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다 왕국 후기의 역사와 고고학
유다 왕국 후기(기원전 720-539년)의 역사와 고고학
요약
제5장은 철기 시대 IIC(기원전 720-539년) 기간, 특히 북이스라엘 왕국 멸망 이후 유다 왕국의 역사에 대한 심층 분석을 제공한다. 이 시기는 아시리아의 산헤립 침공(기원전 701년)과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침공이라는 두 가지 결정적 사건을 축으로 전개된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산헤립의 침공은 예루살렘과 일부 북부 지역을 제외한 유다의 거의 모든 정착지를 파괴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7세기에 들어서면서, 특히 므낫세 통치 기간에 유다는 상당한 회복과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이는 성서가 므낫세를 극악한 왕으로 묘사하는 것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이 시기 예루살렘은 다른 도시들이 파괴된 후 유다의 유일한 중심 도시로 부상했으며, 인구가 급증하고 도시가 확장되었다.
lmlk(왕에게 속한, למלך, lammelekh) 인장과 후대의 장미 문양 인장은 이 시기의 행정 및 연대 측정에 중요한 고고학적 지표이다. 특히 7세기에는 인장, 오스트라콘(도편), 명문이 새겨진 저울추 등 문자 기록물이 급증했는데, 이는 관료제가 발달했음을 시사한다.
성서 기록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비문 등 외부 자료와 비교 검토되었다. 산헤립의 침공, 므낫세의 존재, 여호야긴의 바빌론 유배 등 여러 사건은 외부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요시야의 대대적인 영토 확장과 종교 개혁은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며, 성서의 묘사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므낫세의 바빌론 유배와 회개 이야기(역대기)나 요시야의 전사(역대기)와 같은 일부 기록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신학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의 유다 역사는 성서 기록만으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으며, 고고학, 비문 등 다양한 외부 자료와의 교차 검증을 통해 보다 복합적이고 미묘한 그림을 그려야 한다. 특히 므낫세 시대의 경제적 회복과 요시야 시대의 제한된 영향력은 기존의 성서 중심적 이해에 중요한 수정을 요구한다.
격변의 시대, 유다 왕국의 흥망성쇠
이번 글은 기원전 720년 북이스라엘의 멸망부터 기원전 539년 바빌로니아 유배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유다 왕국 후기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 시기의 유다는 앗시리아, 이집트, 신바빌로니아 등 근동의 강대국들이 패권을 다투던 지정학적 격변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외세의 침입과 정치적 종속, 그리고 내부의 종교 개혁과 사회적 변동이 맞물리며, 유다는 독립과 종속, 번영과 파괴를 오가는 극적인 역사적 궤적을 경험했다.
이 글은 그러한 유다의 역사를 단일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다층적 접근법을 통해 조명하고자 한다.
첫째, 유다 전역의 고고학적 증거(파괴층, 인장(bulla), 도기 양식 등)를 분석하여 당시 사회 구조와 물질문화의 변화를 추적한다.
둘째,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연대기 및 비문 기록을 통해 주변 제국의 시선에서 본 유다의 외교적 위상과 정치적 대응을 살핀다.
셋째, 열왕기·역대기·예레미야서 등 성경 본문을 신학적 서사가 아닌 역사적 단서를 내포한 문헌 자료로서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 세 가지 축(고고학, 성경 외 문헌, 그리고 성경 서사)을 통합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유다 왕국 후기의 역사를 신앙과 정치, 그리고 문명 교차의 시대로서 입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 분석의 토대: 주요 역사 자료 검토
(1) 고고학적 증거
유다 왕국 후기의 고고학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연대기적 기준점은 앗시리아의 산헤립과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이 남긴 두 차례의 대규모 파괴층이다. 이 두 사건은 각각 기원전 701년과 기원전 586년이라는 역사적으로 확정된 연대에 해당하며, 고고학적 층위를 구분하는 확고한 기준점을 제공한다. 특히 라기스 유적의 Ⅲ층(산헤립 파괴층)과 Ⅱ층(느부갓네살 파괴층)은 유다 전역의 다른 발굴지 연대를 결정하는 핵심 참조 지층으로 기능한다.
▪︎ 인장 — 시대를 구분하는 유물 지표
이 시기의 유적을 식별하는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단서 중 하나는 저장용 항아리에 찍힌 인장(bulla)이다.
- lmlk 인장 (“왕에게 속한”, למלך, lammelekh)
기원전 8세기 말, 히스기야 왕의 통치기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lmlk” 문구가 새겨진 항아리들은 산헤립의 침공에 대비한 중앙집권적 물자 관리 체계의 실증적 증거로 해석된다.
