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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중기 및 후기 청동기(BCE 2000-1300)

by KEN

기원전 제2천년기 고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근동의 지정학과 사회

요약
제2장은 기원전 2000년부터 1300년까지의 제2천년기(중기 및 후기 청동기 시대) 팔레스타인과 주변 고대 근동 지역의 역사, 사회, 정치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이 시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지만, 성서 기록이 아닌 고고학,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 문헌 등 외부 자료에 의존하여 재구성해야 한다.

아래는 주요 결론이다.

자료의 한계와 신뢰도:
이 시기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은 고고학적 발굴과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이다. 반면, 창세기의 족장 설화는 시대착오적 요소와 고고학적 증거의 부재로 인해 제2천년기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고 보기 어렵다.

팔레스타인의 정치 및 사회:
가나안(팔레스타인) 지역은 이집트 신왕국의 강력한 통제 하에 있는 여러 도시 국가들의 집합체였다. 아마르나 문서는 세겜, 예루살렘, 므깃도, 하솔과 같은 도시 국가들이 패권을 다투며 서로를 견제하는 복잡한 정치 지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고고학적 변화:
중기 청동기 시대는 견고한 요새와 도시화가 특징이었으나,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도시 중심지가 축소되고 고원 지대는 주로 목축민이 거주하는 등 인구가 희박해졌다.

주변 민족과 사회 집단:
힉소스, 아모리인, '아피루', 샤수 등 다양한 집단이 이 시기 문헌에 등장한다. 이들 명칭은 순수한 민족적 구분보다는 사회적 지위(예: '아피루'는 이주민 또는 무법자), 지리적 출신(예: 샤수는 트란스요르단 남부)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히브리인'의 어원으로 추정되는 '아피루'는 초기에 민족이 아닌 사회 계층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국제 정세:
제2천년기 후반은 이집트 신왕국, 히타이트 제국, 미탄니 왕국,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등 강대국들이 각축을 벌이던 역동적인 시대였다.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이러한 국제 질서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제2천년기 근동의 복잡성과 중요성


이번 장의 목적은 기원전 제2천년기(약 기원전 2000–1200년) 동안 고대 팔레스타인과 주변 근동 지역의 지정학적 지형과 사회적 역학 관계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데 있다. 이 시기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등 거대 제국들의 흥망성쇠가 가나안 지역의 도시국가 체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던 시기로, 복잡하고 역동적인 국제 관계의 교차점이자 충돌의 장이었다. 후대 이스라엘의 기원과 정체성 형성을 이해하려면 바로 이 시기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비판적 재구성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는 고대 이스라엘사 연구의 핵심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이번 정리 자료는 고고학적 발굴 자료, 이집트의 행정 및 외교 문서, 그리고 우가리트·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된 점토판 기록 등 당대의 1차 사료를 중심으로 분석을 진행한다. 각 사료가 지닌 고유한 가치와 내재적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역사적 사실과 후대의 문학적 재구성 사이의 간극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참고) 시대 구분표 _ The Middle and Late Bronze Ages
- MB I (ca. 2000–1800 BCE)
- MB II (ca. 1800–1650 BCE)
- MB III (ca. 1650–1500 BCE)
- LB I (ca. 1500–1400 BCE)
- LB IIA (ca. 1400–1300 BCE)
- LB IIB (ca. 1300–1200 BCE)
(“ca.“는 라틴어 “circa”의 약어로, 한국어로는 “약”, “대략”이라고 번역)



역사 복원의 기반: 사료 분석과 방법론적 고찰


기원전 제2천년기 고대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단편적이고 때로는 상충하는 다양한 유형의 자료를 비판적으로 종합하는 과정에 의존한다.

고고학적 유물, 이집트의 공식 기록, 주변 지역의 외교 서신, 그리고 후대에 편집된 성경 문헌 등은 각각 서로 다른 관점과 정보를 제공한다. 따라서 각 자료의 성격과 한계, 생성 맥락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은 신뢰할 수 있는 역사상을 구축하기 위한 필수 전제라 할 수 있다.


이에 본 장에서는 기원전 제2천년기 연구의 토대가 되는 주요 사료들을 검토하고, 각각의 학문적 가치와 해석상의 유의점을 논함으로써, 이후 전개될 분석이 어떠한 사료적 근거 위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1) 고고학적 증거

고고학적 발굴은 문헌 기록이 부족한 기원전 제2천년기의 물질문화와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특히 중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약 2000–1550년)와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약 1550–1200년)는 서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사회적 특징을 보여준다.


중기 청동기 시대:

이 시기는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진전된 시기로, 특히 요새화된 대규모 도시 국가의 등장이 두드러진다.

윌리엄 데버(William Dever)는 “거대한 요새 시설의 확산은 이 시기의 가장 특징적인 단일 요소”라고 평가했다.

전체 인구의 약 65%가 소수의 대형 요새 도시에 집중 거주했으며, 중기 청동기 2기(MB II)에 이르러 세겜, 헤브론, 예루살렘 등 중앙 산악 지대의 정착지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스라엘 핀켈슈타인은 이 시기 인구의 약 75%가 세겜과 이스르엘 평원 사이에 밀집해 있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현상은 강력한 도시 국가 체제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사회·정치적 중심으로 기능했음을 시사한다.


