4장은 철기 시대 IIB(기원전 900–720년) 기간 북이스라엘의 역사, 정치, 종교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제공한다. 이 시기는 오므리 왕조의 부상과 함께 성서 외적 자료가 풍부해지기 시작하여, 성서 기록과 외부 사료 간의 비교 분석이 가능한 중요한 전환점이다.
핵심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시리아 기록, 아람어 비문, 메사 석비 등 외부 사료는 오므리, 아합, 예후, 요아스, 므나헴 등 북왕국의 주요 왕들과 하사엘, 벤-하닷과 같은 아람 왕들의 존재를 명확히 입증한다. 이는 성서 기록의 기본적인 연대기적 틀에 대한 신뢰도를 부여한다.
둘째, 외부 사료는 성서가 제시하는 역사적 그림과 중대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아합 왕은 성서에서 아람의 약한 적으로 묘사되지만, 아시리아 기록에서는 2,00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아람과 동맹을 맺어 아시리아에 맞선 강력한 군주로 나타난다. 또한 성서는 예후가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친 사실 등 이스라엘과 아시리아의 초기 관계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종교적 측면에서, 고고학적 발견과 비문(쿤틸렛 아즈루드, 키르벳 엘콤 등)은 이 시기 이스라엘과 유다의 종교가 다신교적 성격을 띠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야훼는 배우자 신인 아세라와 함께 숭배되었으며, 바알 숭배 역시 공존했다. 유일신 신앙은 이 시기 보편적인 신앙 형태가 아니었으며,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러서야 특정 집단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후기 현상으로 분석된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성서 본문을 비판적으로 사용하되, 고고학 및 주변 민족의 비문과 같은 외부 사료를 통해 그 내용을 교차 검증하고 보완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역사 서술의 원천과 과제
제4장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결정적인 시기 가운데 하나인 철기시대 IIB(기원전 약 900–720년)를 심층적으로 고찰한다. 이 시기는 북이스라엘이 강력한 지역 강국으로 부상했다가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비극적으로 멸망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포괄하며, 성서사(聖書史)와 고대 근동사의 교차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오므리 왕조의 등장과 함께 우리는 비로소 성서 외적 자료를 통해 성서의 기록을 비교·대조할 수 있는 풍부한 증거를 확보하게 된다.
참고) 오므리 왕조
오므리 왕조는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고 체계적인 통치를 구현한 시기로 평가된다. 그 창건자는 군 출신의 오므리(Omri)이다.
오므리는 본래 북이스라엘의 군사령관이었으나, 시므리(Zimri)가 엘라 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군대의 지지를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시므리를 제거한 뒤 또 다른 경쟁자 디브니(Tibni)와 약 4년간 내전을 벌였으며, 결국 승리하여 왕권을 확립하였다. 이로써 기원전 약 885년경 오므리 왕조가 성립하였다.
오므리는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기고, 이를 행정과 군사 중심지로 재정비하였다. 사마리아는 이후 북이스라엘의 상징적인 수도로 남게 되었으며, 외부 문헌들 예를 들어 메사 석비와 아시리아 비문에서는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땅”이라 부를 정도였다.
성경은 오므리와 그 후손들을 바알 숭배를 도입한 ‘악한 왕들’로 평가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오므리 왕조는 북이스라엘을 단순한 부족 연합체에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로 전환시킨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이 시기에는 행정 체계가 정비되고, 외교 네트워크가 확장되었으며, 군사력 또한 크게 강화되었다.
오므리 왕조는 약 50년간 존속하며 북이스라엘의 정치·경제·군사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그의 아들 아합 통치기에 왕국은 국제무대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 영향력은 이후까지도 지속되어, 아시리아의 기록에서는 예후의 왕조조차 “오므리의 집”으로 불릴 만큼 그 명칭이 고유명사처럼 사용되었다.
이 시대를 재구성하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신학적 관점에서 서술된 성서 본문,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드러나는 물질문화의 흔적, 그리고 주변 강대국이 남긴 비문과 외교 문서 등 세 가지 핵심 사료가 서로 다른 관점과 편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을 비판적으로 상호 검증하고 통합할 때 비로소 북이스라엘의 흥망성쇠를 입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역사상이 형성된다.