- 장미(Rosette) 문양 인장
주로 기원전 7세기에 등장하며, lmlk 인장과 함께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두 인장은 서로 다른 시기를 구분하는 고고학적 지표로 활용된다.
▪︎ 인장의 연대 논쟁
두 인장의 사용 시점을 둘러싼 논의는 단순한 연대 문제를 넘어, 유다 왕국의 행정체계와 사회 변동을 해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 전통적 견해: 우시시킨 등은 lmlk 인장은 산헤립 침공 이전(8세기 말)에 집중되고, 장미 인장은 7세기 후반–6세기 초에 사용된 것으로 본다.
- 립슈츠 학파: lmlk 인장의 사용이 7세기 전반까지 지속되었다고 주장한다.
- 핑켈슈타인: 장미 인장의 등장을 므낫세 시대(7세기 초)로 앞당길 수 있다고 제안한다.
- 나아만: 기원전 701년 이후 개인 인장의 급격한 사용 중단에 주목하며, 이를 사회 불안정과 정치 체계의 재편으로 해석한다.
▪︎ 주요 고고학적 쟁점
- 예루살렘의 팽창과 ‘넓은 벽’
기원전 8세기 말에서 7세기에 걸쳐 예루살렘은 서쪽 언덕으로 확장되었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대규모 성벽인 ‘넓은 벽(The Broad Wall)’이 건설되었다. 이는 북이스라엘 멸망 이후 난민 유입으로 인한 인구 급증을 반영한다.
- 실로암 터널의 연대
전통적으로 히스기야 왕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 일부 연구에서는 므낫세 시대에 건설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 라맛 라헬(Ramat Raḥel)의 성격 재해석
예루살렘 남쪽의 이 유적은 과거 유다 왕실의 별궁 혹은 왕실 거점으로 이해되었으나, 최근 연구는 이를 앗시리아 행정 중심지로 해석하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고고학적 자료는 성경이 전하지 않는 정치·행정·사회 구조의 실증적 단면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 증거는 언제나 연대 설정과 해석의 문제를 수반하므로, 문헌 자료와의 긴밀한 비교 분석을 통해 그 의미를 신중하게 재구성해야 한다.
(2) 성경 외 문헌: 주변국의 시선으로 본 유다
유다 왕국의 역사는 자국의 기록만으로는 온전히 복원될 수 없다. 주변 강대국들이 남긴 비문과 연대기 자료는 성경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고 보완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기능한다. 이들 외부 기록은 유다를 국제정치의 맥락 속에서 조명하며, 당시의 지정학적 현실을 보여준다.
▪︎ 앗시리아 자료
앗시리아 제국의 왕들은 정복 활동을 세밀히 기록으로 남겼다.
그중 산헤립의 비문은 예루살렘을 포위한 사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는 히스기야를 예루살렘에 새장 속의 새처럼 가두었다.”
이 기록은 기원전 701년 침공의 실체를 보여주며, 산헤립의 니네베 궁전 부조에는 그가 라기스를 정복하는 장면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후 에살핫돈과 아슈르바니팔의 비문에는 유다 왕 므낫세가 앗시리아 제국에 조공을 바치며 충실한 봉신으로 복무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러한 외부 증거는 성경이 거의 언급하지 않은 므낫세의 국제정치적 현실 즉, 그가 제국 체제 안에서 생존 전략을 모색했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 바빌로니아 자료
신바빌로니아 연대기는 유다의 멸망 과정을 객관적이고 연대기적인 형태로 기록한 핵심 자료이다.
여기에는 갈그미스 전투(기원전 605년), 느부갓네살의 1차 예루살렘 함락(597년), 그리고 유다 왕 여호야긴의 포로 사건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특히 바빌론에서 발견된 여호야긴 배급표(Ration Lists)는 유배된 유다 왕과 그의 가족이 바빌론 궁정에서 정기적인 식량과 은을 지급받았음을 보여주는 극히 구체적이고 희귀한 사료다. 이는 성경의 “여호야긴이 바빌로니아 왕 앞에서 그 평생 동안 대우를 받았다”(왕하 25:29)는 기록을 문헌적으로 입증하는 생생한 증거로 평가된다.