후기 청동기 시대:

중기 청동기 말기의 광범위한 붕괴기 이후,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도시의 규모가 축소되고 전반적인 인구 감소가 나타난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도시 문명의 쇠퇴로 해석했으나, 부니모비츠(S. Bunimovitz)는 도시와 농촌 인구의 균형은 유지되었다고 반박한다 즉, 도시 중심이 축소된 만큼 농촌 지역 또한 비례적으로 감소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 정착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중앙 산악 지대는 이 시기 동안 정착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핀켈슈타인은 이 지역의 주요 거주민이 유목 목축민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전반적으로 후기 청동기 시대의 가나안 도시 국가들은 심각한 인구 부족과 정치적 취약성에 시달렸고, 이는 이후 사회 주변부 집단이 부상하는 배경이 되었다.


요약하자면,

중기 청동기 시대는 요새화와 도시 중심의 집권적 질서가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면, 후기 청동기 시대는 그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사회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한 과도기였다.

이 두 시기의 대비는 훗날 이스라엘 형성과 초기 정착기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2) 이집트 문헌 자료

기원전 제2천년기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상황은 주로 이집트의 문헌 자료를 통해 알려져 있다.

이 자료들은 이집트의 행정적·군사적 관점에서 작성된 만큼 일정한 한계를 지니지만, 당시 정치 지형과 역학 관계를 복원하는 데 있어서는 대체 불가능한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1) 저주 문서 (Execration Texts)

기원전 19–18세기경 제작된 이 문서들은 주술적 의례의 일환으로, 이집트인들이 적대 세력을 저주하기 위해 도기 조각이나 석상 조각에 적의 이름을 새긴 기록물이다. 비록 구체적인 서사나 사건 정보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이 문서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도시 국가 분포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지형학적 단서를 제공한다.


여기에는 해안가의 아쉬켈론, 내륙의 하솔, 그리고 산악 지대의 세겜과 예루살렘 등 주요 도시들이 언급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중기 청동기 시대의 도시국가 체계와 정치 지도를 부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다만, 나답 나아만이 지적했듯이, 일부 학자들은 ‘예루살렘’으로 판독된 명칭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참고) 저주 문서(Execration Texts)는 고대 이집트에서 작성된 주술적·의례적 문서로, 주로 파라오의 적들, 적대 국가, 반역자 등의 이름을 적어 놓고 이들을 저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서들은 기원전 약 19~18세기 중왕국 시대에 주로 제작되었으며, 도자기나 작은 조각상, 토기 접시 위에 적힌 이름들을 깨뜨리거나 묻는 등의 의식을 통해 저주의 효력을 기원했다. 이러한 행위는 적들을 마법적으로 무력화시키고, 내부 위협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내용은 저주 대상의 이름, 직함, 지역, 범죄 등을 상세히 나열하고, 특정 신들의 이름으로 파괴와 죽음, 불임, 군사적 패배 등의 강력한 저주를 선언하는 것이 특징. 이집트 저주 문서는 고대 근동의 조약 저주문서 및 구약의 예언서들과 문학적·신학적으로 유사한 양식을 보여, 고대 근동 국가 간 조약을 보장하는 신적 정당성 확보와 관련해 연구된다. 특히 구약 예언서가 외국 민족에 대한 심판 선언을 할 때의 문학적 배경으로도 자주 인용된다.


2) 아마르나 서신 (Amarna Letters)

기원전 14세기, 이집트의 수도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이 서신들은 가나안 지역의 정치 현실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외교 문서 자료이다. 아카드어로 작성된 이 서신들은, 이집트의 패권 아래 있던 가나안의 여러 도시국가 통치자들이 파라오에게 보낸 보고와 청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각 도시국가들이 영토와 권력을 둘러싸고 벌이던 경쟁, 동맹, 갈등의 복잡한 관계망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세겜의 통치자 라바유(Lab’ayu)는 주변 지역으로의 공격적 팽창을 시도했고, 이에 대해 메기도의 통치자는 서신 EA 244에서 라바유가 “전쟁을 걸어와 메기도를 점령하려 한다”고 호소했다.


이에 대응해 예루살렘의 통치자 압디-헤바(Abdi-Ḫeba)는 서신 EA 287에서 파라오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군사적 개입을 요청했다. 그는 라바유의 아들들이 ‘아피루(Ḫabiru, 혹은 하비루)’라 불리는 사회 주변부 집단과 결탁해 “파라오의 땅을 탈취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가나안의 군소 왕들이 이집트의 권위를 빌려 서로를 견제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참고) 아마르나 서신은 기원전 14세기 중반 이집트 신왕국 시대(주로 아멘호테프 3세와 아크나톤 시대)에 작성된 외교 서한 모음집으로, 아마르나 지역에서 발견된 300여 통의 점토판 문서. 이 문서들은 당시 이집트 파라오와 근동의 여러 강대국들(히타이트, 미탄니,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및 가나안 지역 도시국가 지배자들 사이에 주고받은 공식 외교 서신으로, 주로 국제 정치, 군사적 지원 요청, 보급품과 황금 교환, 동맹과 갈등 상황 등이 담겨 있다.