이번 글에서는 먼저 철기시대 IIB 연구의 기초가 되는 핵심 사료들을 유형별로 분석하여 각각의 정보적 가치와 해석상의 쟁점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오므리 왕조의 부상에서 사마리아 함락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사적 흐름을 재구성하고, 당시의 종교적·문화적 복합 지형을 살펴본다. 이러한 분석을 종합하여, 성서의 서술과 역사적 실체 사이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평가함으로써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철기시대 IIB 연구를 위한 핵심 사료 분석
철기시대 IIB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의존하는 사료의 성격과 한계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시기를 이해하는 세 가지 주요한 자료 즉 성경, 고고학적 증거, 주변국 비문과 기록은 각기 다른 종류의 정보를 제공하며, 때로는 서로를 보완하지만, 때로는 명백히 충돌하기도 한다.
따라서 각 사료가 담고 있는 정보의 본질과 해석상의 제약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이야말로 객관적이고 신뢰할 만한 역사 서술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본 장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세 가지 사료 유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철기시대 IIB의 역사적 재구성을 위한 견고한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1) 고고학적 발견과 연대기 논쟁
고고학은 성경의 기록을 물질적 증거를 통해 검증하고, 동시에 문헌이 침묵하는 시대의 사회적·경제적 현실을 복원하게 해주는 중요한 창이다. 철기시대 IIB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요 유적의 발굴 결과와 그 연대 해석이 결정적이다.
◼︎ 북왕국의 핵심 유적지
① 사마리아 (Samaria)
오므리 왕이 새 수도로 건설한 사마리아(열왕기상 16:24)는 북왕국 고고학의 연대 기준점으로 평가된다.
케년의 초기 발굴 이후, 태피와 우시시킨 등이 건축물의 시기를 재검토하였다. 특히 프랭클린은 사마리아와 므깃도에서 발견된 석공 표시와 이집트 규빗(약 0.45m)을 기준으로 한 건축 단위의 일치에 주목했다. 그는 므깃도의 1723번 궁전과 사마리아 I기 궁전이 동일한 측량 체계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오므리 왕조 시기와 예후 왕조 이후 시기의 건축 양식이 단절적으로 변화했음을 주장하며 두 유적 사이의 새로운 연관성을 제시했다.
참고) 이 측량 단위는 이집트 제22왕조(기원전 935~730년) 시기의 규준으로 알려져 있으며,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기원전 880년경 초)와 정확히 시기가 겹친다. 따라서 두 궁전이 이집트-페니키아 영향권에 있던 동시대 건축 프로젝트였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므깃도와 사마리아 모두 오므리 왕조 시기에 동일한 건축 기술자 집단이나 행정 체계 아래 지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참고) 므깃도 1723번 궁전과 사마리아 I기 궁전이 동일한 측량 체계(짧은 이집트 규빗)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오므리 왕조가 건축을 국가적·행정적 표준 시스템으로 통합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후 왕조(Jehu dynasty, 약 기원전 841–782년) 이후에는 이 통일된 건축 체계가 단절적으로 변화했고, 이 현상은 정치적·문화적 전환과 직접 연관된다.
예후는 하솔에서 아합계 왕 여호람을 살해하고 오므리 왕조를 전복한 인물이다(왕하 9장). 그는 바알 숭배 철폐와 종교정화 정책을 추진했지만, 동시에 오므리 체제의 정치적·문화적 흔적을 제거하려 했다. 따라서 오므리 왕조의 “국가적 건축 표준화”는 예후 쿠데타를 경계로 완전히 끊기게 된 것이다.
② 이스르엘과 므깃도
이스르엘 계곡의 전략적 요충지인 두 지역은 오므리 왕조 시대에 번성하였다.
특히 6실 구조 성문 등 유사한 건축 양식은 중앙집권화된 행정체계와 왕권의 강력한 통제력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유적들의 파괴층의 원인 즉 예후의 쿠데타인가, 혹은 아람 왕 하자엘의 침공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자들 간의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참고) 6실 구조 성문 유적은 고대 이스라엘 도시 성곽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방어 시설 양식으로, 성문 입구에 6개의 방(chambers)이 배치된 구조를 말한다.
성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3개의 방이 병렬로 배치되어 총 6개의 방이 성문을 감싸는 형태이다.
이러한 6실 구조는 성문 방어와 병력을 수용하기에 효율적이었고, 출입 통제 및 방어에 유리한 설계였다.
성문은 대개 두 개의 망대와 연결되며, 주변 성곽과의 연결성도 뛰어났다.
텔 므깃도, 하솔, 게젤 등 북이스라엘과 고대 근동 주요 도시에서 발견되었다.
◼︎ 유다 왕국의 상황
북왕국에 비해 초기 유다는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뎠으나, 기원전 8세기경 들어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예루살렘에서는 인구 증가와 도시 확장을 증명하는 ‘넓은 성벽’이 발견되었으며, 라기스와 브엘세바 계곡에서도 정착지의 규모가 빠르게 확대되었다.