▪︎ 기타 현지 비문 자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발견된 여러 비문들은 유다 말기의 사회·행정·군사 체계와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단서들이다. (주, 오스라콘 = 고대에 쓴 글이나 기록이 새겨진 도자기나 돌 조각)
메사드 하샤비야후 오스트라콘: 수확기 노동자가 옷을 부당하게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원서로, 고대 근동에서 드물게 발견된 민간인의 법적 청원 기록이다. 또한 문체와 어휘를 통해 당시 유다 국경 지대에 그리스계 용병(‘깃딤’)이 주둔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아라드 오스트라콘: 국경 요새 사령관에게 보낸 군수품 요청서로, “깃딤(Kittim)”으로 불리는 외국인 용병 부대에 대한 보급 지시와 행정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유다 말기 국방 체계의 관료적 조직화 수준을 보여준다.
라기스 서신: 바빌로니아 침공 직전, 유다의 요새 간에 오간 군사 통신문으로, 예루살렘 함락 직전의 긴박한 정세를 생생히 전한다. “이제 우리는 라기스의 봉화는 보지만, 아세가의 신호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구절은 전선이 붕괴되는 순간의 절망과 불안을 담은 문장으로, 성경 외 자료 중 가장 비극적이고 인간적인 목소리로 평가된다.
이처럼 주변국의 기록과 현지 비문들은 성경의 서술을 보완하고, 때로는 수정하게 만드는 역사적 보정 렌즈로 작용한다. 그 결과, 유다의 마지막 세기는 신학적 비극을 넘어, 제국 정치의 압력 속에서 흔들린 한 국가의 생존사로 새롭게 드러난다.
(3) 성경 기록: 신학적 서사 속의 역사적 단서
유다 왕국 후기의 역사를 다루는 핵심 내부 자료는 『열왕기하』와 『역대하』이다.
두 기록은 동일한 사건을 다루면서도 상당히 다른 서술과 신학적 해석을 제시한다.
이 차이는 단순한 편집상의 문제가 아니라, 각 저자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신학적 목적이 반영된 결과다.
따라서 두 본문을 비교·대조 분석하면, 그 이면에 담긴 역사적 사실과 신학적 의도를 구분해 낼 수 있다.
▪︎ 므낫세의 통치
열왕기하: 므낫세를 유다 왕 중 최악의 우상 숭배자로 단죄하며, 그의 죄악 때문에 유다가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회개나 개혁의 언급은 전혀 없다.
역대하: 바빌론으로 끌려가 고난을 겪은 후,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고 전한다.
→ 두 기록의 대조는 “멸망의 원인”을 강조하려는 신명기적 역사관(왕하)과, “회개와 회복 가능성”을 보여주려는 후기 편집자의 신학적 관심(대하)이 어떻게 다른지를 잘 드러낸다.
▪︎ 요시야의 죽음
열왕기하: 요시야가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를 므깃도에서 맞이하러 갔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짧게 기록한다. 전투 장면은 암시되지 않는다.
역대하: 요시야가 느고의 군대를 상대로 므깃도에서 실제 전투를 벌이다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고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 『역대하』는 『열왕기하』보다 훨씬 서사적이고 세부적인 역사 기술을 보이며, 요시야의 죽음을 비극적 순교의 서사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담고 있다.
▪︎ 여호야김의 최후
열왕기하: 여호야김이 자연사하여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잠들었다”고 전한다.
역대하: 느부갓네살이 그를 쇠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고 기록한다.
→ 두 기록의 불일치는 여호야김의 최후가 정치적 굴욕과 강제 연행이었는지, 혹은 단순한 사망이었는지를 두고 후대 전승이 다르게 발전했음을 시사한다.
▪︎ 예레미야서: 동시대 증언으로서의 가치
예레미야서는 이 시대를 직접 살았던 선지자의 기록으로, 단순한 역사 서술을 넘어 당대 사건의 1차적 증언을 담고 있다. 그가 언급한 갈그미스 전투(렘 46:2), 라기스와 아세가의 공성전(렘 34:7) 등은 성경 외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사실로 확인된다.
이는 예레미야서가 신학적 해석을 넘어, 역사적 사료로서도 매우 높은 신뢰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열왕기하』, 『역대하』, 그리고 『예레미야서』는 각기 다른 시기와 관점에서 유다의 역사를 서술한 텍스트이지만, 이들을 상호 비교하면 신학적 의미와 역사적 사실의 경계가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2. 히스기야 시대 (c. 715–686 BCE): 반란, 파괴, 그리고 구원
히스기야의 통치기는 유다 왕국의 운명을 갈랐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그는 앗시리아의 패권에 저항하며 독립을 시도했지만, 그 결과로 기원전 701년 산헤립의 대대적인 침공을 불러왔다. 이 침공은 유다 전역에 전례 없는 파괴를 초래했으나, 수도 예루살렘이 기적적으로 함락을 면함으로써 히스기야는 재앙 속의 ‘구원자’로 기억되었다.
