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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 해석이라는 행위

『Hermeneutic』 Anthony Thiselton을 중심으로...

by KEN

이해한다는 것



“너는 왜 그렇게 해석하니?”


몇 해 전 어느 세미나 자리에서였다.

같은 책 한 구절을 두고, 세 명의 참가자가 전혀 다른 해석을 했다.

어떤이는 그것을 “희망의 선언”이라 했고, 다른 이는 “절망의 기록”이라 했다.

멈칫!


같은 문장, 같은 맥락인데 왜 저렇게 다를까?


스크린샷 2025-11-14 오전 7.17.49.png 보는 각도에 따라 코끼리로, 또는 기린으로 보이는 설치 미술. Matthieu Robert-Ortis, 프랑스


오래도록 그 질문에 붙들렸다.


‘그래, 도대체 이해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 질문은 나를 해석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이 글은, 바로 그 “이해를 위한 방법론 고찰”에 대한 짧은 기록이다.



해석학, 그 이해에 관한 철학


‘Hermeneutics(해석학)’은 원래 ‘Hermeneuein(해석하다)’라는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헤르메스(Hermes),

신들의 전령은 인간에게 신의 말을 ‘번역’ 해 주는 존재였다.

즉, 해석학이란 본래부터 ‘다른 세계의 의미를 인간의 언어로 옮기는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해석학은 신의 말만이 아니라 모든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시인의 시어, 역사적 사건, 성서의 문장, 심지어 한 사람의 표정과 침묵까지 —

이 모든 것은 해석의 대상이 된다.


“이해란, 단순히 ‘정보를 아는 것’ 만이 아니라 ‘타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는 시도’이다.”
-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이해는 ‘다리 놓기’다


가다머의 말처럼, 이해는 언제나 ‘나’와 ‘타자’ 사이의 거리에서 시작된다.

거리를 메우는 과정이 바로 해석이다.


어느 날, K가 내게 물었다.

“왜 우리는 과거의 글을 그렇게 집요하게 읽어야 하나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과거의 사람과 대화하기 위해서겠지. 그들이 남긴 단어 안에는,

그들의 시대, 두려움, 꿈이 숨어 있거든.”


우리가 책을 읽을 때, 그것은 단순히 문장을 해독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그 문장을 쓴 사람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몰랐던 자기 모습을 발견한다.

해석학이 ‘이해의 철학’이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객관적’라는 신화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렇게 믿어왔다.

“문장의 의미는 저자 안에 있다. 우리는 그것(객관적 의미)을 정확히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20세기 해석학은 이 단순한 믿음에 질문을 던졌다.


가다머와 리쾨르는 말했다.

“이해란,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창조다.”


독자는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다.

독자는 텍스트를 ‘다시 살려내는 (또 다른) 창조자’다.

같은 책이라도 시대가 바뀌면..., 읽는 사람의 경험이 달라지면...,

그 의미는 다시 태어나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해석의 순환(Hermeneutic Circle)’이다.

읽는 사람은 텍스트를 이해하고, 그 이해는 다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킨다.


그 이해는 다시 '해석의 나선(Hermeneutic Spiral)'을 거치며

더 깊고 높은 차원의 이해를 다져가는 것이다.

결국, 이해란 ‘타자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겠다.



해석학은 '삶의 태도'다


우리는 해석학을 공부할수록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학문은 책 속에만 있지 않다.

모두는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해석한다.

타인의 말을 듣고, 표정을 읽고, 침묵의 의미를 추측한다.


결국, 인간은 해석하는 존재(homo hermeneuticus)다.

해석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고,

이해 없이 우리는 아무와도 연결될 수 없다.


그래서 해석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살아가는 기술(Art)이다.

누군가를 오해했을 때, 내 생각만 옳다고 느껴질 때,

잠시 멈추어 “내가 무엇을 놓쳤을까?”를 묻는 일 —

그것이 해석학의 출발이다.



다시, '이해'의 문 앞에서


가다머는 그의 대표작 『진리와 방법』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해 속에서 살고 있다.”


이 말은 언제 들어도 새롭다.

해석학의 이해는 결국 이 문장에서 출발한다.

이해는 특별한 지식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매일 해석하며 살고, 그 해석이 우리를 만든다.


따라서 해석학을 학습한다는 것은,

세상을 새롭게 ‘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읽기 속에서,

타인을, 세계를, 그리고 나 자신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이해는 ‘열림’이다


이제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그의 단어보다 그 단어가 건너온 세계를 생각한다.

그가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 어떤 두려움을 품고 있는지.

그때서야 비로소 ‘이해된다’는 말이 조금은 진실해진다.


해석학은 우리에게 말한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이해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이해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그래서 이해한다는 것, 해석한다는 것은...


"나의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행위다."



참고도서

⟪HERMENEUTICS⟫ Anthony C. Thiselton, 2009,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참고 동영상

Matthieu Robert-Ortis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 거리에서 촬영한 설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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