또한 기혼 샘 인근의 9세기 후반 행정 중심지 유적에서 약 150점의 페니키아 양식 인장(bulla) 조각과 서기관의 시간 기록 장치로 추정되는 ‘15개 구멍이 뚫린 석판’이 출토되었다. 이는 오므리 왕조가 페니키아와의 교류를 통해 발전시킨 행정 기술과 제도적 영향이 유다 왕국의 국가 체계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 국제적 문화 교류
북왕국의 주요 유적에서는 페니키아 양식의 상아 장식품, 시리아의 비트-힐라니(bīt-ḫilāni) 건축, 정교한 아슐라르(ashlar) 석조 공법 등 다양한 문화적 영향이 확인된다. 이러한 증거들은 북왕국이 폐쇄적 국가가 아니라, 고대 근동의 국제 네트워크 속에서 활발히 교류하며 발전한 개방적 왕국이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고고학적 자료들은 철기시대 IIB기의 북왕국과 남왕국이 서로 다른 발전 궤도를 걸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북왕국은 국제 교류를 통해 빠르게 성장했으며, 유다는 이를 점진적으로 수용하며 후발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다.
(2) 히브리어 및 아람어 비문
비문은 당대 사람들이 직접 남긴 일차적 기록이라는 점에서,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 역사 증거로 평가된다. 철기시대 IIB기에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여러 비문이 발견되어, 성서의 기록을 보완하거나 때로는 수정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 히브리어 비문
① 사마리아 오스트라카
기원전 8세기 초로 추정되는 이 도자기 조각들은 왕실로 보내진 기름과 포도주의 행정 기록으로 오랫동안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H. M. 니만은 이 자료를 단순한 세금 납부 기록이 아닌, 정치적 충성 확보의 수단으로 재해석하였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사마리아 왕은 주변 지역의 유력 씨족 엘리트들을 일시적으로 수도에 머물게 하며, 그들의 본거지에서 수도로 보내진 물품에 대한 영수증 형태의 오스트라카를 발급했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북왕국 내에서 중앙 권력과 지방 세력 간의 복잡한 정치·행정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된다.
② 쿤틸렛 아즈루드 비문 (Kuntillet ‘Ajrud Inscription)
종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 비문에는 “사마리아의 야훼와 그의 아세라(yhwh šmrn w’šrth)”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당시 야훼 신앙이 단일신 개념으로 정립되기 이전의 다원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고대 이스라엘 종교가 지역적 다양성과 혼합적 요소를 지녔음을 보여주는 핵심 자료이다. (자세한 논의는 아래의 '종교와 문화'편에서 다룸)
◼︎ 아람어 비문
① 텔 단 비문 (Tel Dan Inscription)
기원전 9세기 중반에 제작된 이 비문은 “다윗의 집(byt dwd)”이라는 구절을 포함하고 있어, 다윗 왕조의 실재를 입증하는 최초의 성서 외 증거로 평가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비문의 작성자를 아람 왕 하자엘로 보며, 그 내용이 “이스라엘 왕 여호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를 내가 죽였다”는 자신의 군사적 승리를 자찬하는 내용임을 지적한다. 이는 두 왕의 죽음을 예후의 반역으로 돌리는 성서의 서술(열왕기하 9장)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당대의 국제 관계와 전쟁 기록을 복원하는 데 매우 흥미로운 역사적 퍼즐을 제공한다.
② 멜카르트 비문(Melkart Inscription)과 자쿠르 비문(Zakkur Inscription)
이 두 비문은 아람 왕 바르하닷(벤하닷)과 하자엘의 활동을 언급하며, 북이스라엘과 아람, 그리고 주변국 간의 지정학적 긴장과 외교 관계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자쿠르 비문은 아람-다마스쿠스 왕국의 신앙과 군사 활동을 보여주는 대표적 자료로, 당시 이스라엘이 직면했던 북부 국경의 위기 상황을 반영한다.
요컨대, 히브리어와 아람어 비문은 철기시대 IIB기의 정치, 행정, 종교 현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1차 사료로서 성서 서술의 역사적 신빙성을 평가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다. 이 비문들은 북왕국이 단순한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정교한 행정 체계와 다층적 외교 관계를 가진 복합 국가였음을 보여준다.
(3) 주변국의 기록: 모압과 아시리아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립된 내적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항상 주변 강대국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전개되었다.