3) 기타 이집트 기록 – 문학과 왕실 비문

이집트의 문학 작품이나 왕실 기념비문 역시, 기원전 제2천년기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사회상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보조적 자료로 활용된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시누헤 이야기(The Tale of Sinuhe)》이다. 이 작품은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지역으로 망명한 한 관료의 경험을 서사화한 것으로, 이를 통해 우리는 가나안 지역의 생활 방식, 사회 구조, 그리고 이집트와의 문화적 교류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요컨대, 이집트 문헌 자료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정치적·사회적 구조를 복원하는 데 가장 중요한 외부 사료이다. 비록 이집트 중심적 시각이라는 한계를 지니지만, 이 시기의 도시국가 체제, 지역 간 세력 균형, 그리고 제국–속국 관계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열쇠를 제공한다.

참고) 시누헤 이야기(The Tale of Sinuhe)는 고대 이집트 중왕국 초기(기원전 약 20세기)에 작성된 가장 유명한 고대 이집트 문학 작품 중 하나. 이 산문 형식의 이야기문학은 왕의 신하 시누헤의 시점에서 전개되며, 주인 아멘엠하트 1세의 죽음 이후 정치적 혼란과 두려움으로 고국을 떠나 아시아 지역으로 망명한 그의 생애를 다룬다.
시누헤는 망명지에서 유목민 사회에 정착하여 성공과 명예를 얻지만, 결국에는 고국 이집트에 대한 그리움과 정체성의 문제를 느끼며 귀환을 원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망명과 귀환, 정체성, 신과 왕과의 관계,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는 철학적이고 심오한 내용으로, 당대뿐 아니라 이후 이집트 문학과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사랑받아 수백 년간 반복적으로 필사되었으며, 고대 이집트인의 세계관과 인간관,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3) 우가리트 및 메소포타미아 문헌

시리아 해안의 도시국가 우가리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마리(Mari), 누지(Nuzi) 등에서 발견된 문헌들은, 제2천년기 근동의 광범위한 국제 관계망 속에서 팔레스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 맥락을 제공한다.


우가리트에서 발견된 신화 및 종교 문헌은 히브리어와 같은 북서셈어 계통 언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가나안의 종교·언어·문화적 전통을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또한 마리에서 출토된 행정 문서들은 하솔 등 가나안 북부 도시들과의 교역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팔레스타인 지역이 메소포타미아와 긴밀한 경제·정치적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입증한다.


이러한 문헌들은 팔레스타인을 지역적 단위가 아닌 근동 전체의 상호의존적 체계 속에서 조망해야 함을 일깨워 주며, 후대 이스라엘의 형성 또한 이러한 국제적 문화·경제 교류의 토대 위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4) 성경 자료에 대한 비판적 검토

창세기부터 사사기에 이르는 성경의 기록들은 전통적으로 기원전 제2천년기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주요 자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 학계에서는 이러한 접근에 대해 비판적이고 신중한 시각이 지배적이다.


과거 성서 연구를 주도했던 문서설(Documentary Hypothesis)에 대한 학문적 합의가 무너지면서, 오늘날 다수의 연구자들은 오경을 포함한 성경 본문들이 실제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서 수백 년, 혹은 천 년 이상이 지난 후대 주로 페르시아 시대에 편집되고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성경 기록은 기원전 제2천년기의 사건을 직접 증언하는 역사 자료라기보다, 후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학적 관점과 정체성을 반영한 문학적 구성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본 요약에서는 성경 자료를 기원전 제2천년기의 역사적 사실을 직접 복원하기 위한 1차 사료로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후대의 기억과 해석의 산물로서, 당대의 현실이 어떻게 신학적·문학적 서사로 재구성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참고 자료로 활용한다.


요컨대, 제2천년기 고대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단일한 사료 유형만으로는 온전히 재구성될 수 없다.

고고학적 증거가 보여주는 물질적 기반, 이집트 문헌이 드러내는 정치적 역학, 그리고 주변 지역 기록들이 제공하는 국제적 맥락을 비판적으로 종합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당시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역사적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기원전 제2천년기 근동의 지정학적 지형: 강대국들의 부상과 각축


기원전 제2천년기 동안 고대 근동의 지정학적 지형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왕조,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와 같은 주요 강대국들의 흥망성쇠에 따라 크게 요동쳤다.

이들 제국의 패권 경쟁은 완충 지대에 위치한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운명을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었다.


특히 팔레스타인은 때로는 이집트의 직접 통치 아래 놓이기도 했으며, 강대국 간 세력 균형이 변할 때마다 정치적 불안정과 권력 공백을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이 시기의 복잡한 국제 관계망을 이해하기 위해, 본 장에서는 힉소스의 등장과 이집트 신왕국의 성립을 기점으로 시기를 전기(기원전 약 2000–1550년)와 후기(기원전 약 1550–1200년)로 구분하여, 각 시기별 주요 세력의 동향과 그 지정학적 영향력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살펴야 한다.


(1) 전기 (기원전 약 2000-1550년)

제2천년기 전반부는 기존 세력의 재편과 새로운 강자의 부상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시기 이집트는 내부 혼란을 겪었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새로운 왕조들이 등장했으며, 아나톨리아에서는 히타이트가 역사 무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1) 이집트 중왕국과 힉소스

이집트 제12왕조 시기의 중왕국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나, 이후 점차 쇠퇴하며 제2중간기(약 기원전 1700–1550년)라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 나일 델타 지역에는 ‘아시아인(Asiatics)’이라 불린 외래 집단이 정착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외국 땅의 통치자들”을 뜻하는 힉소스였다.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점진적인 이주와 정착의 결과로 보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군사적 침입과 정복을 통한 권력 장악으로 보는 견해다. 논쟁의 여지는 남아 있으나, 힉소스가 가나안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북서셈족 계통의 집단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들은 이집트 제15왕조를 수립하고 약 1세기 동안 이집트 북부를 통치하였다.

