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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뭘까 대체, 그 해석이란 것이...

The Aims and Scope of Hermeneutics

by KEN
요약
해석학은 텍스트, 특히 다른 시대나 문화적 맥락에서 쓰인 텍스트를 '어떻게 읽고, 이해하며, 해석할 것인가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는 단순히 해석의 규칙을 나열하는 차원을 넘어, 철학·문학·사회학·신학 등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다학제적 이해의 기술(art)로 발전했다.

특히 슐라이어마허와 가다머 같은 사상가들은 해석학의 초점을
'저자 중심의 텍스트 분석에서 독자의 이해 지평과 텍스트의 상호작용을 포함한 소통의 과정'
으로 확장시켰다.

철학적 해석학은 여러 면에서 데카르트적 합리주의로 대표되는 전통 철학과 뚜렷이 대조된다.
전통 철학이 인간 주체가 수동적 대상을 탐구하는 구조를 전제한다면,
'해석학은 텍스트가 오히려 독자를 드러내고 변화시키는 능동적 주체로 작용한다'고 본다.
또한 삶의 맥락과 분리된 추상적 문제(problem)보다,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서 생겨나는 질문(question)에 집중'한다.

해석의 출발점 역시 모든 것을 의심하는 회의(懷疑, doubt)가 아니라,
'수정 가능하고 개방적인 선이해(先理解, pre-understanding)'에 둔다.

해석학의 핵심 방법론은 해석학적 나선(hermeneutical spiral)이다.
이는 '텍스트의 부분과 전체를 오가며 이해를 점차 심화시키는 역동적 과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한 반복이나 회의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관점에 대한 존중과 공감적 이해를 증진시키며, 독자를 더 깊고 풍부한 이해의 지평으로 이끌어 가는 여정'으로 기능한다.



0.

해석학은...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며, 적용하고, 이에 반응하는 인간의 방식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특히 성서 해석학은 이러한 과정을 성경 텍스트를 중심으로 구체화한다.


19세기 슐라이어마허 이후 해석학은 단일 학문 분과를 넘어,

철학·신학·문학·사회학·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와 맞닿은 다학제적 성격을 띠게 된다.


철학 ☜

“이해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며,

이해의 본질과 그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한다.


문학 ☜

텍스트의 장르, 서사 구조, 읽기 과정 등 문학적 관점에서 해석의 방법을 확장한다.


사회학 및 비평 이론 ☜

계급, 인종, 성별, 이데올로기 등 사회적 요인이 텍스트 해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한다.


커뮤니케이션 이론 및 언어학 ☜

텍스트의 의미가 독자나 공동체에 어떻게 전달되고 수용되는지를 다루며, 의미의 소통 과정을 탐구한다.


성서학 및 신학 ☜

성서 해석학은 성경 본문과 신학적 질문을 다룬다.

올바른(책임 있는) 해석을 위해서는 구약·신약 개론, 주해 등 성서학적 선행 이해가 필수적이다.


———

해석학의 중심 질문

“텍스트의 의미는 독자에 의해 구성되는가,
아니면 저자에 의해 주어지는가?”


☞ 이 물음은 곧 “성서가 우리가 원하는 어떤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는가?”라는 실천적 문제와도 연결된다.

☞ 따라서 해석학은 성서 해석의 접근 방식 및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준 또한 모색한다.


———

해석학은 흔히 주해(exegesis)와 구별된다.

주해는 텍스트를 실제로 해석하는 구체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반면, 해석학은 우리가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며 적용할 때 어떤 인식적·언어적 과정을 거치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떻게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묻는 2차 학문이다.


즉, 주해가 ‘무엇을 해석하는가’에 초점을 둔다면, 해석학은 ‘우리가 해석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를 탐구한다.



1.

해석의 역사적 변천


1) 전통적 관점 — ‘규칙’에 초점


오래전, 해석학은 주로 '성경 해석을 위한 규칙들의 체계'로 이해되었다.

교부 시대(약 A.D. 500년까지)에서 종교개혁과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는...


이 시기 해석학은 책임 있는 주해를 수행하기 위한 규칙의 집합으로, 주해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랍비 전통:

힐렐(약 BC 30년)에게서 유래한 일곱 가지 해석 규칙이 대표적이다.