특히 당대 최강국이었던 아시리아 제국의 기록과 모압의 왕실 비문은 북왕국의 정치적 실체와 국제적 위상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사료로 기능한다.
◼︎ 메사 석비 (모압 석비, Mesha Stele)
모압 왕 메사가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이 비문(기원전 840년경)은, “이스라엘 왕 오므리가 오랫동안 모압을 억압했고, 그의 아들도 그 뒤를 이었다”라고 서술하며 이스라엘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쟁취한 과정을 상세히 전한다.
이 내용은 열왕기하 3장의 모압 반란 기사와 큰 틀에서는 일치하지만, 세부에서는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성경은 반란의 원인을 야훼의 심판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반면, 메사 석비는 모압의 민족적 자긍심과 종교적 정당성(모압의 신 ‘그모스’의 도움)을 강조한다. 또한, 비문 속의 ‘오므리’가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조 전체를 상징하는 시조적 명칭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된다.
◼︎ 아시리아의 기록
① 살만에세르 3세의 쿠르크 석비 (Kurkh Stele, 기원전 853년)
아시리아의 서진(西進)에 맞서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 국가들이 결성한 반 아시리아 동맹의 전투, 즉 카르카르 전투를 기록한 문헌이다. 이 비문에 따르면, 이스라엘 왕 아합은 무려 2,000대의 전차를 제공하며 동맹군의 핵심 전력으로 참여했다. 이는 아합을 단지 아람과의 국지전에 몰두한 왕으로 묘사한 성경의 서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 기록은 북왕국이 이미 9세기 초반에 상당한 군사력과 외교적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참고) 카르카르 전투(기원전 853년)는 신아시리아 왕 살만에세르 3세가 시리아 북서부 카르카르 지역에서 하닷에제르(아람 다마스쿠스 왕), 북이스라엘 왕 아합, 그리고 아람, 하맛, 기타 여러 국가의 11개국 연합군과 벌인 대규모 전투이다.
아시리아 원정군은 시리아와 레반트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려 하였고, 이에 맞서 주변 11개 왕국이 연합해 아시리아군에 대항했다. 연합군에는 아합이 2,000대의 전차와 10,000명의 병사를 동원해 참여했고, 이는 고대 기록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연합군 중 하나로 꼽힌다.
아시리아 기록에서는 샬만에세르 3세가 대승을 거두었고, 14,000명의 적을 죽였으며 오론테스강을 적군의 시체로 막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과장된 선전일 가능성이 높다.
이 전투는 아시리아의 서방 진출이 일시적으로 저지된 사건으로서, 주변 국가들이 잠시나마 협력해 강대국 아시리아에게 저항했음을 보여준다. 연합군 지도자들은 전투 후에도 왕위를 유지하고 정세가 계속 혼란스러웠다. 아합도 이후 전투에서 사망했는데, 이는 이 전투와 별개의 사건이다.
카르카르 전투는 성경 기록과 아시리아 비문(쿠르크 석비)에서 동시에 언급되며, 고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실존과 군사력을 확인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② 검은 오벨리스크 (Black Obelisk, 기원전 841년)
살만에세르 3세의 즉위 18년에 제작된 이 부조 석상에는 예후가 아시리아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비문 속 예후는 “오므리의 아들(dumu mḫu-um-ri-i)”로 불리는데, 이는 혈연 관계를 뜻하기보다는 “오므리 왕조의 후계자” 혹은 “이스라엘 지역의 통치자”라는 정치적 호칭으로 이해된다.
이 사건은 성경에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이는 성서 저자가 의도적으로 특정 사건을 신학적 목적에 따라 선택·배제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사례다.
③ 아다드-니라리 3세와 티글랏-필레세르 3세의 기록
아시리아 비문들은 이 시기 북왕국과 유다의 대외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요아스, 므나헴, 베가, 호세아, 그리고 유다의 여호아하스(아하스) 등이 잇따라 아시리아 왕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티글랏-필레세르 3세는 “베가를 폐위시키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웠다”고 명시하는데, 이는 “호세아가 반역하여 그를 쳐서 죽이고 대신 왕이 되었다”(열왕기하 15:30)는 성경 구절과 거의 동일한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므나헴이 티글랏-필레세르에게 바친 1,000달란트의 은 조공은 성경(열왕기하 15:20)에 기록된 “1인당 50세겔씩 거둠”과 일치한다. 이는 약 60,000명의 ‘유력자 계층’이 존재했음을 시사하지만, 과장된 수치라 하더라도 당시 조공의 막대한 규모와 정치적 종속 관계를 가늠케 한다.