이 시기는 반란과 멸망, 심판과 구원의 서사가 교차하는 복합적이고 상징적인 시대였다.
(1) 산헤립의 침공과 고고학적 증거
산헤립의 원정은 유다 왕국에 재앙적인 결과를 남겼다.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기원전 8세기 말 존재했던 354개의 유다 정착지 중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7세기에 재건된 곳은 39개에 불과했다. 특히 라기스의 함락은 앗시리아에게 군사적·정치적 상징성이 컸다.
그 장면은 산헤립의 니네베 궁전 부조에 세밀히 새겨져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히스기야의 행정적 준비와 방어 체계는 ‘lmlk’(“왕에게 속한”) 인장이 찍힌 저장 항아리들의 분포를 통해 확인된다.
이 항아리들은 유다 산지와 쉐펠라 지역의 주요 요새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며, 이는 중앙 정부가 세금 형태로 거둔 식량과 물자를 군사 요충지에 체계적으로 비축했음을 시사한다. 즉, 히스기야는 단순한 종교 개혁가가 아니라, 아시리아 제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의 군사·행정 개혁을 단행한 통치자였음을 보여준다.
(2) 예루살렘 공성전 논쟁
산헤립의 비문은 히스기야를 “새장 속의 새처럼 예루살렘에 가두었다”고 기록하지만, 예루살렘을 실제로 함락시켰다는 언급은 없다. 이 표현을 두고 학계는 ‘공성전이 실제로 있었는가’를 놓고 논쟁을 이어왔다.
일부 학자들은 이 문구가 예루살렘의 교통로와 주변 농경지를 차단하여 고립시켰음을 의미할 뿐, 전통적인 의미의 공성전이 벌어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해석은 고고학적 증거와도 일치한다.
라기스 등지에서는 앗시리아 공성전의 흔적(흙더미 램프, 투석기 돌, 화재층 등)이 뚜렷하지만, 예루살렘에서는 직접적인 전투나 파괴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근접한 증거는 예루살렘 남서쪽 약 4km 떨어진 라맛 라헬의 파괴층(Level VB)이다. 이곳에서는 lmlk 인장이 찍힌 항아리 손잡이 170점 이상이 한꺼번에 출토되었으며, 이 파괴층이 바로 기원전 701년 앗시리아 침공과 연관된 고고학적 증거로 평가된다.
(3) 성경 기록의 비판적 검토
『열왕기하』 18–19장의 산헤립 침공 기록은 학자들에 의해 세 개의 독립적 기사가 후대에 편집된 것으로 분석된다.
• 기사 A (18:13–16)
히스기야가 산헤립에게 항복하고 막대한 조공을 바쳤다는 간결하고 사실적인 보고이다.
이는 앗시리아 비문과 거의 일치하며, 세 기사 중 역사적 신뢰도가 가장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 기사 B1 (18:17–19:9a, 36–37)
앗시리아 장군 랍사게의 심리전 연설, 히스기야의 기도,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의 구원 예언이 포함된 신학적 서사 구조를 지닌다.
• 기사 B2 (19:9b–35)
B1과 유사하지만, “여호와의 사자가 앗시리아 군사 18만 5천 명을 멸망시켰다”(19:35)는 기적적 구원 이야기를 중심으로 재구성되어 있다.
B1과 B2는 신학적 의도와 후대 편집의 흔적이 강한 문헌, 반면 기사 A는 당대의 정치적 현실을 반영한 연대기적 기록으로 평가된다.
즉, 성경의 내러티브는 히스기야를 신앙의 영웅으로 그리지만, 역사적으로 그는 앗시리아에 일시적 굴복을 선택한 현실주의적 군주였던 셈이다.
산헤립의 침공은 유다의 물리적·경제적 기반을 파괴했으나, 예루살렘의 생존은 히스기야에게 종교적 정당성과 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컸다. 유다는 아들 므낫세의 시대에 이르러 앗시리아의 종속국으로 재편되며, 제국의 질서 속에서 생존을 도모하게 된다.
3. 므낫세 시대 (약 686–642 BCE): 순응과 경제적 재건
므낫세의 55년에 이르는 장기 통치는 유다 역사에서 가장 상반된 평가를 받는 시기다.
