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해석학의 주요 접근법 비교
들어가기에 앞서...
해석학의 기원을 분류하자면 크게 세 가지 즉 성서 해석, 법 해석, 그리고 문헌학적 해석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각각 고유한 전통과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으나, 해석이라는 인간의 활동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의미를 구성하는지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뿌리를 갖는다.
그 가운데서도, 좋든 싫든, 해석학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보편적 사례는 성서 해석, 특히 기독교 전통에서 축적된 해석의 역사일 것이다. 성서는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읽히고 이해되며 적용되어 온 해석의 장이기 때문이다. 성서 해석은 언제나 텍스트, 해석자, 공동체, 삶의 정황이 얽히며 의미가 생성되는 방식을 드러내 왔다.
따라서 이번 장에서는 해석학의 가장 풍부한 사례이자 논쟁의 현장인 신약 복음서, 그중에서도 예수의 비유를 기반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비유는 그 자체로 해석을 요구하는 텍스트이며, 동시에 해석을 넘어 해석자를 되묻는 언어적 사건이다. 이 장의 목적은 비유를 통해 해석학의 본질을 재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유가 해석의 장 안에서 어떻게 의미를 생성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독자와 듣는 이에게 말을 거는지를 분별해 보는 데 있다. 즉, 이번 장은 예수의 비유를 해석학적 탐구의 공간으로 삼아, 해석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 과정이 될 것이다.
20세기 주요 학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해석했을까? 예수의 비유를...
— 율리허, 도드, 예레미아스, 펑크, 크로산을 중심으로
0.
김호경 교수는 『예수가 하려던 말들』에서 예수의 비유를 성서학적·철학적 사유를 통해 풀어내고자 했다. 그의 관심은 비유가 지닌 언어적 밀도와 해석의 다층성, 그리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예수의 의도를 탐문하는 데 있었다. 박철수 역시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 비유 중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주제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며, 비유가 어떻게 종말론적 전망을 열어주는지를 해설하였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질문하게 된다. 비유란 언제 사용되는가?
비유는 단순한 수사적 장치가 아니라,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의 관계적 조건을 반영하는 담화의 형식이다. 설명해야 할 개념이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추상적일 때, 또는 청자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의미를 조정해야 할 때 비유는 효과적이다. 더 나아가 화자와 청자가 이미 어떤 경험이나 관념을 공유하고 있을 경우, 비유는 그 공통 기반을 매개로 하여 의도를 감추되 드러내는 일종의 ‘공유된 비밀’의 언어로 기능한다. 비유는 따라서 정보 전달의 방식이면서 동시에 해석의 장을 여는 사건이기도 하다.
20세기 신학계에서도 예수의 비유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다양한 방법론적 전환이 일어났다. 본 장에서 우리는 이 여정을 추적하며, 주요 학자들의 접근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현대 비유 해석학의 흐름을 살펴하고자 한다. 특히 아돌프 율리허가 대표하는 역사-비평적 접근과,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문학적·수사학적 접근 사이의 긴장을 검토하는 일은 현행 비유 연구의 변화 양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러한 학문적 성찰의 축적은 비유 해석의 관점을 서서히 이동시켰다.
즉, 질문은
“비유가 본래 무엇을 의미했는가?”라는 기원적 질문에서
“비유가 오늘 우리의 해석 상황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해석학적 질문으로 옮아갔다.
이 전환을 살피는 일은 단지 연구 경향을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는 비유가 지닌 언어적 힘과, 독자·해석자·공동체 사이에서 의미가 생성되는 과정 자체를 분별하고 식별하는, 성찰의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1.