④ 사마리아 함락 (기원전 722년경)
북왕국의 멸망을 둘러싸고 두 명의 아시리아 왕이 서로 다른 주장을 남겼다.
바빌로니아 연대기는 살만에세르 5세가 사마리아를 정복했다고 기록하는 반면, 그의 후계자 사르곤 2세는 자신의 연감에서 “사마리아를 함락시키고 주민 27,290명을 추방했다”고 주장한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 살만에세르가 시작한 포위를 사르곤이 마무리했거나,
- 베킹(B. Becking)이 제안하듯 기원전 723년과 720년 두 차례의 정복이 있었을 가능성 등 여러 해석을 제시한다.
이 논쟁은 북왕국 멸망의 정확한 시기와 성격을 규명하는 데 있어 여전히 핵심 쟁점으로 남아 있다.
(4) 성경 본문 (열왕기상 16장 – 열왕기하 17장)에 대한 비판적 검토
철기시대 IIB의 역사를 다루는 핵심 문헌인 열왕기상 16장–열왕기하 17장은 단순한 연대기적 역사서가 아니라,
신학적 관점과 사상적 목적을 지닌 편찬 문헌이다.
① 신명기적 역사관
이 본문은 모든 왕들의 통치를 ‘야훼의 율법 준수 여부’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평가한다.
성공은 ‘의로움’의 결과로, 실패는 ‘악행’과 ‘우상 숭배’의 대가로 설명된다.
이러한 해석 틀은 단순한 신앙적 해석을 넘어, 역사적 사실의 선택과 배열, 서술 방식 전반을 규정한 신학적 프레임이었다.
② 자료의 이질성과 편집 과정
열왕기 본문은 성격이 상이한 두 가지 자료층을 결합하고 있다.
하나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 전설적·서사적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각 왕의 즉위, 통치 기간, 주요 사건을 간략히 요약하는 연대기적 기록이다.
후자의 경우 “유다 왕 역대지략” 혹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과 같은 지금은 소실된 공식 연대 자료를 바탕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역사 연구자는 이 두 자료의 성격과 목적을 구분하여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요컨대, 고고학, 비문, 주변국의 기록, 그리고 성경 본문은 각기 다른 시각에서 이스라엘 북왕국의 흥망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재구성: 북이스라엘 왕국의 흥망
앞서 검토한 고고학, 비문, 그리고 주변국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철기시대 IIB 동안 북왕국은 급속한 성장과 번영, 그리고 외세의 압력 속에서의 몰락이라는 역동적 정치 변동의 궤적을 그렸다.
(1) 오므리 왕조의 부상과 번영 (기원전 약 885–841년)
오므리의 재평가
성경에서 오므리는 몇 구절로 간략히 그것도 부정적으로 묘사되지만, 성경 외 사료들은 그를 북왕국의 실질적 창건자로 기록한다. 그는 내전을 종식시키고 왕위에 올라 새 수도 사마리아를 건설했으며 이를 통해 안정된 중앙 행정 체계를 확립했다.
메사 석비는 오므리가 모압을 정복했다고 증언하고, 아시리아 기록은 이후 150년 이상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Bit Ḫumri)”이라 불렀다. 이는 오므리가 남긴 정치적·외교적 유산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아합의 지정학적 위상
성경은 아합을 바알 숭배를 도입한 ‘악한 왕’으로 묘사하지만, 아시리아의 쿠르크 석비는 그를 2,000대의 전차를 보유한 강력한 군사 지도자로 그린다. 기원전 853년 카르카르 전투에서 아합은 아람과 페니키아 등 여러 국가로 구성된 반(反)아시리아 동맹의 핵심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과의 결혼은 종교적 타락이 아니라 경제·해상력과 군사력을 결합하려는 전략적 외교 결단이었다.
아합과 아람의 전쟁 기록에 대한 재검토
열왕기상 20장과 22장은 아합이 아람과 전쟁을 치렀다고 전하지만, 카르카르 전투에서 아합이 아람과 동맹 관계였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그 기록의 역사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J. M. 밀러 등은 이 전쟁 서사가 실제로는 후대 예후 왕조 시기의 사건이 아합 시대에 잘못 전이된 편집 결과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2) 예후의 쿠데타와 아람의 지배기 (기원전 약 841–800년)
쿠데타의 국제적 배경
예후의 쿠데타(열왕기하 9–10장)는 단순한 내란이 아니라 국제 질서의 전환점이었다.