성경은 그를 “유다 역사상 최악의 우상 숭배자”로 규정하지만, 고고학과 성경 외 문헌은 그 시대를 전쟁의 폐허 위에서 이룩된 재건과 번영의 시기로 보여준다. 그는 아버지 히스기야처럼 제국에 맞서기보다, 철저한 순응 정책을 통해 왕국의 안정과 경제적 회복을 도모한 현실주의적 군주였다.
(1) 앗시리아의 충실한 봉신
므낫세는 앗시리아의 에살핫돈과 아슈르바니팔의 비문에 두 차례 등장한다.
그는 다른 속국 왕들과 함께 궁전 건축용 자재를 제공하고, 이집트 원정을 지원하는 병력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문헌들은 그를 앗시리아의 충성스러운 봉신으로 묘사하며, 유다가 제국 질서 안에서 안정적 종속 관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순응은 단순한 굴복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므낫세의 유다는 앗시리아 제국의 보호 아래 장기간의 평화를 누렸고, 그 결과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재건이 가능했다. 이는 북왕국 멸망과 히스기야의 반란 이후 유다의 체질이 재편된 시기였다고 평가된다.
(2) 고고학이 보여주는 번영의 징후
므낫세 시대의 유다는 눈에 띄는 회복과 경제적 활력을 보였다.
▪︎ 인구와 정착의 이동
산헤립의 침공 이후 앗시리아는 유다의 핵심 농업지대였던 쉐펠라 대부분을 행정적으로 분리하거나 직접 통제했다. 그 결과 유다의 인구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유다 산지와 네게브 변두리로 이동했고, 이 지역에 새로운 마을과 요새형 정착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인구 재배치는 유다 사회의 회복력을 보여주는 뚜렷한 징후다.
▪︎ 행정 체계와 문자의 확산
7세기 유다에서는 개인 인장, 오스트라콘(도기 문자 기록), 분동 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는 단순히 문서 행정이 발달했다는 의미를 넘어, 당시 경제 활동의 급성장과 국가 관료 체계의 정교화를 반영한다. 유다는 앗시리아가 장악한 아라비아 무역로의 중계 거점으로 기능하며 향료·금속·기름 무역을 통해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특히 블레셋의 엑그론에서 발견된 대규모 올리브유 생산시설은 유다 산지에서 재배된 올리브 공급에 크게 의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유다가 지방 농업과 제국 경제를 연결하는 상호의존적 구조 속에서 번영을 누렸음을 시사한다.
(3) 종교 정책과 ‘회개의 전승’
성경은 므낫세를 “성전을 더럽히고 온갖 우상을 세운 자”로 단죄한다(왕하 21:2–9).
그러나 학계에서는 그의 종교 정책을 단순한 배교로 보기 어렵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 맥케이와 코건은 므낫세가 앗시리아의 종교를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 히스기야의 개혁으로 억눌렸던 전통적 가나안·페니키아 신앙을 부활시켰다고 해석한다.
- 핑켈슈타인과 실버만은 히스기야의 급진적 개혁이 실패한 뒤, 농촌 사회가 다시 민간 신앙으로 회귀한 결과였다고 분석한다. 즉, 이는 외압이 아닌 내부 사회의 대중적 종교 감정의 복귀였다.
한편 『역대하』에만 등장하는 므낫세의 바빌로니아 유배와 회개 이야기(대하 33:10–17)는 그 역사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다. 『열왕기하』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므낫세의 죄로 인해 유다가 멸망했다”는 다른 본문과도 모순된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긴 통치가 신의 징벌 없이 가능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신학적 서사, 즉 후대 저자의 문학적 구성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므낫세의 시대는 결과적으로 저항의 종말과 재건의 시작이었다.
그의 순응 정책은 외견상 굴복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유다가 폐허에서 벗어나 경제·행정·사회적으로 안정된 체제를 구축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몬과 손자 요시야 시대에 접어들면, 앗시리아의 쇠퇴와 함께 국제 정세가 요동치며 유다는 다시 한번 자주와 개혁의 기로에 서게 된다.
4. 요시야 시대 (약 640–609 BCE): 종교 개혁과 지정학적 야망
요시야의 통치기는 앗시리아 제국이 급격히 쇠퇴하고 새로운 국제 질서가 형성되던 격변의 시기였다.
이 시기 유다는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독자적인 행보와 자주적 개혁을 시도했으며, 성경은 요시야를 다윗에 버금가는 위대한 개혁 군주로 묘사한다. 그의 통치는 대대적인 종교 개혁과 영토 확장 시도로 상징되지만, 이러한 서술은 고고학적·문헌학적 증거와 비교할 때 여러 논쟁점을 내포한다.
