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의 주요 흐름과 함의
결국 우리가 마주한 핵심은, 한 시민으로서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과 비판적 성찰의 의무가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요청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석력의 함양은 더 이상 개인적 선택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요즘은 뉴스를 찾는 일이 점점 두렵게 느껴진다.
특히 사회를 뒤흔든 중대한 사안과 그에 얽힌 수사‧재판 과정, 그리고 그 주변에서 나타나는 각종 반응들을 마주할 때면 단순한 불쾌감을 넘어 섬뜩한 두려움이 밀려온다.
같은 시대, 같은 사건을 두고 어떻게 이토록 극단적으로 다른 해석이 가능한가를 생각하다 보면 더욱 그렇다.
최근에는 법정에서 판사를 향해 거친 언사를 쓰는 일부 변호사들의 모습을 접하고, 또 공적 공간 밖에서 이어지는 과도한 언동들을 보면서, ‘저런 사람들과 얽히면 삶이 얼마나 피곤해질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관건은 해석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해석력이다.
세계관은 저절로 성숙하지 않는다. 학습이 부족하면 오해가 자리 잡고, 학습이 부진하면 왜곡이 굳어진다. 그리고 왜곡된 해석은 개인의 언행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신뢰 구조까지 무너뜨린다.
그래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왜곡된 세계관을 바로잡고, 타인의 말과 사건을 공정하게 분별하며, 복잡한 현실을 온전한 시각으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해석력 강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해석의 깊이가 곧 세계를 바라보는 깊이이고, 해석의 성숙함이 곧 공동체의 성숙함이기 때문이다.
철학, 성서학, 문학이론, 사회적 자아 맥락에서 본 해석학
요약
이번 장은 해석학적 사유와 전통 철학의 근본적 차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전통적 성경 연구·문학 이론·사회 비평 이론이 해석학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
해석학은 데카르트적 개인주의를 비판하며, 공동체와 전통의 지혜를 이해의 토대로 삼는다(가다머, 리쾨르). 반면 전통적 성경 연구는 저자의 의도와 역사적 맥락, 즉 시간과 장소에 뿌리내린 의미를 해석의 출발점으로 설정한다(칼뱅, 슐라이어마허).
20세기 문학 이론은 이러한 전통적 접근에 두 가지 중요한 도전을 제기했다.
첫째, 신비평은 텍스트를 저자로부터 분리된 자율적 실체로 간주하며, ‘의도의 오류’를 비판했다.
둘째, 독자 반응 이론은 의미 형성의 중심을 텍스트나 저자가 아닌 독자에게로 옮겼다. 급진적인 형태에서는 독자가 텍스트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사회 비평 이론은 해석 과정 속에 개입하는 권력, 욕망, 자기 강화 등의 ‘관심’(하버마스)을 드러낸다. 이는 실증주의나 세속주의를 포함한 모든 해석적 입장이 결코 가치중립적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통찰은 해석 공동체가 지닌 사회적 기반과 신학적 전제의 정당성을 다시 성찰하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성숙한 해석학은 저자, 텍스트, 독자,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사회·역사적 맥락이 맺는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다학제적 과제임을 보여준다.
1.
해석학적 사유
해석학적 사유는 개인의 의식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 전통적 철학(합리론, 경험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해석학은 인간 이해의 기초를 개인의 내면이 아닌 공동체와 전통, 그리고 역사적 맥락에서 찾는다.
데카르트는 세상으로부터 추상된 고독한 사유하는 주체(cogito)로부터 철학적 성찰을 시작했다. 영국의 고전 경험론(로크, 버클리, 흄) 또한 개인의 감각 경험을 지식의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가다머, 리쾨르, 베티와 같은 해석학자들은 이러한 개인주의적 출발점과 순진한 객관성 개념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들은 인간의 이해가 언제나 사회적, 역사적 전제 속에서 형성된 것임을 강조한다.
가다머는 개인이 속한 공동체와 전통이 오류 가능성이 큰 개인 의식보다 더 신뢰할 만한 이해의 토대를 제공한다고 본다. 그는 전통을 이성의 적으로 간주한 계몽주의적 전통을 비판하며, 권위와 전통의 복권을 주장했다. 가다머에게 전통은 비판 없이 따를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가능 조건이자 대화의 상대이다.
리쾨르는 정신분석학, 심리학, 사회과학의 발달이 데카르트적 자아 개념의 한계를 드러냈다고 지적한다.
그는 데카르트가 발견한 것은 “진리의 결여 속에서도 지속되는 확실성”이라며, 개인 의식은 자기기만과 진리에 대한 저항에 취약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취약성은 인간 안에 자리한 “원초적이고 집요한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된다. 즉, 인간은 스스로를 진리의 중심에 두려는 경향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다.
해석학은 두 극단을 모두 경계한다.