처음 다섯 가지 규칙은 추론, 유비 적용, 연역, 귀납 등 논리학적 성격을 띠었으나, 나머지 두 가지는 성경의 한 구절이 다른 구절의 의미에 미치는 영향이나 문맥의 중요성을 다루며 보다 해석학적 성격을 보였다.


보수적 신학 전통:

밀턴 S. 테리와 같은 보수적 기독교 학자들은 해석학을 '해석의 과학'으로 규정했다.

그들에게 해석학은 원리를 규정하는 과학인 동시에, 그 원리를 실제 해석에 적용하는 ‘기술(art)’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주로 저자(발신자)의 의도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독자나 수신자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간과되었다.


2) 현대 — '이해'로 인식


19세기 슐라이어마허와 20세기 가다머에 이르러,

해석학은 더 이상 해석 규칙의 체계가 아니라 '이해의 기술'로 재정의 된다.


슐라이어마허:

“해석학은 사고의 기술의 일부이며, 따라서 철학적이다.”(1819년)

그는 해석학을 보편적 이해의 철학으로 확장시켜, 모든 언어적 소통과 이해 행위의 근거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가다머:

“해석학은 무엇보다 실천이며, 이해의 기술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훈련해야 할 것은 ‘귀’다.”

가다머는 해석학을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이해의 사건(Ereignis: 단순한 사건 이상의 철학적, 존재론적 의미를 내포)’으로 보았다.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에게서 고정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의 만남 속에서 새롭게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전환은 해석학의 관심이 텍스트 자체에서 독자와 공동체의 이해의 지평(horizon of understanding)으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소통은 발신자(저자), 텍스트, 수신자(독자)가 함께 참여하는 하나의 사건이라는 인식 해석학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3) 교부 시대의 논쟁


관점의 차이는 이미 교부 시대의 해석학적 논쟁 속에서도 발견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등):

청중과 독자의 이해와 반응에 주목하며, 종종 ‘문자적 의미’를 넘어 ‘풍유적(알레고리적) 의미’를 탐구했다. 이들은 비판적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독자의 이해 과정에 관심을 두었다.


안티오키아 학파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등):

‘문자적 의미(literal meaning)’를 옹호한 학파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단순한 보수주의적 해석이 아니라, 예수, 사도, 예언자와 같은 저자의 의도가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요컨대, 전통적 해석학이 ‘규칙의 체계’를 중시했다면, 현대 해석학은 ‘이해의 사건’과 ‘관계적 소통’을 탐구하는 철학적 사유로 발전하였다.



2.

해석학 학습의 필요


해석학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일은 단순히 텍스트를 더 잘 읽기 위한 기술 습득을 넘어,

인간의 이해와 소통 전반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해석학을 공부한 학생들은 공통적으로 “텍스트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읽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가다머를 통해,

독자는 텍스트를 자신의 선입견이나 기대에 맞추려 하지 않고 텍스트 자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다.


리쾨르를 통해,

해석이 언제든 자기기만에 빠질 수 있음을 자각하고, 자신의 독해 방식을 비판적 의심으로 점검해야 함을 깨닫는다.


이로써 독서는 단순한 정보 해독이 아니라, 자기 이해의 변형 과정으로 변화한다.


———

해석학은 본질적으로 다학제적 학문이다.

철학, 신학, 사상사, 문학, 사회과학, 성서학 등 서로 단절되어 있던 영역을

‘이해’라는 공통 주제 아래 통합한다.


그 결과, 철학적·인문학적·신학적 탐구가 단순한 병렬이 아니라,

서로를 해석하고 조명하는 일관된 인식의 과정으로 재구성된다.


———

해석학은 다른 관점을 ‘틀렸다’고 단정하기보다, '이해'하려는 태도를 훈련시킨다.

처음엔 낯설고 불편한 주장이라도,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성찰하며 공감적으로 접근하도록 이끈다.

이는 곧 대립하는 세계관과 신념 사이에 다리를 놓는 행위다.


이와 같은 ‘공감적 이해’의 강조는 주요 해석학자들의 핵심 주장으로 이어진다.


슐라이어마허:

“해석이란 자신의 사고 틀에서 벗어나 저자의 사고 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빌헬름 딜타이:

저자의 내적 세계를 체험하려는 ‘감정 이입’을 강조했다.