역사-비평적 접근법
20세기 비유 연구의 지형을 강하게 요동시킨 역사-비평적 접근은, 중세와 종교개혁 시기를 관통해 온 무분별한 알레고리 해석에 대한 반발에서 태어났다. 이 방법론이 겨냥한 목표는 단순한 해석적 정교화가 아니라, 예수의 비유 위에 후대 공동체가 덧입힌 신학적 색채를 하나씩 걷어내고, 그 발화가 실제로 놓여 있었던 역사적 정황(Sitz im Leben) 속에서 비유의 원의미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번 논의는 자연스럽게 그 출발점인 아돌프 율리허에서 시작하여, 그 뒤를 잇는 C. H. 도드와 요아힘 예레미아스에 이르는 학문적 궤적을 따라가며, 각 접근이 무엇을 밝혀냈고 무엇을 놓쳤는지 그 핵심 원칙과 해석적 기여를 분별해 보는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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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율리허는 워렌 키신저가 “현대 비유 해석사의 거인”이라고 부를 만큼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의 가장 큰 공헌은 오래도록 혼동되어 온 비유(parable)와 알레고리(allegory)를 명확히 구분하고, 전통적 알레고리 해석을 단호히 배격한 데 있다.
율리허의 방법론은 두 가지 중심 원리로 요약된다.
첫째, ‘하나의 요점(One Point)’ 이론이다.
각 비유는 복잡한 상징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중심 사상, 하나의 도덕적 진술을 전달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예컨대 그는 ‘달란트 비유’를 “현재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이 미래의 행복을 좌우한다”는 교훈으로,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고난의 삶 뒤에 큰 기쁨이 뒤따를 수 있다”는 단일 메시지로 해석했다. 여러 요소를 신학적으로 대응시키는 알레고리 방식은 철저히 배제된다.
둘째, 비유를 직유(simile)로 한정하는 구분법이다.
율리허는 언어를 명료한 문자적 표현(eigentliche Rede)과, 비문자적이고 수수께끼적 표현(uneigentliche Rede)으로 나누었다. 문제는 이 구분이 각각 “진정한 언어”와 “진정하지 않은 언어”라는 뉘앙스로 번역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언어적 차이는 그의 역사적 판단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에게 ‘은유적이고 비문자적인’ 표현은 예수의 본래 메시지가 아니라 초기 교회의 편집 과정에서 덧붙여진 흔적으로 간주되었고, 반대로 명료한 직유만이 예수의 실제 음성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비유 연구에 역사적 엄밀성을 부여하면서도 동시에 뚜렷한 한계를 드러냈다.
아치볼드 헌터는 율리허의 예수상이 '처세술적 격언을 강화하기 위해 그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덕 교사에 가깝다'고 비판하며, 그런 인물을 십자가에 못 박을 이유가 무엇이었겠느냐고 되물었다. 부게와 피빅 역시 율리허가 예수 시대의 히브리어 ‘마샬(mashal, מָשָׁל)’이 지닌 폭넓은 의미 즉 비유, 잠언, 수수께끼 등을 포괄하는 표현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적 정의에 지나치게 의존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율리허의 공헌은 분명하나, 그만큼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그의 연구는 비유를 정제하고 분별하는 데 탁월했으나, 동시에 비유 자체가 지닌 언어적 다층성과 유대적 사유의 폭넓음을 지나치게 협소화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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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H. 도드는 율리허 이후 비유 연구의 지형을 다시 그려낸 또 하나의 이정표였다. 그는 율리허의 반 알레고리적 태도를 이어받되, 단순한 계승에 머물지 않고 양식 비평의 통찰을 신중히 도입함으로써 그 한계를 보완하고자 했다. 냉소와 회의주의로 기울어 있던 독일 학계의 분위기를 완화하면서도, 도드는 율리허의 ‘보편적 도덕 진리’라는 평면적 해석을 거부하고, 각 비유가 예수의 실제 사역과 맞닿아 있는 구체적 역사적 상황성을 드러내려 했다.
그의 작업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다. 도드에 따르면 여러 비유는 먼 미래의 심판을 암시하는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 속에서 이미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위기적 현실을 드러낸다. ‘진주 상인 비유’, ‘밤중의 도둑 비유’ 등에 흐르는 긴박감은 대기 중의 가능성이 아니라 현재적 충돌과 선택의 순간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비유에 대한 그의 정의 역시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한다.