한편으로는 역사적·사회적 영향을 무시하고 인간 이성을 절대화하는 순진한 합리주의를 거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인간 행위를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환원하는 포스트모던적 결정론과도 거리를 둔다.
해석학은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되, 이해와 소통의 가능성을 여전히 신뢰하는 중도적 사유의 철학이다.
위르겐 하버마스와 같은 사회 비평 이론가들의 영향 아래, 해석학은 해석 과정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음을 인정한다.
권력, 욕망, 자기 강화, 억압 등의 ‘관심’(Interesse)이 언제나 해석에 작용하며, 이는 텍스트 이해를 왜곡시킬 수 있다. 따라서 책임 있는 해석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비판적 설명과 창조적 이해의 결합을 요구한다.
리쾨르의 말처럼, 진정한 해석은 ‘의심의 해석학’과 ‘회복의 해석학’을 함께 수행하는 과정이다.
요컨대, 해석학적 사유는 고립된 개인의 이성에서 출발한 근대 철학의 한계를 넘어, 전통·공동체·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는 인간 이해의 관계적·대화적 구조를 탐구한다.
2.
전통적 성경 연구 — 저자 의도 중심 (그리고 역사적 맥락 기반)
—
16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전통적 성경 연구는 성경 저자의 의도와 텍스트가 형성된 역사적 맥락을 의미 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를 '텍스트의 시간과 장소에 뿌리내림'이라는 은유로 표현했다.
이러한 저자 중심의 접근은 이미 고대와 중세, 종교개혁 시대의 성경 해석 전통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 안티오키아 학파(디오도레,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테오도레)는 문자적·역사적 의미를 중시하며, 저자의 의도에 근거한 해석을 강조했다.
- 중세의 피터 롬바르드, 그리고 종교개혁자들 역시 이 전통을 계승했다.
특히 최초의 ‘현대적’ 주석가로 평가받는 존 칼뱅은 주석가의 첫 번째 임무가 “저자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슐라이어마허는 성경의 의미가 저자의 의도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해석의 목적은 단순한 학문적 정확성에 있지 않았다. 그는 설교자가 성경 저자의 영감과 통찰을 온전히 포착해야만 '잠자는 불꽃을 다시 깨울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의 해석학은 신학적 설교와 학문적 연구를 연결하는 ‘이해의 기술’이었다.
이 접근법이 오랫동안 설득력을 지녀온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언어적 의도성 — 저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특정한 단어, 문법, 장르를 의식적으로 선택한다.
2) 일상적 직관 — 우리는 일상 대화에서도 의미를 명확히 하려 할 때, 자연스럽게 화자에게 “무슨 뜻이었는가?”를 묻는다.
3) 신학적 근거 — 성경의 권위는 종종 저자가 선지자나 사도로서 신적 위임을 받았다는 신학적 전제 위에 서 있다.
이처럼 저자 중심적 해석은 언어·경험·신학의 세 층위에서 모두 정당성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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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컨텍스트)의 잘못된 이해로 인한 오독의 사례
- 창세기 31:49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라는 라반의 말은 종종 애정 어린 작별 인사나 축복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창세기 29장 이후의 문맥을 살펴보면, 라반과 야곱은 서로를 속이는 불신의 관계에 있었다.
여기서 히브리어 tsaphah(살피다)는 ‘보호하다’가 아니라 ‘감시하다’에 가깝다. 즉, 라반의 말은 “네가 또 속임수를 쓰면 여호와께서 나를 대신해 보복하시길 바란다”는 경고의 언사였다.
- 고린도전서 6:1–8
바울의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라는 구절(1절)은 흔히 기독교인이 법적 절차를 이용하는 것 자체를 금지한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당시 고린도는 로마의 식민 도시로, 로마의 법정은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자가 뇌물과 권력으로 판결을 좌우할 수 있는 구조였다.
바울이 문제 삼은 것은 법의 사용 그 자체가 아니라, 부유한 신자가 권력을 이용해 형제를 억압하는 행위였다. 따라서 본문의 초점은 ‘세속 재판의 금지’가 아니라, 공동체 내부의 정의와 상호 존중에 있다.
결국 전통적 성경 연구는 저자의 의도와 역사적 맥락에 대한 충실한 탐구를 통해 텍스트의 의미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였다. 그것은 단순한 과거 회귀가 아니라, 오늘의 해석자가 당대의 언어와 사고 속에서 신적 메시지를 다시 듣기 위한 과정이었다.
3.
신비평과 텍스트의 자율성
전통적인 저자 중심 해석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은 성경학 내부가 아니라, 현대 문학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1930~40년대에 등장한 신비평(New Criticism, 혹은 문학 형식주의)은 텍스트를 저자와 분리된 자율적인 의미 체계로 간주하며, 해석의 초점을 텍스트 내부로 제한했다.