루돌프 불트만: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그것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했다.

에른스트 푹스:

해석의 핵심은 ‘공감적 상호 이해’라고 주장했다.

에밀리오 베티:

"해석학은 개방성·수용성·관용·상호 존중을 길러주는 학문으로, 모든 대학에서 필수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처럼 해석학은 타인의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도록 돕는다.


———

해석학은 ‘이해’가 하나의 단일한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사유와 대화 속에서 서서히 확장될 수도 있고, 바울의 회심처럼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듯한’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러한 통찰은 신앙에 이르는 길이 하나만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며, 각기 다른 영적 여정이 지닌 타당성과 아름다움을 인정하게 한다.


요컨대, 해석학 연구는

타자를 이해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지적·영적 훈련이라 할 수 있다.



3.

철학적 해석학 vs. 전통 철학


가다머와 리쾨르를 비롯한 대부분의 철학적 해석학자들은 자신들의 접근이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나 데이비드 흄의 경험주의와 뚜렷이 구별된다고 본다. 전통 철학이 인식의 확실성을 추구했다면, 해석학은 이해의 과정성과 관계성을 탐구한다.


———

데카르트적 인식론에서 인간은 능동적 주체, 지식의 대상은 수동적 객체로 설정된다. 그러나 해석학에서는 이 관계가 역전된다. 텍스트는 단순히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해석자를 드러내고 심문하는 주체적 목소리로 기능한다.


에른스트 푹스:

“우리가 텍스트를 번역하기 전에, 텍스트가 먼저 우리를 번역해야 한다.”

로버트 펑크: 탕자의 비유(눅 15:11-32)는 독자를,

은혜가 필요한 ‘동생’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형’으로 나누어,

"오히려 (주어진 텍스트가) 독자인 자신을 해석하는 이야기로 작용한다."


이러한 차이는 유럽 해석학에서 중요한 두 용어, 설명(Erklärung)과 이해(Verstehen)의 구분으로 명확해진다.

설명: 합리적이고 인지적이며 비판적인 차원으로, 전통적 인식 흐름과 유사하다.

이해: 개인적이고 직관적이며 초이성적인 차원으로,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구분은

슐라이어마허가 말한 ‘비판과 비교의 남성적 활동’과 ‘관계적 이해의 여성적 자질’의 대비,

리쾨르가 제시한 ‘의심의 해석학’과 ‘복원의 해석학’의 대조와도 통한다.

전자는 텍스트를 분석하고 해체하는 태도이고,

후자는 그 안의 상징과 의미를 회복하는 태도이다.


———

전통 철학

종종 인간의 실제 삶과 분리된 추상적 문제들(problem)을 다루었다.


☞ 아우구스티누스:

그가 신, 자유, 악을 논한 저작들은 각기 다른 청중과 상황(마니교도, 펠라기우스 논쟁 등)에 따라 상이한 강조점을 보인다. 이는 악의 문제라는 고정된 주제가 아니라,

'구체적 맥락 속에서 새롭게 제기되고 답변되는 질문들의 연속'임을 의미한다.


반면 해석학

☞ 가다머로부터 철학적 사유를 삶 속에서 발생하는 질문(question)과 응답의 연쇄 과정으로 이해했다.

“문제의 동일성은 공허한 추상이다.
역사 바깥에서 문제의 동일성을 상정할 수 있는 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 비트겐슈타인: 후기의 그는 철학적 질문이

'언어와 행위가 얽혀 있는 전체적 맥락', 즉 특정한 언어게임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결국 해석학은 문제(problem)가 아니라 질문(question)으로부터 철학이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명제에서 철학을 출발시켰다.

그는 의심(doubt)을 통해 확실한 인식의 토대를 확보하려 했다.

반면 해석학은 그와 정반대의 길을 택한다.


해석학은 회의/의심이 아니라 선이해(Vorverständnis)에서 출발한다.

선이해는 무비판적 전제나 편견이 아니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적 조건이며,

언제든 수정과 확장을 통해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갈 수 있는 열린 출발점이다.


☞ 버나드 로너건은 데카르트적 접근을 '빈 머리의 원리'라 비판했다.