비유는 단순한 교훈의 그릇도, 추상적 진리를 설명하는 우화도 아니다. 도드의 시각에서 비유는 청중의 사고를 깨우고, 현실을 재구성하도록 요구하는 서사적 충격을 담고 있다. 말하자면 비유는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는 것이며,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는 것이다.
이처럼 도드는 율리허가 남긴 공백 즉, 비유의 역사적 현장성과 종말론적 긴장을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비유를 단순한 도덕적 교훈의 장르에서 위기와 결단의 사건으로 재배치하려 하였다. 그의 기여는 비유 연구의 방향을 단번에 전환시키지는 않았지만, 그 흐름의 안쪽에서 무엇을 분별해야 하는지, 어디에 해석의 무게를 두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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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예레미아스는 도드가 연 방향을 이어받으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철저한 방식으로 예수의 본래 발화(ipsissima verba)를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비유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초기 교회 공동체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 속에서 어떻게 재편되고 변형되었는지를 일일이 추적하여 예수의 원형적 비유를 복원하는 데 있었다. 말하자면 그의 작업은 기억의 퇴적층을 하나씩 걷어내어 원래의 지형을 드러내는, 전적으로 회고적인 역사적 재구성의 시도였다.
예레미아스는 이러한 재구성을 위해 비유가 변형되는 10가지 경로를 제시한다.
이 목록은 일종의 해석학적 분별 규범으로 기능가게 된다.
1) 아람어에서 헬라어로의 번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형 2) 어휘의 변화
3) 이야기에서 추가된 윤색과 장식
4) 구약성서 전승의 영향
5) 청중의 변화(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6) 교훈적 목적에 맞춘 비유의 재배치
7) 교회의 특정 상황이 반영된 흔적
8) 알레고리화 경향
9) 여러 비유의 융합
10) 삶의 정황(Sitz im Leben)의 변화
이 규칙들은 초기 교회의 편집 과정에서 일어난 해석적 층위를 분별하는 데 유용한 도구였고, 예레미아스의 연구는 무분별하고 주관적인 비유 해석을 일정하게 제어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특히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처럼 당시 바리새인의 실제 종교적 위상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해야만 본래의 충격이 회복되는 사례는 그의 방법론의 의의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이다.
그러나 그의 접근은 동시에 불가피한 논쟁을 불러왔다.
예수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도마복음까지 동원한 점은 여전히 의견이 갈리고, 신약 서신서의 어휘가 곧장 후대 교회의 신학적 영향이라고 단정하는 판단 기준에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로버트 펑크가 지적했듯이, 예레미아스는 비유를 예수의 ‘본래 의도를 담은 저장고’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그 과정에서 비유 자체가 지닌 해석적 역동성, 즉 비유가 청중 안에서 의미를 발생시키는 사건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이로써 역사-비평적 접근의 성격이 선명해진다.
그것은 비유 연구에 엄격함과 학문적 기틀을 제공했으나, 텍스트의 문학적 힘과 수사적 효과 즉 비유가 독자와 청중에게 일으키는 감각적 충격, 사유의 흔들림을 온전히 설명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비유의 수사학적 힘, 이야기의 구조, 서사적 에너지에 주목하는 문학적·수사학적 접근이 역사-비평의 빈자리를 메우며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2.
수사학적, 문학적 접근
역사적 재구성의 층위를 면밀히 파헤치며 예수의 본래 목소리를 복원하려던 이전의 학문적 흐름과 달리, 20세기 후반의 연구자들은 비유 자체를 하나의 완결된 문학 작품, 곧 독립적 텍스트로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들의 관심은 더 이상 비유의 기원이나 원형을 되찾는 데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비유가 어떤 언어적 장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떻게 청중의 상상과 사고를 뒤흔드는지를 탐구하는 데로 이동했다.