(1) ‘요시야 개혁’의 실상: 고고학과 문헌의 시각
『열왕기하』 22–23장은 요시야가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서를 계기로 전국적인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고 전한다.
그는 지방 산당과 이방 신전을 철폐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제사를 드리도록 중앙집권적 예배 체계를 확립했다.
그러나 이 ‘요시야 개혁’의 실제 규모와 성격을 둘러싸고 학계의 시각은 엇갈린다.
▪︎ 고고학적 증거의 한계
대규모 종교 개혁을 입증할 명확한 유적이나 파괴층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크리스토프 웰링어는 기원전 7세기 후반 유다 인장에서 아세라나 천체 상징이 사라지는 현상을 종교적 도상의 변화로 보고, 종교 분위기의 변화를 암시하는 간접적 증거로 해석했다.
▪︎ 아라드 신전 해체 논쟁
헤르조그와 우시시킨 등은 아라드 요새에서 발견된 야훼 신전의 해체 시점을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일부는 요시야의 개혁과 연관된 것으로, 다른 일부는 이후 시기의 정치적 재편으로 본다.
이는 곧 ‘개혁의 물리적 증거’ 해석이 단선적으로 규명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 문헌적 재구성의 관점
하르트마이어와 웰링어는 『열왕기하』의 장황한 개혁 서술 뒤에는 “예루살렘과 벧엘 중심의 제한된 개혁 조치 목록”이 역사적 핵심으로 존재했을 것이라 본다.
이후 신명기계 역사 편집자들이 이 핵심을 확대·신학화하여 전국적 개혁과 신앙의 갱신이라는 거대한 서사로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2) 영토 확장 논쟁
오랫동안 학계는 요시야가 앗시리아의 몰락을 틈타 북쪽 영토를 회복하고 ‘대이스라엘’을 재건하려 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이 전통적 견해에 도전하고 있다.
▪︎ 나다브 나아만의 반론
나아만은 요시야의 북진을 “과도한 역사적 재구성”이라 평가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앗시리아의 세력이 약화된 지역은 곧 이집트의 영향권으로 편입되었고, 따라서 요시야가 독자적 군사 확장을 감행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앗시리아의 후계 세력인 이집트의 봉신으로서 제한된 자치권만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 고고학적 증거의 재해석
요시야의 북방 확장을 뒷받침한다고 여겨졌던 므깃도나 메사드 하샤비야후 유적의 ‘유다식 유물’은 최근 연구에서 유다의 직접 통치보다는 이집트군 주둔 혹은 유다계 용병의 활동 흔적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들은 요시야의 영토 확장을 입증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3) 요시야의 죽음: 전사인가, 처형인가
요시야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유다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의 최후를 두고 『역대하』와 『열왕기하』는 상이한 서술을 제시한다.
▪︎ 역대하 35:20–27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이집트 파라오 느고(네코 2세)와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고 묘사한다.
이는 요시야를 신앙의 영웅이자 순교자로 부각하는 서사다.
▪︎ 열왕기하 23:28–30
“느고가 그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 죽였다”고만 간략히 기록하며 전투나 영웅적 맥락이 생략되어 있다.
나다브 나아만은 『열왕기하』의 기록이 더 역사적이라고 본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요시야는 당시 이집트의 봉신으로서 충성 서약을 위해 므깃도로 갔으나, 느고가 그를 불충을 의심해 처형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가설은 “열왕기하가 불명예스러운 사건을 의도적으로 축소했다”는 여러 학자들의 평가와도 일치한다. 따라서 『역대하』의 ‘전투 서사’는 요시야의 죽음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한 영웅적 재구성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요시야의 개혁과 죽음은 유다의 자주적 회복의 꿈이 좌절된 순간이었다.
그의 개혁은 후대 신명기계 역사가들에게 “참된 신앙 회복의 이상”으로 재해석되었지만, 현실의 유다는 그가 남긴 공백 속에서 급속히 외세의 지배와 내부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이후 유다는 바빌로니아의 부상 속에서 마지막 왕조의 몰락을 향해 빠르게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5. 유다 왕국의 마지막 날들 (609–586 BCE): 바빌로니아의 지배와 멸망
기원전 609년, 요시야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유다 왕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비극적 전환점이었다.