이 기간 동안 가나안 지역과의 교역이 활성화되었고, 힉소스는 문화적·정치적으로 깊은 흔적을 남겼다. 훗날 이집트 신왕국의 대외 팽창 정책은, 역설적으로 힉소스 통치기에 축적된 근동 세계와의 접촉 경험에 기반했다고 평가된다.

참고) 이집트 제15왕조 힉소스는 기원전 약 1640년부터 1550년까지 존속했던 힉소스인에 의해 세워진 왕조. 힉소스인들은 주로 셈족 계통으로, 레반트 지역(가나안, 시리아 등)에서 남하하여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제13, 제14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집트 북부 제12왕국의 영역을 차지하면서 권력을 잡았다.
힉소스인들은 아바리스(Avaris)에 도읍을 정하고, 기원전 1650년경에 이집트 삼각주에 세운 제15왕조를 통해 북이집트와 남이집트를 두루 통치하기 시작.
이 왕조는 가나안과의 교역, 물자 약탈, 군사적 확장과 같은 특징을 가지며, 내부적으로 권력 다툼과 분열이 잦았던 것으로 전해짐.
(일설에 의하면, 이 시기에 구약의 요셉이 타 민족으로 총리까지 오른 배경이라는 설명을 하기도 함)


2) 메소포타미아의 세력들

수메르의 우르 제3왕조가 붕괴한 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새로운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다.


북부의 고대 앗시리아 왕국은 군사력보다는 무역 네트워크를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아나톨리아의 카르룸 무역 식민지들을 기반으로 상업 제국적 성격을 띠었다.


한편 남부에서는 함무라비 왕이 이끄는 바빌로니아 제1왕조가 메소포타미아 대부분을 통일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들의 주요 관심은 메소포타미아 내지와 북부 시리아 지역에 집중되었으며,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직접적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3) 히타이트 고왕국의 등장

아나톨리아 고원에서는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히타이트가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며 히타이트 고왕국(약 기원전 1650–1500년)을 세웠다. 그들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주변 지역으로 군사적 확장을 시도했다.


특히 왕 무르실리스 1세는 기원전 1600년경 남쪽으로 진격하여 바빌론을 정복, 함무라비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 사건은 메소포타미아의 세력 균형을 송두리째 흔들었고, 그 결과 카시트인들이 바빌로니아를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약하자면, 제2천년기 전반부는 이집트의 쇠퇴와 힉소스의 부상, 메소포타미아의 재편, 그리고 히타이트의 등장이 교차하며 근동 세계 전체의 권력 지형이 근본적으로 재구성된 시기였다.

참고) 카시트인들(Kassites)은 기원전 약 1600년부터 1200년까지 메소포타미아 지역, 특히 바빌로니아를 지배했던 고대 민족으로, 주로 셈계 계통의 사람들. 그들은 자그로스 산맥(이란의 산악 지역)에서 유래했으며, 고립된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고대 근동 언어와는 별개의 독립된 언어를 구사했다고 여겨짐.
카시트인들은 기원전 18세기 중반 바빌론을 침공했고, 이후 수세기를 걸쳐 바빌로니아와 근동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며 강력한 군사력과 문화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그들은 바빌론 중심의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자신들만의 종교, 문화, 제도 등을 도입하며 그 영향력을 확대. 특히, 그들 고유의 건축, 조각, 예술적 특징을 발전시키며, 바빌론 유적들에 흔적을 남겼다.


(2) 후기 (기원전 약 1550-1200년)

후기 청동기 시대는 이집트, 히타이트, 미탄니, 카시트 바빌로니아, 중기 앗시리아 등 여러 강대국이 공존하며 복잡한 외교와 군사 관계를 유지한 ‘국제 시대’로 불린다. 이들의 상호작용은 이 시기 근동 세계의 정치 질서와 세력 균형을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었다.


1) 이집트 신왕국의 제국주의

힉소스를 축출하고 이집트를 재통일한 제18왕조의 파라오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향한 대외 팽창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아흐모세가 남부 팔레스타인의 샤루헨을 정복하며 제국의 기반을 다졌고, 그 뒤를 이은 투트모세 3세는 메기도 전투에서의 대승을 통해 가나안 전역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

참고) 메기도 전투는 고대 이스라엘 부근의 메기도 지역에서 기원전 1457년경과 기원전 609년경 각각 중요한 두 차례 전투를 일컬음. 가장 유명한 메기도 전투는 이집트 신왕국 18왕조 투트모세 3세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와 가나안 연합 반란군 간의 전투로, 투트모세 3세가 승리하여 이집트의 가나안 지배를 확립한 사건. 이 전투는 고대 근동 최초의 대규모 전쟁 중 하나이며, 투트모세 3세가 직접 지휘한 최초의 기록된 전투 중 하나.
또 다른 메기도 전투는 기원전 609년에 있었던 사건으로, 유다 왕국의 요시야 왕이 이집트 파라오 느코 2세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사건. 느코 2세가 카르케미시에서 바빌로니아와의 전쟁을 위해 통로 확보 차원에서 유다 땅을 통과하려 했으나 요시야가 이를 막으면서(?, 논란이 있는 주장) 메기도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요시야가 죽으면서 유다는 이집트의 속국이 됨. 이 전투는 히브리 성경의 열왕기하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멘호텝 4세(아케나텐, Akhenaten)의 통치기에는 태양신 아텐(Aten)을 중심으로 한 종교 개혁에 집중하느라 아시아 속주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는 이른바 ‘아마르나 공백기’가 나타났다.