이러한 전환은 비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바꾸어 놓았다.
즉,
“비유가 본래 무엇을 의미했는가?”라는 기원적 질문에서
“비유는 지금, 독자와 청중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기능적·수사학적 질문으로의 이동이다.
그 전환의 핵심에 서 있었던 로버트 펑크와 존 도미닉 크로산의 이론을 중심으로, 비유 해석학 내부에서 일어난 이 패러다임 변화가 어떤 학문적 필연성과 해석학적 지평을 드러내는지를 면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즉, 비유를 의미의 저장고에서 의미를 발생시키는 장치로 재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이 전환이 비유 읽기의 방식 자체를 어떻게 재구축했는지를 탐색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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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펑크는 예레미아스를 비롯한 역사주의적 전통이 비유를 인지적 진술의 저장고, 곧 과거의 정보가 보관된 아카이브처럼 다루었다고 비판했다. 그들에게 비유는 복원해야 할 메시지가 담긴 그릇이었다. 그러나 펑크의 판단은 달랐다. 비유는 해석자의 손에 의해 열리는 상자라기보다, 청중을 향해 먼저 다가와 그들의 세계를 뒤흔드는 언어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의 첫 번째 핵심 통찰은 비유가 은유적 장치라는 점이다.
펑크에게 비유는 단순한 비교나 직유의 확장판이 아니다. 그것은 익숙한 언어의 질서를 깨뜨리고, 관습적 사고의 경계를 파열시키는 강력한 은유(metaphor)이다. 은유는 일상적 세계 속에 틈을 만들고, 그 틈을 통해 전혀 다른 현실을 보게 하는 시각적 전환을 일으킨다. 비유는 바로 그 틈, 그 전환의 순간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두 번째 통찰은 더욱 결정적이다. 펑크는 비유가 청중의 참여 속에서만 완성된다고 본다.
비유는 독자나 청중이 조용히 받아들여야 하는 설명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고, 이야기 속 위치를 재배치하며, 그들에게 특정한 자리를 맡긴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한다.
비유란 청중이 해석하는 대상이 아니라, 청중을 먼저 해석하는 텍스트이다. 비유는 사람을 이야기의 속으로 옮겨놓는다. 어떤 이는 ‘탕자의 동생’의 위치에, 또 다른 이는 ‘맏아들’의 위치에, 혹은 그 사이 어딘가에 서게 한다.
이렇듯 펑크에게 비유란, 정보의 전달체가 아니라 인간을 움직이고 위치시키는 이야기의 힘, 즉 청중의 세계관을 재조정하는 수사적 사건이다. 비유는 의미를 보관하지 않는다. 비유는 의미를 발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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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도미닉 크로산은 비유의 파괴적이고 전복적인 힘을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탐구한 해석자였다. 그의 관심은 비유가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지가 아니라, 비유가 어떻게 청중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다시 구성하는가라는 질문에 있었다. 크로산에게 비유는 사회적·종교적 통념을 강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통념의 기초를 뿌리째 흔들어버리는 서사적 장치였다.
그의 핵심 개념은 명확하다.
전복의 비유(subversive parable).
비유는 청중이 견고하게 붙들고 있는 ‘상식’을 해체하고,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작동 방식을 다시 묻도록 만드는 일종의 인식적 충격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이다.