그의 사후, 유다는 신흥 강대국 신바빌로니아 제국과 쇠퇴하는 이집트 왕조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약 20여 년에 걸친 혼란과 권력 교체 끝에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 유다는 네 명의 왕이 잇따라 외세의 의도에 따라 교체되는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점차 국가의 주권과 정체성을 상실해 갔다.
(1)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의 줄타기
요시야 이후의 유다는 스스로의 의지로 왕을 세울 수 없는 외세 종속 체제에 놓였다.
1) 여호아하스
백성들에 의해 요시야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단 3개월 만에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에 의해 폐위되고 이집트로 끌려가 생을 마쳤다.
2) 여호야김
느고에 의해 왕위에 오른 그는 이집트의 봉신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기원전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빌로니아가 이집트를 꺾으면서 유다는 즉시 바빌로니아의 지배하로 편입되었다.
3) 여호야김의 반란
여호야김은 3년간 느부갓네살에게 복속했으나, 기원전 601년 바빌로니아가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자 이를 기회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신바빌로니아 연대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4) 여호야긴과 시드기야
여호야김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바빌로니아의 재침공으로 단 3개월 만에 항복하고 바빌론으로 유배되었다. 느부갓네살은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시드기야 역시 바빌로니아에 충성하지 못하고 결국 유다의 완전한 파멸을 초래하게 된다.
(2) 두 단계로 진행된 유다의 멸망
유다의 몰락은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닌, 두 차례의 함락을 거치며 완성되었다.
▪︎ 1차 함락 (기원전 597년)
여호야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신바빌로니아 연대기』는 “그가 유다 성을 포위하고, 아다루 월 2일에 성을 점령하여 왕을 사로잡았다”고 기록한다.
여호야긴은 항복했고, 왕족·귀족·기술자 등 지배 엘리트층이 바빌론으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다는 정치·경제의 핵심 인력을 잃고 급격한 약화를 겪었다.
▪︎ 2차 함락과 완전한 멸망 (기원전 587/586년)
느부갓네살이 세운 괴뢰왕 시드기야는 이집트의 개입 약속을 믿고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예레미야』(37장)는 잠시 이집트 군이 북상해 바빌로니아의 포위가 풀렸다고 전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혼란에 불과했다. 곧 바빌로니아 군은 예루살렘을 재포위하여 함락시켰고, 솔로몬 성전을 포함한 예루살렘 전체를 불태워 파괴했다.
시드기야는 도주하다 붙잡혀 두 눈이 뽑힌 채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로써 다윗 왕조는 400여 년 만에 막을 내리고, 유다 왕국은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유다의 멸망은 단순한 정치적 붕괴가 아니었다.
그것은 ‘야훼의 언약 백성’이라는 신학적 정체성의 붕괴, 그리고 이스라엘 신앙의 새로운 전환을 촉발한 사건이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과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배자들은 이제 ‘땅 없는 백성’으로서 신앙과 정체성을 재구성해야 하는 새로운 시대, 즉 바빌로니아 유배기로 들어서게 된다.
정리: 역사 기록과 고고학적 실체 사이의 대화
본 요약 정리자료는 유다 왕국 후기(기원전 720–539년)의 역사를 ① 고고학적 증거, ② 성경 외 문헌, ③ 성경 기록이라는 세 축을 통해 검토하였다. 이러한 다중적 접근을 통해, 단일 자료만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었던 유다 왕국의 복합적 실체를 살펴봤다. 일부 사건은 서로 다른 자료 간의 교차 검증을 통해 높은 역사적 신뢰도를 확보한 반면, 다른 사건들은 여전히 논쟁의 영역에 머물러 있으며, 또 어떤 기록들은 신학적 목적에 따라 의도적으로 재구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1) 사료로 교차 검증된 역사적 사실
다음 사건들은 고고학 및 외부 문헌을 통해 명확히 확인된 대표적 사례들이다.
▪︎ 산헤립의 유다 침공
앗시리아 왕 산헤립의 비문, 니네베 궁전의 부조, 그리고 라기스 등지에서 발견된 파괴층은 『열왕기하』 18장의 침공 기사가 실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함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 므낫세 왕의 존재와 외교 관계
므낫세는 앗시리아의 에살핫돈과 아슈르바니팔 비문에 두 차례나 조공을 바친 봉신 왕으로 등장한다.
이는 그의 통치가 실제로 제국 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현실이었음을 보여준다.
▪︎ 여호야긴 왕의 유배
『신바빌로니아 연대기』는 기원전 597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왕을 사로잡았다고 기록한다.
또한 바빌론에서 출토된 ‘여호야긴 배급표’는 그가 실제로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했음을 구체적으로 증명한다.