윌리엄 K. 윔샛과 먼로 C. 비어슬리는 1946년 발표한 영향력 있는 논문 「의도의 오류」에서, 시의 본문과 시의 기원을 혼동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그들은 ‘의도’를 “저자의 마음속에 있는 설계나 계획”으로 정의하면서, 이러한 내적 심리 상태는 발견하기 어렵고, 설령 발견하더라도 작품의 의미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명제를 제시했다.
“저자의 설계나 의도는 문학 작품의 성공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1970년대 이후 일부 성경학자들은 신비평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접근은 성경 서사 구조와 문학적 통일성을 새롭게 조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텍스트를 저자와 맥락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자율적 구조로 보는 태도는, 역사적·사회적 배경을 경시하는 무비판적 경향을 낳기도 했다.
이를 비판적 관점에서 리뷰해 보면...
➀ 성경 텍스트의 경우, 외부적 요인이 의미 해석과 무관하다는 주장은 명백히 잘못이다.
예컨대 창세기 31장의 라반과 야곱의 대화, 고린도전서 6장의 소송 문제뿐 아니라, 고린도전서 11장의 여성의 베일 관습(머리 가리는 것),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등은 모두 당시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알지 못하면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텍스트들이다.
➁ 윔샛과 비어슬리는 자신의 이론을 시와 시학에 적용했을 뿐,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특정 청중에게 특정 목적을 위해 쓰인 텍스트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의 많은 문헌은 바로 이러한 특정적·상황적 텍스트에 해당한다. 따라서 신비평의 전제를 성경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➂ ‘의도’는 단순히 저자의 내면적 심리 상태만은 아니다.
법정에서 행위의 고의성을 판단하듯, ‘의도’는 지향성 혹은 목적성과 관련된 개념으로, 텍스트 안팎의 증거를 통해 객관적으로 추론되어야만 한다. 즉, 저자의 의도는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해석의 요소이며, 이를 무시하는 것은 텍스트의 의미 구조를 협소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결국 신비평은 텍스트 자체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라는 유익을 남겼지만, 역사적·신학적 문맥을 무시한 채 자율성만을 강조하는 해석은 성경 이해의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해석학적 관점에서 볼 때,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텍스트·독자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사건이지, 어느 한쪽에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4.
독자-반응 이론
신비평이 텍스트를 저자뿐 아니라 독자와 현실 세계로부터도 분리시킨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1960년대 후반부터 의미 형성의 중심을 ‘독자’에게 두는 새로운 접근, 즉 독자-반응 이론(Reader-Response Theory)이 등장했다.
이 이론의 핵심은 의미가 저자나 텍스트 그 자체의 산물이 아니라, 텍스트와 독자(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된다는 주장이다.
로버트 크로스먼은 이를 요약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미는 정확히 우리가 만들어지기를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다.”
이 명제는 단순한 문학 이론을 넘어, “성경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는가?”라는 신학적이고 실천적인 질문으로 직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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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잉가르덴은 독자-반응 이론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철학자로, 텍스트에는 본질적으로 ‘불확정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독자는 텍스트의 ‘틈(gaps)’을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으로 채워 넣으며, 의미를 완성한다고 주장했다.
볼프강 이저는 비교적 온건파 독자-반응이론 주장자로, 그이 저서 『내포된 독자(The Implied Reader)』에서, 독자는 언제나 자신의 관점을 텍스트에 투사하며, 명시되지 않은 의미를 해석적으로 보충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텍스트의 구조가 독자의 상호작용을 규율한다고 보아, 해석의 자율성을 일정 부분 제한했다.
스탠리 피쉬는 독자-반응이론의 급진파에 속한다. 그는 텍스트 내부에는 고정된 의미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해석뿐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선언은 이 이론의 급진적 정점을 보여준다.
“독자의 반응은 의미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곧 의미다.”
즉, 의미는 텍스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 행위 그 자체에 의해 발생한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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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반응 이론의 급진적 형태는 신학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리쾨르가 경고한 자기중심적 나르시시즘, 그리고 디트리히 본회퍼가 비판한 인간 자아의 우상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텍스트가 독자의 욕망과 자아에 맞춰 재구성된다면, 성경은 더 이상 ‘타자(Other)’로서 독자를 향해 은혜와 심판을 선포하는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없다. 그 순간 성경은 신적 말씀의 권위를 잃고, 단지 독자의 자기 투사와 욕망의 거울로 전락하게 된다는 우려에서다.
결국 독자-반응 이론은 해석의 주체가 독자임을 일깨운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독자의 반응 속에서만 찾으려 할 때, 텍스트의 초월적·타자적 차원을 상실하게 되는 위험을 내포한다.
해석학적 균형은 저자, 텍스트, 독자가 맺는 삼중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유지될 수 있다.
5.