유대인 청중에게 ‘선한’(good)이라는 형용사와 ‘사마리아인’이라는 명사의 결합은 애초에 불가능한 조합이었다. 그 자체가 모순이며 불쾌한 충돌이었다. 크로산에 따르면, 만약 이 이야기가 단순히 선행을 권하는 교훈이었다면 설정은 훨씬 쉬웠을 것이다. 강도 만난 사람을 사마리아인으로 두고, 그를 돕는 사람을 유대인으로 만들면 된다. 그러나 예수는 의도적으로 그 반대의 설정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누가 이웃인가’라는 질문을 넘어, 청중의 세계를 구성하는 적대의 질서, 경계의 구조, 정체성의 구분 자체를 문제 삼는 파괴적 서사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전복성은 다른 비유들에서도 반복된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부와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과 동일시하던 통념을 뒤집어 놓고,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는 종교적 경건과 의로움이라는 질서를 재배치하며,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선언되는 인물로 배치한다. 이 비유들은 청중이 안락하게 머물러 있던 가치 체계를, 이야기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재구성한다.
크로산의 사유는 후기로 갈수록 더욱 급진화된다.
그는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비유를 다의적(polyvalent, 바흐찐의 다성성 참조)이며 끊임없이 낯설게 하는 텍스트로 해석한다. 특히 『Raid on the Articulate』에서 그는 롤랑 바르트의 사유를 흡수하여, 비유가 고정된 의미를 전달하는 장르가 아니라— 언어를 흔들고, 해석을 유발하며, 세계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파괴적 언어 행위임을 강조했다.
그의 명제는 이를 정확히 요약한다.
“신화는 세계를 창조하고… 비유는 세계를 전복시킨다.”
즉, 비유란 하나의 중심 메시지로 환원될 수 있는 폐쇄된 텍스트가 아니라, 읽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보도록 강제하는 열린 사건, 의미를 무한히 생성하고 흔드는 언어적 격변의 공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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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본 (주요)학자들의 방법론을 간략하게 비교해 보자.
상호 비교는 주요 학자들 간의 뚜렷한 차이점을 명확히 보여주지만, 20세기 비유 해석의 모든 흐름을 담고 있지는 않다. 논의를 확장하기 위해, 역사와 문학이라는 두 축 외에 비유 해석에 영향을 미친 다른 중요한 접근법들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3.
기타 주요 해석학적 흐름들
20세기 비유 해석의 지형은 단순히 역사적 접근과 문학적 접근이라는 두 축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비유가 인간 실존의 심연에 어떻게 말을 거는가, 그리고 텍스트의 의미 형성 과정에서 독자가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가에 대한 탐구 역시 하나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다. 이 장에서는 비유 해석을 더욱 입체적이고 깊이 있게 만들어 준 이러한 다양한 접근들을 분별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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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적 해석
댄 오토 비아와 게인트 본 존스와 같은 실존주의적 해석자들은 비유를 인간 실존의 근원적 상황을 드러내는 텍스트로 읽었다. 존스는 특히 역사적 접근이 제시한 ‘하나의 요점’ 규칙이 비유의 깊이를 지나치게 제한한다고 비판하며, 비유는 인간 조건 전체를 다루는 전존재적 텍스트라고 주장했다.
그의 해석에서 ‘탕자 비유’는 단순한 회개의 이야기나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고통과 회복을 탐구하는 서사가 된다. 탕자가 경험하는 완전한 유기의 메스꺼움, 익명성과 절망 속에서의 철저한 소외, 그리고 아버지가 입혀주는 옷·신발·반지를 통해 회복되는 인격성의 반환은, 화해·불안·결단이라는 실존적 주제가 어떻게 한 편의 이야기 안에서 응축되는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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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해석학
에른스트 푹스와 게르하르트 에벨링으로 대표되는 신 해석학은 비유를 과거에 정지된 텍스트로 읽지 않는다. 그들에게 비유란 믿음을 일으키고 결단을 요청하는 ‘언어 사건’이다. 즉, 비유는 기록된 문장이 아니라, 듣는 이를 향해 새롭게 발생하는 사건적 언어다.
푹스는 ‘포도원 품꾼 비유’를 해석하며, 청중이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편으로 이끌려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된다”고 말했다. 비유는 단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의 관점을 전환시키고 그의 세계 전체를 변화시키는 현재적 음성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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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반응 비평과 포스트모더니즘
이 흐름은 텍스트의 의미가 저자나 텍스트 자체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해석 행위 속에서 생성된다고 본다.