검은 오벨리스크는 예후가 왕위에 오른 직후 아시리아 왕 살만에세르 3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를 바탕으로 M. 아스투르는 예후가 반 아시리아 정책을 고수하던 오므리 왕조를 전복하고 친 아시리아 정권을 수립한 것으로 해석한다. 한편, 텔 단 비문은 아람의 왕 하자엘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을 모두 죽였다”고 주장하여, 쿠데타의 배후에 아람의 개입 가능성을 암시한다.
아람-다마스쿠스의 팽창과 이스라엘의 쇠퇴
예후가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친 직후, 아시리아는 내정 문제로 수십 년간 서방 원정을 중단한다.
그 공백을 틈타 아람-다마스쿠스의 하자엘과 그의 아들 벤하닷이 세력을 확장하며 이스라엘의 영토를 잠식했다.
열왕기하 13:7은 이 시기 이스라엘이 “타작마당의 티끌같이 되었더라”라고 표현하며 국가적 붕괴에 가까운 약화를 전한다. 이후 “이스라엘을 구원한 자”(열왕기하 13:5)는 9세기 말 서방 원정을 재개해 아람을 공격한 아시리아 왕 아다드-니라리 3세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3) 재부흥과 멸망으로의 길 (기원전 약 800–722년)
여로보암 2세의 번영기
8세기 초, 여로보암 2세 통치 아래 이스라엘은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는 여로보암의 능력만이 아니라, 아시리아가 아람-다마스쿠스를 붕괴시킨 국제적 권력 재편의 결과였다.
즉, 지정학적 환경의 변화가 이스라엘의 부흥을 가능케 한 것이다.
불안정한 왕조 교체와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여로보암 2세 사후, 왕위는 살룸–므나헴–브가히야–베가–호세아로 빠르게 교체되며 내란과 정변이 반복되었다.
므나헴은 아시리아의 티글랏-필레세르 3세에게 막대한 조공을 바쳐 왕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베가는 아람의 르신(Retzin) 왕과 동맹을 맺어 반 아시리아 노선을 택하고, 친 아시리아 정책을 펴던 유다를 침공했다. 이 사건이 바로 이른바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다.
북왕국의 멸망
유다 왕 아하스가 아시리아에 원군을 요청하자, 티글랏-필레세르 3세는 대규모 서방 원정을 단행해 다마스쿠스를 함락시키고 이스라엘의 북부 지역(갈릴리, 길르앗 등)을 직접 통치하에 두었다. 이후 베가를 폐위시키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호세아가 다시 이집트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아시리아는 사마리아를 포위했다. 약 3년간의 포위 끝에 사마리아는 함락되었고(기원전 722/721년), 북왕국은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아시리아 기록과 성경은 모두 강제 이주 정책을 언급하지만, 고고학적으로 사마리아에서 광범위한 파괴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아하론 제르탈은 실제 추방된 인구가 전체의 10% 이하였으며, 주로 지배 엘리트 계층이 대상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따라서 성경의 기술은 신학적 충격과 민족적 상실의 체험을 반영한 서사적 과장일 수 있다.
철기시대 IIB시대의 이스라엘의 '종교와 문화'
이 시기의 정치적 격변과 사회적 변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신앙과 종교적 세계관 속에서 살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후대에 편집된 성경은 야훼 일신론의 관점에서 과거를 재단하지만, 고고학과 비문 자료는 훨씬 더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종교 현실을 보여준다. 이는 단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 사람들의 세계 인식과 정체성의 근본 구조를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이며, 후대 유대교 신학으로 발전할 종교적 흐름의 원형적 토대를 탐색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1) 야훼 신앙과 다신교적 현실
철기시대의 이스라엘 종교는 배타적 일신론(monotheism)과는 거리가 멀었다.
야훼가 국가의 주신으로 숭배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함께 다른 신들이 공공연히 인정되고 병존하는 다신교적 환경이 일반적이었다.
야훼와 그의 아세라
8세기의 쿤틸렛 아즈루드(Kuntillet ‘Ajrud)와 7세기의 키르벳 엘콤(Khirbet el-Qom) 비문에는
“사마리아의 야훼와 그의 아세라 (yhwh šmrn wlʾšrth)”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ʾmr ʾšyw hm[l]k ʾmr lyhlyw wlywʿšh wl [ ... ] brkt ʾtkm lyhwh šmrn wlʾšrth
- "Says ʾAšiyaw the king: Say to Yahēliyaw, and to Yawʾāsah, and to blessed are you all to Yahweh of Samaria and to his Asherah".
- "아시야우 왕이 말한다: 야헬리아우와 야우아사에게, 그리고 너희 모두에게 사마리아의 야훼와 그의 아세라를 통해 축복이 있기를 말하라."