해석학의 확장: 사회 비평 이론과 ‘관심’의 문제
독자-반응 이론은 저자와 텍스트뿐 아니라 독자 역시 자신의 역사적·사회적 위치에 의해 형성된 존재임을 부각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공헌을 남겼다. 이러한 인식은 해석학의 논의를 개인의 이해 차원을 넘어 사회적·구조적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인간의 이해가 언제나 특정한 '관심(Interest)'에 의해 이끌린다고 보았다. 이때의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권력 유지·자기 강화·욕망 충족 등 자기 이익에 봉사하는 왜곡된 선이해를 가리킨다. 그는 이러한 자기중심적 관심이 인간의 인식 구조를 왜곡시키며, 이해와 소통을 방해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고 분석했다.
헤겔의 ‘역사적 이성’ 개념 이후, 마르크스·딜타이·베버·만하임·하버마스 등은 해석의 문제를 사회 제도와 이념 구조의 차원으로 확장시켰다. 그들은 해석자가 결코 역사 바깥에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특정한 시대와 사회 속에서 형성된 위치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따라서 모든 해석에는 필연적으로 왜곡, 편향, 그리고 특정한 관심의 개입이 발생한다. 이러한 통찰은 해석학이 단순한 인식론적 탐구가 아니라 비판적 사회 이론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하버마스는 ‘가치중립’을 표방하는 실증주의적 인식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은 역사적 실존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삶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산물이다.
따라서 세속적·과학적 세계관 역시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그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관심의 표현이다.
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왜곡된 관심’은 인간 죄의 본질적 표현, 즉 자기중심적 욕망의 구조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성경 해석에서 유신론이나 신학적 관점을 배제하는 행위 자체가, 오히려 세속주의적 혹은 반신론적 관심의 산물일 수 있다. 결국 ‘중립적 해석’이라는 이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해석은 어떤 전제와 가치에 기반한 이해의 행위이다.
프랜시스 왓슨은 이러한 논의를 신학적 맥락으로 확장하며, 성경 해석 역시 다른 학문 분야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기반을 가진다고 지적했다. 그에게 그 기반은 곧 예배 공동체로서의 교회이다.
왓슨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앙이 적절한 학문적 기준과 양립할 수 없다는 가정은 결국 하나의 편견에 불과하다.”
그는 이른바 ‘학문적 세속성’이 중립적인 태도가 아니라, 특정한 세계관적 관심의 표현임을 비판한다. 따라서 신학적 해석은 단순히 허용 가능한 접근 중 하나가 아니라, 성경의 본래적 문맥—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이해—를 회복하는 정당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해석학은 개인의 이해 과정을 넘어, 사회적 조건과 관심의 구조 속에서 이해가 어떻게 형성되고 왜곡되는가를 성찰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이는 성경 해석을 포함한 모든 인문학적 탐구가 가치와 전제의 투명성 위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일깨운다.
6.
결론적으로, 해석학은 저자·텍스트·독자·사회적 맥락이 서로 얽히고 맞물리는 복합적 의미 생성의 장으로 성숙해 왔다. 전통적 성경 연구가 저자의 의도와 역사적 배경을 탐색하며 의미의 기원을 추적하는 데 집중했다면, 20세기 문학 이론은 텍스트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독자를 의미 형성의 적극적 주체로 부각시키며 해석의 지평을 넓혔다. 더 나아가 사회 비평 이론은 해석이라는 행위가 언제나 권력, 욕망, 이념적 관심의 그물망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해석자에게 사회적 책임과 비판적 성찰의 의무를 자각하게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성숙한 해석학은 더 이상 단일한 관점이나 기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여정이 되었다. 해석은 순수한 지적 기술이나 방법론적 절차가 아니라, 비판적 사유와 신앙 공동체의 성찰이 서로를 비추며 전진하는 다학제적 탐구이다. 텍스트의 진리를 소유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텍스트와의 지속적인 대화 속에서 자신이 변화되기를 기꺼이 수용하는 이해의 윤리를 형성하는 일—바로 이것이 오늘의 해석학이 지향하는 성숙함이다.
결국 우리가 마주한 핵심은, 한 시민으로서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과 비판적 성찰의 의무가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요청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석력의 함양은 더 이상 개인적 선택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를 읽어내고 사실을 분별하며 타인의 언어와 행동을 정확히 이해하려는 노력은, 오늘의 민주사회에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 곧 시민적 교양의 필수 조건이다.
이러한 해석적 성숙 속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주체적 인간으로 우뚝 설 수 있다. 그것은 결코 독선이나 아집의 단단한 껍질을 두른 자아가 아니라, 냉철한 시민의식과 열린 사고를 기반으로 한 성찰적 자아이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해석의 능력은 ‘갖추면 좋은 덕목’이 아니라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책임 그 자체이다.
참고도서
⟪HERMENEUTICS⟫ Anthony C. Thiselton, 2009,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