참고) 아마르나 공백기(Amarna Interlude)는 고대 이집트 신왕국 18왕조 시기, 특히 아멘호텝 4세(아케나톤) 시대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역사적·문화적 공백기 또는 변화기를 일컫는 말. 이 시기는 아케나톤이 수도를 테베에서 텔 엘 아마르나(아케트아톤)로 옮기고, 전통적인 다신교를 배격하며 아톤 신앙의 일신교적 개혁을 시도한 시기로, 이전과 이후 이집트 역사에서 비교적 독특하게 왜곡되고 단절된 시기라 볼 수 있다.
아마르나 문서로 대표되는 외교문서들이 이 시기에 발견되었으며, 이는 주로 아카드어로 기록된 외교 서한으로, 이집트와 주변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히타이트 등 여러 고대 근동 국가 간의 정치적·외교적 관계를 보여준다.


이후 제19왕조의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는 북상하는 히타이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며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했다. 특히 기원전 약 1275년경의 카데시 전투는 시리아 패권을 둘러싼 양대 제국의 충돌이 정점에 달했음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참고) 카데시 전투는 기원전 1274년경 이집트 신왕국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 간에 팔레스타인 부근의 카데시(현 시리아 지역)에서 벌어진 고대 최대 규모의 전차 전투. 이 전투는 기록이 비교적 잘 남아있어 고대 군사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으며, 첫 대규모 전차전을 보여준 전투로 유명.
람세스 2세는 약 15만 명 가량의 병사와 2000대 넘는 전차를 이끌고 히타이트군과 맞섰으며, 히타이트 역시 비슷한 규모의 군대로 대치. 전투는 히타이트군의 기습과 거짓 정보에 의해 이집트군 일부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 고전했으나, 결국 람세스 2세가 전투 현장에서 용감하게 반격해 전열을 재정비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음. 다만 전투 승패에 대해서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양측의 기록이 서로 다르며, 실제로 카데시 요새는 함락되지 않았고, 전투는 명확한 승자가 없이 끝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 전투는 이후 기원전 1258년경 세계 최초의 문서로 된 평화 조약으로 이어졌는데,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팔레스타인을 두고 더 이상의 대규모 전쟁을 피하고 평화 공존을 선택.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 왕녀를 왕비로 맞아들여 조약을 공고히 했고, 이 조약은 고대 국제 외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선례로 평가받는다.


2) 히타이트 제국과 미탄니 왕국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지역에서는 후르리인(Hurrian)을 중심으로 한 미탄니 왕국이 강성했으나, 아나톨리아에서 세력을 회복한 히타이트 제국의 도전에 직면했다.


히타이트의 왕 수필룰리우마스 1세(기원전 약 1350년경)는 미탄니를 격파하고 북부 시리아의 패권을 장악, 미탄니를 사실상 속국으로 전락시켰다.


그 결과 근동 세계는 남쪽의 이집트와 북쪽의 히타이트가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양강 구도로 재편되었다. 이 긴장된 세력 균형은 이후 수십 년간 근동의 정치 질서를 규정하게 된다.


3) 카시트 바빌로니아와 중기 앗시리아의 부상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카시트 왕조가 약 400년 이상 바빌로니아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며 근동의 국제 체제 내에서 중요한 외교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히타이트의 공격으로 미탄니가 쇠퇴하자, 이전까지 미탄니의 속국이었던 앗시리아가 독립하여 중기 앗시리아 제국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미탄니의 영토를 흡수하고 히타이트와 국경을 맞대며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였다.


요컨대, 제2천년기 후반은 강대국들이 동맹과 경쟁을 반복하며 세력 균형을 유지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거대한 지정학적 구도 속에서, 팔레스타인의 가나안 도시국가들은 끊임없이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때로는 이집트에 충성을 맹세하고, 때로는 서로를 비방하거나 연합하여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이집트 패권 하의 가나안: 아마르나 시대의 도시 국가 체제


기원전 14세기의 아마르나 서신은 고대 팔레스타인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비교할 수 없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이 서신들은 이집트 제국의 패권 아래 놓인 가나안 지역의 정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창’과 같다.


표면적으로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은 파라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경쟁하고, 동맹을 맺고, 때로는 서로를 배신하며 충돌했다. 이 서신들은 그러한 복잡한 정치적 역학과 사회 구조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따라서 아마르나 서신은 단순한 외교 문서가 아니라, 거대 제국의 간접 통치 아래에서 지역 세력들이 어떻게 권력을 행사하고, 또 제국의 영향력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율성과 생존을 모색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 연구라 할 수 있다.


(1) 도시 국가 간의 경쟁과 동맹

아마르나 서신과 고고학적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기원전 14세기경 가나안 지역에는 약 20~25개의 도시 국가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답 나아만과 이스라엘 핀켈슈타인 등 여러 학자의 연구는 이들 도시 국가의 지리적 분포와 상호 관계를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서신에 빈번히 등장하는 주요 도시 국가로는 북부의 하솔, 이스르엘 평원의 메기도, 중앙 산악 지대의 세겜과 예루살렘, 그리고 셰펠라 지역의 게셀, 라기스 등이 있다.