(2) 확인되지 않거나 논쟁적인 사안
다음 사건들은 성경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외부 사료나 고고학 자료로 직접 검증되지 않은 사례들이다.
▪︎ 요시야의 존재와 종교 개혁
요시야의 이름은 아직 성경 외 문헌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그의 대대적인 개혁을 입증할 직접 증거는 부족하지만, 7세기 후반 인장의 도상학 변화(아세라와 천체 상징의 소멸) 등 간접적인 정황 증거는 종교적 변화의 실재 가능성을 시사한다.
▪︎ 아몬 왕의 암살
외부 기록은 없지만, 왕위 계승기의 불안정성과 내부 쿠데타 가능성을 고려할 때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닌 실제 사건의 반영일 가능성이 높다.
(3)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는 성경 기록
다음의 몇몇 서술은 고고학과 외부 문헌의 증거와 명백히 충돌하며, 성경 저자의 신학적·문학적 의도가 강하게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 므낫세의 회개 설화
『역대하』에만 등장하며, 『열왕기하』의 침묵 및 “므낫세의 죄로 인해 유다가 멸망했다”는 구절과도 모순된다.
이는 그의 긴 통치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후대의 창작적 재구성으로 보인다.
▪︎ 요시야의 전사 서사
『역대하』의 영웅적 전사 묘사는 『열왕기하』의 간결하고 모호한 기술과 대조된다.
이는 불명예스러운 처형의 현실을 신앙적 순교로 미화한 결과로 해석된다.
▪︎ 여호야김의 바빌론 유배
『역대하』의 서술은 『열왕기하』와 『신바빌로니아 연대기』의 기록과 상충한다.
역사적 신뢰도는 낮으며, 신학적 단죄의 서술 구조로 이해된다.
▪︎ 다니엘서의 역사 전승
다니엘서의 왕명과 사건 전개는 후대 전승에 기반한다.
특히 느부갓네살의 ‘광기’ 이야기는 바빌로니아 왕 나보니두스 전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쿰란에서 발견된 「나보니두스의 기도(4QPrNab)」가 이를 뒷받침한다.
(4) 역사 재구성의 의미
결국 유다 왕국의 역사는 단일한 서사로 고정될 수 없는 다성적 역사이다.
그것은 땅속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실체, 주변 제국들의 냉정한 기록, 그리고 신앙 공동체가 남긴 신학적 해석의 서사가 서로 대화하고, 교차하며, 때로는 충돌하는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특히 오데드 립슈츠의 연구가 보여주듯, ‘텅 빈 땅의 신화(The Myth of the Empty Land)’는 고고학적 사실과는 다르다. 예루살렘은 실제로 파괴되어 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베냐민 지역이 새롭게 인구 중심지로 부상하며 유다 사회는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다른 형태로 지속되었다.
참고) 오데드 립슈츠(Oded Lipschits)는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특히 철기 시대 후기(기원전 8~6세기)에 대한 고고학 및 역사 연구로 유명한 이스라엘의 유력 학자이다. 그는 고대 근동의 정치적 변화, 사회 구조, 포로기 이후 회복 과정 등에 대해 심도 깊은 연구를 수행해 왔으며,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 성서 고고학 분야에서 현대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립슈츠는 특히 성경의 역사적 배경과 고고학적 증거들을 연계해 해석하는 데 주력했고, 북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간의 관계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제국과의 상호작용을 탐구했다. 그의 연구는 북왕국의 멸망과 유다 왕국의 포로기, 그리고 이후 유다의 회복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기여를 했다.
또한 립슈츠는 고고학적 방법론을 현대화하고 컴퓨터 과학 기술을 이용한 문자 자료 분석을 도입하는 등 학문적 혁신도 선도하고 있다. 이로써 고대 이스라엘의 문서 문화, 서기관 활동, 행정체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이처럼 다양한 자료의 대화를 통해서만 우리는 신앙의 서사와 역사적 실체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유다 왕국의 마지막 세기가 지닌 비극과 회복의 이중적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역사와 신학, 발굴과 기록의 교차점에서만 비로소 고대 이스라엘의 실체적 진실이 한 걸음 더 우리 앞에 다가온다.
참고서적
1. ⟪Ancient Israel: What Do We Know and How Do We Know It?⟫ Lester L. Grabbe, 2017, T&t Clark Ltd.
2. ⟪고대 이스라엘 역사⟫ J. 맥스웰 밀러 & 존 H. 헤이스, 박문재 역, 1996, 크리스챤다이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