- Jehoash (Hebrew: יְהוֹאָשׁ Yəhō’āš or יוֹאָשׁ Yō’āš; Israelian Hebrew: ’Āšīyāw; Akkadian: Yaʾsu [ia-'-su]; Latin: Ioas; fl. c. 790 BC) - 아시야우(Ašiyaw): (요아스) 북이스라엘의 열두 번째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왕하 14:1)
이는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야훼를 남성 신으로, 아세라를 그의 배우자인 여성 신으로 인식하며 함께 숭배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다. 초기에는 ‘아세라’가 여신 자체를 뜻하는지, 혹은 단순히 제의용 나무 기둥을 가리키는지 논란이 있었으나,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야훼가 배우자 여신을 동반한 형태로 숭배되었다는 해석에 동의한다.
참고) 쿤틸렛 아즈루드(Kuntillet ‘Ajrud) 비문은 기원전 8세기 시내 반도 사막지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자료로, 특히 “야웨와 그의 아세라”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어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다신교성과 복합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이 비문은 사마리아와 데만의 야웨를 언급하며, 야웨가 단일신이기 이전에 여신 아세라를 부인이나 동반자로 여겼음을 시사한다. 큰 항아리와 건물 벽에서 발견된 이 비문 및 그림은 야웨와 아세라라는 두 신격이 함께 숭배되었을 가능성을 증명한다.
키르벳 엘콤(Khirbet el-Qom) 비문은 기원전 7세기 유다 왕국 지역에서 출토된 무덤 비문으로, 이 역시 “야훼와 아세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비문은 쿤틸렛 아즈루드 비문보다 약 1세기 후의 것으로, 유다 왕국 내에서도 여전히 아세라를 야훼의 동반자 또는 관련 신격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이 두 비문은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 지역의 신앙이 초기의 엄격한 유일신 신앙이 아닌 다양한 신격들이 공존하고 있었던 복합적 종교상을 반영한다.
신들의 공존
열왕기상 15:13은 아사 왕의 어머니가 아세라를 위한 목상을 만들었다고 비판하며, 열왕기하 21:7은 므낫세 왕이 성전 안에 아세라 상을 세웠다고 전한다. 또한 사마리아 오스트라카(도편)나 인명(예: 에스바알, 므립바알)에 등장하는 ‘바알(Ba‘al)’ 요소는, 야훼와 바알이 단순한 적대 관계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공존하는 신앙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신적 위계와 야훼의 위치
초기 이스라엘 신학에서는 엘(El)이 최고신으로 신의 세계를 다스리고, 야훼는 그 아들들 가운데 하나로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몫으로 받은 신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쿰란 사본의 신명기 32:8–9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과 시편 89편에서 야훼가 “신의 아들들 가운데” 서 있는 표현(6절)은 이러한 초기 다신적 신학의 흔적을 간직한 사례로 이해된다.
(2) 공식 제의와 민간 신앙
철기시대의 종교 활동은 크게 국가 제의와 민간 신앙으로 나뉜다.
이 둘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았으며, 종종 상호 침투하며 공존했다.
국가 제의
왕정 시대의 왕은 단순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국가의 최고 제사장이었다.
그는 성전을 건축하고, 국가 제의를 주관하며, 왕국의 안녕과 풍요를 위해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중앙 성전은 왕권의 신적 정당성을 시각화한 상징적 공간이었다.
즉, 종교는 단순한 신앙의 영역이 아니라 국가 이데올로기의 중심축이었다.
민간·가족 신앙
일반 백성의 종교생활은 훨씬 실용적이고 가족 중심적이었다.
각 가정은 조상의 영혼을 신적 존재로 여기고, 음식 제물을 바치며 도움을 구하는 조상 숭배 전통을 유지했다.
성경이 금지한 신접술(사무엘상 28장)도 이러한 조상 숭배의 연장선에서, 죽은 자의 영혼과의 교통을 시도한 행위로 이해된다. 가정마다 ‘테라핌’이라 불리는 작은 신상을 두었으며, 이는 가문의 수호신 또는 가정 제단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몰렉에게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극단적 제의도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민간 신앙은 성경의 금지 조항에도 불구하고 일상 속에서 끈질기게 지속된 신앙의 현실을 보여준다.
(3) 일신론으로의 발전 과정
철기시대 IIB는 아직 배타적 일신론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였다.
“오직 야훼만이 신이다”라는 신학은 북왕국 멸망(기원전 722년) 이후, 기원전 7–6세기에 걸쳐 유다의 일부 종교 엘리트 집단을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고고학은 이러한 변화를 유물의 변화로도 보여준다.