이들 도시 국가는 인접한 영토와 교역로의 통제권을 두고 끊임없는 경쟁과 갈등을 벌였다.

파라오에게 보내진 다수의 서신들은 이웃 도시 국가의 통치자를 비방하거나, 자신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속주인지 강조하며, 이집트로부터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각 도시 국가는 정세와 이해관계에 따라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거나, 곧바로 적대 관계로 돌아서는 등 복잡한 정치적 역학 구조를 형성했다. 결국 아마르나 서신은, 이집트의 패권 아래에서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이 어떻게 제국의 권위를 이용해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모색했는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이라 할 수 있다.


(2) 주요 인물과 갈등 사례: 라바유와 압디-헤바

아마르나 시대의 정치적 갈등과 권력 다툼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중앙 산악 지대의 패권을 놓고 대립했던 세겜의 통치자 라바유(Labʾayu)와 예루살렘의 통치자 압디-헤바(Abdi-Ḫeba)의 경쟁이다.


1) 라바유의 팽창 정책과 세력 확장

세겜의 통치자 라바유는 가나안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주요 교역로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주변 도시 국가들을 위협하며 공세적인 확장 정책을 펼쳤다. 그는 게셀과 기느티-키르밀 등과 연합하여 하나의 세력 축을 형성했고, 이에 맞서 메기도, 르홉, 악삽, 악고, 가드 등 북부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연합 전선을 구축했다.


라바유의 세력 확장은 가나안을 남북으로 양분시킬 수 있는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되었으며, 이에 따라 남부의 예루살렘, 가드, 아쉬켈론, 라기스 등도 그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한 정치적·군사적 연대를 모색해야 했다.


2) 압디-헤바의 외교적 책략과 생존 전략

예루살렘의 통치자 압디-헤바는 라바유의 위협에 맞서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이집트 파라오에게 여러 차례 긴급 서신을 보냈다. 그는 서신 EA 287에서 이렇게 호소한다.


“모든 땅이 평화롭지만, 나만은 전쟁 중에 있습니다. 라바유의 아들들이 왕의 땅을 아피루(Ḫabiru)에게 넘겨주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파라오의 군사적 개입을 절박하게 요청하는 동시에,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이집트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압디-헤바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이 예루살렘은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내게 준 것이 아니라, 강력한 왕의 팔이 내게 주신 것입니다.”


이 발언은 그가 자신의 권력이 파라오의 임명과 보호에 기반함을 강조한 것이며, 이를 통해 이집트의 후원을 확보하면서 경쟁 세력을 견제하려는 전형적인 군소 왕의 생존 전략을 보여준다.


3) 정치적 분열과 가나안 사회의 불안정성

아마르나 시대에 드러난 이러한 도시 국가 간의 분열과 지속적인 갈등은 가나안 사회의 구조적 불안정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집트의 통제력이 강력할 때는 이러한 갈등이 일시적으로 억제되었지만, 파라오의 관심이 다른 지역으로 향하거나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면 내부의 경쟁과 충돌은 곧바로 심화되었다.



기원전 제2천년기 팔레스타인의 사회 구성: 주요 민족 및 사회 집단 분석


제2천년기의 고대 팔레스타인 사회는 결코 단일한 민족으로 구성된 사회가 아니었다.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 지역은 서로 다른 기원과 생활 방식을 지닌 다수의 민족·사회 집단이 공존하고, 때로는 갈등했던 복합적 사회였다. 이들의 정체성과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일은, 당시 사회의 구조적 복잡성을 파악하고 후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에 관한 여러 가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필수적이다.


주요 집단들의 특징과 역사적 역할을 살펴본다.


(1) 힉소스(Hyksos)

힉소스는 이집트 제2중간기(기원전 약 1700–1550년)에 델타 지역을 중심으로 이집트 제15왕조를 세운 집단이다. ‘외국 땅의 통치자들’을 의미하는 그들의 명칭에서 드러나듯, 이들은 이집트 외부에서 유입된 세력이었다.

이들의 이름 다수가 북서셈어 계통이며, 관련 유적지에서 발견된 토기와 물질문화가나안 지역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힉소스는 가나안에서 이주한 셈족계 ‘아시아인’ 집단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들은 가나안 문화와 이집트 문화를 매개하며 근동 세계의 문화적 교류에 중요한 흔적을 남겼다.


(2) 아모리인(Amorites)

‘아모리인’의 정체성은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기록에 등장하는 ‘마르투(mar.tu)’라는 명칭과, 북서셈어 계통의 인명 자료를 통해 부분적으로 재구성된다. 이들을 특정할 만한 독자적인 고고학적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문헌 속 아모리인은 이중적인 이미지로 묘사된다.

한편으로는 “천막에 살며 날고기를 먹는” 야만적인 유목민으로 그려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리(Mari)와 같은 강력한 도시 국가를 세우고 메소포타미아 사회 전반에 통합된 세력으로 등장한다. 이는 ‘아모리인’이 단일한 민족 집단이라기보다, 북서셈어를 사용하는 광범위한 사회·언어 공동체를 가리키는 개념이었음을 시사한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시리아 지역의 아무루(Amurru) 왕국이 존재했으며, 이는 아모리계 세력의 지속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준다.