해석자가 자신의 경험·지성·판단을 배제하면,

남는 것은 단순한 기호의 나열일 뿐이며,

참된 의미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철학적 해석학은 전통 철학의 추상적 인식론을 넘어 살아 있는 이해의 철학이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와, 타자와, 그리고 텍스트와 맺는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변형해 가는 이해의 사건을 탐구하는 철학이다.



4.

여기서, 사용되는 용어와 그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

선이해(先理解, Vorverständnis, pre-understanding)

선이해는 더 깊고 확실한 이해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이자 다리로 기능한다.

이는 고정된 전제가 아니라, 이해의 과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수정되거나 확증될 수 있는 유연한 가설이다.


직소 퍼즐의 비유:

퍼즐 조각 하나를 들고 그것이 하늘의 일부인지, 바다의 일부인지 추측하며 맞춰가는 과정과 같다. 처음의 추측(선이해)은 일부가 틀리기도 하고 일부는 옳게 유지되면서, 점차 전체 그림이 드러난다. 이해는 이렇게 부분적 추측과 전체적 통찰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한다.


———

해석학적 순환과 해석학적 나선

이 개념은 선이해의 원리를 확장한 것으로, 부분과 전체의 상호 조명 과정을 뜻한다.

즉, 텍스트의 부분(예: 바울 서신의 한 구절)과 전체(예: 바울 신학 전체)를 오가며 이해를 점차 심화시키는 과정이다. 부분에 대한 통찰이 전체를 밝히고, 전체에 대한 이해가 다시 부분의 해석을 수정·보완한다.


해석학적 나선(Hermeneutical Spiral):

그랜트 오스본은 이 과정을 ‘순환(circle)’이 아니라 ‘나선(spiral)’로 표현했다. 이해의 과정은 같은 자리를 맴도는 악순환(vicious circle)이 아니라, 초기의 선이해에서 더 풍부하고 깊은 이해로 상승해 나가는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운동이라는 것이다.


☞ 회의(懷疑, doubt)가 아닌 성찰의 과정:

이 과정은 “모든 이해는 전제에 묶여 있다”는 회의주의나 냉소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판적 사고를 유지한 채, 지속적인 경청과 수정의 태도를 필요로 한다.


———

해석학적 탐구는 완성된 사상 체계나 절대적 확신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것은 열린 구조의 사유를 전제로 하며, 이해의 확장은 항상 수정과 재구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 비트겐슈타인의 ‘둥지’ 비유:

신념 체계는 하나의 중심 명제가 아니라, 서로를 지지하며 의미를 구성하는 명제들의 집합체이다.

그는 이를 '명제들의 둥지'로 설명했다. 나뭇가지 몇 개가 빠져도 둥지는 유지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더 이상 둥지로 존재할 수 없다. 이는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상호 의존성을 보여주는 비유다.


☞ 가다머의 프로네시스(φρόνησις, phronēsis):

가다머는 기술적 지식(technē)처럼 단편화된 정보가 아니라, 부분을 잠정적 전체와 연결하는 공동의 이해 감각, 곧 실천적 지혜(phronēsis, 프로네시스)를 강조했다. 해석학은 이처럼 개별 사례와 전체적 기준 사이의 긴장 속에서 작동하며, 이해는 항상 이 두 차원 사이를 왕복하면서 성장한다.


요컨대, 선이해와 해석학적 순환은 '부분에서 전체로, 다시 전체에서 부분으로 나아가는 이해의 상승 과정'을 설명한다. 그것은 고정된 결론에 이르는 닫힌 회로가 아니라, 끝없이 열려 있는 사유의 여정이다.



5.

소결: 이해를 향한 여정


해석학은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딱딱한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텍스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의 선이해를 끊임없이 점검하며, 텍스트와 진지한 대화에 참여하는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이해의 기술이다.


해석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텍스트를 더 잘 해석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텍스트와의 만남 속에서 자기 자신이 변화되는 과정, 즉 이해의 여정을 걷는 일이다.


20세기 해석학의 거장 에밀리오 베티는 해석학이 “열린 마음, 관용, 상호 존중, 그리고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길러주기 때문에 “모든 대학에서 필수 과목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여정을 통해 우리는

단순히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인내심 있고, 더 비판적이며, 더 공감할 줄 아는 해석자로 성장하게 된다.

이해란 결국 지식을 늘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참고도서

⟪HERMENEUTICS⟫ Anthony C. Thiselton, 2009,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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