기원전 8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 사이, 유다 지역 인장(seal)과 토기 장식에서 자주 등장하던 태양·달 등 천체 상징이 급격히 사라진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기원전 7세기 후반)과 연관 지어, 야훼 외의 신적 존재를 배격하려는 일신론적 경향의 강화로 해석한다.
결국 철기시대 IIB의 종교는 성경이 전하는 것보다 훨씬 다층적이고 유동적인 신앙 체계였다.
야훼 신앙은 다신적 환경 속에서 점진적으로 분화하며, 역사적 위기와 정치적 변동을 거치며 유일신 사상으로 수렴해 갔다.
성경 서술과 역사적 실체 사이의 종합적 평가
지금까지 철기시대 IIB(기원전 900–720년) 이스라엘 북왕국의 역사를 성경 본문, 고고학적 증거, 그리고 주변국의 비문 자료라는 세 축을 통해 다각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경만으로는 북왕국의 복잡한 역사적 실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으며, 비판적 자료 통합과 교차 검증이 필수적임을 확인했다. 성경은 신학적 진실을 담은 신앙 문헌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연대기는 아니었다.
(1) 역사적 일치: 신뢰 가능한 핵심 서사
성경의 기록 가운데 상당수의 주요 사건과 인물은 성경 외 사료를 통해 교차 검증된다.
오므리, 아합, 예후, 므나헴, 호세아 등 북왕국의 주요 왕들이 실존 인물이었다는 점, 모압 왕 메사의 반란, 므나헴과 아하스의 아시리아 조공, 그리고 사마리아의 함락과 북왕국의 멸망 등 역사의 큰 줄기는 성경과 외부 기록이 놀라울 만큼 일치한다. 이는 성경 저자들이 단순한 신앙 전승자에 머물지 않고, 실제 역사 자료(왕실 연대기나 행정 문서 등)에 접근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다.
(2) 불일치와 왜곡: 신학적 목적에 따른 편집
그러나 성경의 서술 중 일부는 외부 기록과 명백히 상충한다.
성경은 아합을 군사적으로 무능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왕으로 묘사하지만, 아시리아의 쿠르크 석비는 그를 2,000대의 전차를 보유한 국제 동맹의 핵심 지도자로 기록한다. 또한 성경이 아합 시대의 아람 왕을 ‘벤하닷’으로 지칭한 것은 명백한 시대 착오로, 후대의 사건이 아합 시대로 잘못 전이된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불일치는 성경 저자가 신학적 메시지(예: 우상숭배의 심판)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재구성하거나 단순화했음을 보여준다.
(3) 의도적 침묵: 신학적 관점이 만든 공백
성경은 북왕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핵심 사건들에 대해 눈에 띄는 침묵을 보인다.
예를 들어, 아합이 카르카르 전투에서 아시리아의 서진을 저지한 근동사적 대사건은 성경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후가 쿠데타 직후 살만에세르 3세에게 조공을 바친 굴욕적인 장면 역시 빠져 있다. 이러한 누락은 단순한 편집상의 실수가 아니라, 야훼 신앙이라는 신학적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을 배제한 결과로 이해된다. 성경 저자들은 신앙적 해석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외교적 맥락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삭제했던 것이다.
(4) 종합: 신앙의 서사와 역사의 실체
철기시대 IIB의 북이스라엘은 성경의 신학적 틀 속에서 그려진 ‘배교와 심판의 왕국’이 아니라, 당대 근동의 복잡한 권력 질서 속에서 활약한 현실적 정치체였다. 그들은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지역 강국이었으며, 아람·페니키아·아시리아 등 주변 세력과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생존 전략을 모색했다.
결국, 성경의 이스라엘은 신학적 진실을 말하고, 역사의 이스라엘은 정치적 현실을 드러낸다. 두 세계를 병행해 읽을 때, 우리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단지 초월적 계시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의 풍랑 속에서 형성된 인간적 응답의 기록임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통합적 시각이야말로, 성경의 신학적 깊이와 고고학적 현실을 함께 꿰뚫는 진정한 ‘역사적 신학’의 출발점이라 할 것이다.
참고서적
1. ⟪Ancient Israel: What Do We Know and How Do We Know It?⟫ Lester L. Grabbe, 2017, T&t Clark Ltd.
2. ⟪고대 이스라엘 역사⟫ J. 맥스웰 밀러 & 존 H. 헤이스, 박문재 역, 1996, 크리스챤다이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