(3) 아피루/하비루(‘Apiru/Ḫabiru)

‘아피루(혹은 하비루)’는 한때 성경의 ‘히브리인(Hebrew)’과 동일시되었으나, 현대 연구는 이 용어가 특정 민족이 아니라 사회적 신분을 지칭했음을 분명히 한다. 이들은 기존 사회 체제에서 이탈한 사람들, 즉 난민, 이주민, 용병, 무법자 등 다양한 주변부 집단을 포함했다.


후기 청동기 시대, 가나안 도시 국가 체제가 인구 부족과 내부 약화를 겪으면서 이러한 사회 주변부 세력의 부상이 두드러졌다. 아마르나 서신(EA 366 등)에서는 아피루가 도시 국가 간의 분쟁에서 용병으로 고용되거나, 특정 지역을 위협하는 불안정 세력으로 자주 묘사된다.


아피루’와 ‘히브리인’ 사이에는 어원적 유사성이 인정되지만, 양자를 민족적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4) 샤수(Shasu)

‘샤수’는 주로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기록에 등장하는 집단으로, 대체로 에돔과 세일(Seir) 등 요르단 남동부의 건조 지역과 관련된 부족 집단으로 묘사된다. 이들의 정체성은 단순하지 않다.


일부 문헌은 샤수를 다른 지역의 지명과 함께 언급하여, 그들의 활동 반경이 남부 팔레스타인 전역에 걸쳐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들의 주요 생계 방식은 유목 목축으로 추정되지만, 이집트 문헌은 샤수를 ‘영토를 지닌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어 그들을 단순한 사회 계층이나 유목민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샤수는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한 반(半)유목적 부족 공동체였을 가능성이 높다.


(5) 가나안인(Canaanites)

‘가나안인’이라는 용어는 사용 맥락에 따라 지리적·민족적·이념적 의미가 뒤섞인 복합적 개념이다.

외부 문헌(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에서 ‘가나안’은 주로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 전체를 지칭하는 지리적 용어로 사용되며, ‘가나안인’은 그 지역의 토착 주민 전반을 통칭하는 의미였다.


반면 성경에서는 ‘가나안인’이 이스라엘이 정복해야 할 이질적 원주민으로 묘사되며, 이는 문학적·신학적 이념 구성을 반영한 개념에 가깝다(닐스 페터 렘케). 한편 나답 나아만은 성경 속 히타이트, 히위, 여부스 족속 등이 후기 청동기 말 아나톨리아 등지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북방계 이주민 집단’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는 성경의 ‘가나안인 목록’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실제 역사적 이동 현상을 부분적으로 반영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정리

기원전 제2천년기의 팔레스타인은 다양한 정체성과 배경을 지닌 집단들이 공존하며 복잡한 상호 관계를 형성한 다문화적 사회였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은 후대에 형성된 단일 민족 중심의 정체성 서사, 특히 성경의 족장 설화가 묘사하는 세계와는 뚜렷한 간극을 보여준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다층성을 바탕으로, 족장 설화의 역사성과 그 신학적 의도를 비판적으로 재평가하고자 한다.



역사적 재평가: 성경의 족장 설화와 제2천년기의 실제


20세기 중반, 올브라이트를 중심으로 한 학자들은 고고학과 고대 근동 문헌 연구를 바탕으로,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족장 설화가 제2천년기의 역사적 현실을 충실히 반영한다고 주장하며 ‘족장 시대의 역사성’을 강력히 옹호했다.


그러나 이후 수십 년간의 심화된 고고학적·문헌학적 연구 결과, 이러한 주장은 더 이상 학계의 지지를 받기 어렵게 되었다. 오늘날 다수의 연구자들은 족장 설화를 제2천년기의 역사 기록이 아닌, 후대의 신학적·문학적 창작물로 이해한다.


아래는 족장 설화의 역사성을 약화시키는 주요 고고학적·문헌학적 근거를 검토한다.


(1) 고고학적 증거와의 불일치

족장 설화의 역사성을 검증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설화의 주요 무대로 언급된 지역의 고고학적 자료를 조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 결과, 설화 속 지리적 배경과 실제 고고학적 증거 사이에는 심각한 불일치가 확인된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활동지로 언급되는 브엘세바와 헤브론 등 남부 유다 산지와 네게브 지역의 주요 유적에서는, 족장 시대에 해당하는 중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약 2000–1550년)의 정착 흔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고고학자 윌리엄 데버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족장 설화에 등장하는 모든 지역이 실제로 사람이 거주한 시기는 철기 시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설화에 등장하는 지리적 배경은 기원전 제2천년기의 실제 정착 양상과 부합하지 않으며, 오히려 후대인 철기 시대(기원전 12–8세기)의 사회 현실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2) 시대착오적 요소(Anachronisms)

족장 설화에는 제2천년기의 역사적 맥락과 맞지 않는 후대적 요소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는 설화가 훨씬 후대에 기록·편집되었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 블레셋(Philistines):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그랄(Gerar)’ 지역에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교류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블레셋인은 ‘해양 민족’의 일파로, 기원전 1200년경, 즉 제2천년기의 말기에야 가나안 해안 지역에 정착했다.