볼프강 이저의 온건한 독자-반응 이론에서는 텍스트가 독자의 해석을 유도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 스탠리 피시는 더 급진적으로, 의미는 독자가 속한 해석 공동체에 의해 창조된다고 주장했다.
이 관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메리 앤 톨버트의 ‘탕자 비유’에 대한 프로이트적 해석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자아(ego)’, 형을 ‘초자아(superego)’, 동생을 ‘이드(id)’로 해석했다. 이는 비유가 독자의 해석 틀에 따라 전혀 다른 구조로 재편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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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20세기의 비유 해석은 역사적·문학적·실존적·해석학적·독자 중심적 관점이 서로 교차하며 풍성한 지형을 이루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 다양한 접근을 단순히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접근이 비유의 어떤 측면을 밝히고, 어떤 측면을 가리며, 무엇을 분별하게 하는지를 식별하는 일이다.
4.
정리를 마치며...
지금까지 우리는 20세기 예수 비유 해석의 주요 흐름을 역사-비평적 접근과 문학적·수사학적 접근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추적하며 서로의 강점과 한계를 분별해왔다. 아돌프 율리허가 알레고리적 전통을 해체하며 ‘하나의 요점’을 강조한 데서 출발한 역사적 접근은, C. H. 도드와 요아힘 예레미아스를 거치며 예수의 원음성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정교해졌다. 반면, 이러한 역사주의의 집중에 대한 반발로 로버트 펑크와 존 도미닉 크로산은 비유의 문학적·수사학적 힘 즉 청중의 세계관을 뒤흔들고 새로운 현실을 열어 보이는 서사적 에너지에 주목하며 해석학의 또 다른 지평을 열었다.
이 모든 논의를 종합하면, 우리는 조심스레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어떤 단일한 접근도 예수의 모든 비유를 푸는 만능 열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접근은 해석의 무질서를 통제하는 규율을 제공한다. 예수 시대의 사회적·종교적 맥락을 무시하면 비유는 쉽게 낭만적 도덕 우화로 전락한다. 그러나 역사적 접근은 종종 비유 텍스트를 과거의 유물로 고착시키고, 비유가 본래 지닌 언어적 역동성과 문학적 생동감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다.
반대로 문학적 접근은 비유가 청중에게 미치는 충격, 전복성, 상상력의 촉발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비유를 살아 있는 언어 사건으로 되살리는 데 강점을 지닌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이 배제될 때, 그 해석은 텍스트가 아니라 독자의 취향을 반영하는 주관적 확장으로 흐를 위험을 항상 안고 있다.
따라서 비유 해석의 바람직한 방향은 두 방법론을 선택하듯 고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분별해 가며 통합하는 일에 있다. 각 비유의 고유한 성격 즉 구조, 언어, 맥락, 의도된 충격을 세심하게 분별하면서, 역사적 탐구의 엄밀성과 문학적 분석의 통찰력이 서로 보완적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텍스트는 그 풍성함을 드러낸다.
결국 예수의 비유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역사 속 특정한 순간에 깊이 뿌리내린 동시에, 그 순간을 넘어 오늘의 독자에게도 계속 말을 걸어오는 텍스트이다. 앞으로의 비유 연구는 이 양면성을 포착하는 통합적 지혜 즉 과거와 현재, 사건성과 의미 생성의 긴장 속에서 텍스트를 분별하는 지혜를 더욱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비유는 언제나 하나의 해석을 허용하면서 동시에 그 해석을 넘어서는 이야기다.
따라서 해석학의 과제는 비유를 결론 내리는 데 있지 않고, 비유가 계속해서 열어 놓는 세계를 어떻게 분별하며 살아낼 것인가를 묻는 데 있다는 생각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참고도서
⟪HERMENEUTICS⟫ Anthony C. Thiselton, 2009,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