- 아람인(Arameans):

족장 설화에서 하란 지역은 ‘아람 나하라임’이라 불리며, 리브가와 라헬의 가족이 ‘아람인’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아람인’이라는 집단이 사료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기원전 1100년경 이후이다.


- 낙타의 가축화(Camels):

족장들은 낙타를 재산으로 보유하고, 먼 거리를 이동하는 대상(隊商)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낙타가 근동 지역에서 운송 수단으로 본격 사용된 시기는 철기 시대, 특히 기원전 7세기 이후에 불과하다.


-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ans):

아브라함의 출신지로 언급되는 ‘갈대아 우르’ 역시 시대착오적 표현이다.

‘갈대아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것은 기원전 1000년 이후, 특히 신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626–539년)의 일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설화의 배경이 제2천년기보다 훨씬 후대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반영함을 명확히 보여준다.


(3) 사회 관습의 오해와 잘못된 유비(Analogy)

올브라이트 학파는 한때, 족장 설화에 묘사된 상속·결혼 등의 사회 관습이 기원전 15세기 메소포타미아 북부 누지(Nuzi) 문서의 기록과 유사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족장 시대의 역사성에 대한 근거로 제시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과 이삭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이야기(창 12:13 등)는 후르리인의 ‘아내-누이 제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후속 연구들은 이러한 유사성이 대부분 과장되었거나 오해에 기반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누지 문서의 사회 관습은 성경의 사례와 맥락과 기능이 전혀 다르며, 많은 경우 학자들이 본문을 후대 문헌에 억지로 맞춘 결과였다. 특히 ‘아내-누이 제도’는 잘못된 해석의 산물로 판명되었고, 상속이나 계약 관습 또한 족장 설화와의 직접적 연관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이상의 증거들을 종합하면,

족장 설화는 기원전 제2천년기의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상을 직접 반영한 기록이 아니라, 훨씬 후대 왕정기 혹은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의 기원과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구성된 문학적 전통으로 이해된다.


이는 고대사를 연구할 때 당대의 1차 사료와 후대의 신학적 재구성을 명확히 구분해야 함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며, 성경 본문을 역사 자료로 활용할 때 요구되는 방법론적 경계와 비판적 태도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결어: 상호작용의 시대, 제2천년기 근동의 유산


이번 장은 기원전 제2천년기 고대 팔레스타인 및 근동 지역의 지정학적·사회적 지형을 다각적인 사료 비판을 통해 분석하였다. 그 결과, 이 시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핵심적 특징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제2천년기는 제국 간 패권 경쟁이 지역의 운명을 좌우한 ‘상호작용의 시대’였다.

이집트 신왕국과 히타이트 제국이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패권을 두고 벌인 각축전은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을 끊임없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아마르나 서신이 생생히 증언하듯, 가나안의 군소 통치자들은 생존을 위해 강대국의 후원에 의존하면서도, 그 틈새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복잡한 외교전을 펼쳤다. 이 시기의 국제 질서는 고정된 패권 체제가 아니라, 강대국과 속국, 그리고 지역 세력들이 얽히고 충돌하는 다층적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었다.


둘째, 팔레스타인 내부는 결코 단일한 사회가 아니었다.

중기 청동기 시대의 강력한 도시 국가 체제는 후기 청동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약화되었고, 그 공백 속에서 ‘아피루’나 ‘샤수’ 등 다양한 배경의 사회 집단들이 새롭게 부상했다. 이들은 유목민, 용병, 난민 등으로서 정착 사회와 주변부 사회가 교차하는 경계선에서 활동하며 기존의 정치 질서를 흔들었다. 이러한 다층성과 유동성은 팔레스타인 사회가 고정된 체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재편되는 동적 구조였음을 보여준다.


셋째, 역사적 실체와 후대의 기억 사이에는 뚜렷한 간극이 존재한다.

고고학적 증거와 동시대 문헌들은, 성경의 족장 설화가 묘사하는 제2천년기의 모습과 실제 역사적 현실이 크게 달랐음을 보여준다. 시대착오적 요소와 고고학적 불일치는 족장 설화가 실제 역사 기록이 아니라, 후대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신의 기원과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형성한 문학적·신학적 구성물임을 시사한다. 이는 ‘기억된 과거’와 ‘실제의 과거’를 구분해야 한다는 역사 인식의 기본 원칙을 환기시킨다.


결론적으로,

기원전 제2천년기는 후대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의 토대를 형성한 역동적 전환기였다. 강대국들의 영향력, 지역 세력들의 치열한 생존 전략, 그리고 다양한 사회 집단들의 이합집산이 맞물려 이 시기는 고대 근동의 정치·사회적 구조가 복합적으로 형성된 결정적 시기로 자리한다.


동시에, 이 시대를 연구하는 과정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즉, 고대의 기록을 단순한 사실의 보고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것이 쓰인 시대의 맥락과 목적, 그리고 저자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적 사실과 신념의 서사를 구분하는 이러한 태도야말로, 제2천년기 근동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스크린샷 2025-10-16 오후 6.33.08.png 당시의 년표, ⟪Ancient Israel⟫ 자료

관련서적

1. ⟪Ancient Israel: What Do We Know and How Do We Know It?⟫ Lester L. Grabbe, 2017, T&t Clark Ltd.

2. ⟪고대 이스라엘 역사⟫ J. 맥스웰 밀러 & 존 H. 헤이스, 박문재 역, 1996, 크리스챤다이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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