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그림을 감상하는 철학자, 미술사학자들의 이해와 논쟁
반 고흐의 그림 “신발(Shoenen)”을 두고 벌인 철학자들의 논쟁
우연히 2009년에 쓴 Scott Horton라는 사람의 글(HARPER’S Magazine)을 읽었다.
대략 내용은 이렇다.
반 고흐가 ‘신발’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그 그림을 보고 마르틴 하이데거, 마이어 샤피로, 자크 데리다를 포함한 6명의 철학자와 미술사가들이 그 구두 그림에 대해 (다른) 의견들을 냈다.
그리고 그 후 이 사건은 현대 철학, 미술, 그리고 사상사에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
이 에피소드가
‘해석학’이라는 주제를 명징하게 설명해 주는 예시로 매우 적절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해석’을 기반으로 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선 이 그림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자.
1886년, 반 고흐는 파리 벼룩시장에서 낡은 구두 한 켤레를 발견한다. 그는 그 구두를 사서 몽마르트르 지구에 있는 자신의 아틀리에로 가져온다. 그가 왜 그 구두를 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단순히 새 구두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는 그 구두를 신어보려고 했지만 발에 맞지 않는다. 대신 그는 그 구두를 그림의 소품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그림을 남긴다.
그 구두는 곧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구두가 되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은 고흐가 그림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는 아니었다. 단지 그림을 본 철학자와 미술사가들이 해석하고 의미 부여한 결과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1930년 암스테르담에서 전시된 이 그림을 본다. 그 경험은 그가 이후의 예술 이론에 대한 에세이를 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예술 작품의 기원』 (1935)에 인용된 그의 이 그림에 대한 내용이다.
낡아 해진 신발 안쪽의 어두운 틈새로부터, 노동자의 고된 발걸음이 우리를 향해 응시한다. 딱딱하고 거칠게 무거운 그 신발에는, 거친 바람이 휩쓰는 광활하고 언제나 똑같은 밭고랑을 따라 느릿하게 걸어온 그녀의 끈질긴 인내가 고스란히 쌓여 있다. 가죽 표면에는 흙의 습기와 기름진 숨결이 배어 있고, 바닥창 아래로는 저녁이 내려앉을 무렵 들길의 외로움이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간다.
신발 속에는 땅의 침묵 어린 부름, 익어가는 곡식이 건네는 조용한 선물, 그리고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경지에서 드러나는 설명할 수 없는 자기 거부의 울림이 스며 있다. 이 도구(신발)에는 빵이 보장될지에 대한 말없이 견디는 불안, 다시 한번 궁핍을 버텨냈다는 말없는 기쁨, 다가올 해산을 앞둔 떨림, 그리고 사위를 에워싸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오한이 배어 있다. 이 도구는 땅에 속하며, 농부 여인의 세계 속에서 보호받는다. 그 보호된 소속감 속에서, 이 도구는 마침내 스스로 안에 머무르는 고요한 쉼으로 솟아오른다.
이는 하이데거만이 쓸 수 있는 언어다. 그의 언어유희는 기이하고 접근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이 신발들을 여러 겹의 의미로 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신발성"의 본질을 개념화하고 제시하는 것으로 봤다.
마이어 샤피로는 1968년 작 『개인적인 사물로서의 정물 』 에서 하이데거가 주제를 잘못 이해했다고 비난한다. 하이데거는 왜 이 신발이 시골 여인의 신발이라고 생각한 걸까? 샤피로는 반 고흐가 남긴 그의 편지와 여러 소품들, 그리고 친구들의 글을 깊이 파고들어 이 신발이 여성의 신발이 아님을 확신한다. 샤피로는 하이데거의 다소 흥분하기 쉬운 상상력이 그를 엉뚱한 길로 인도했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그는 그림에 대해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는다.
반 고흐가 한 농부의 나무 짚신을 그렸을 때, 그는 그것들을 마치 정물화 속 그릇이나 병처럼, 닳지 않은 또렷한 형태와 매끈한 표면을 지닌 사물로 묘사했다. 그러나 뒤에 그린 농부의 가죽 슬리퍼에서는 그 신발을 관람자에게 등을 보인 채 놓아두었다.
반면, 그는 자신의 신발을 바닥 한가운데 외따로 두고, 마치 우리를 응시하는 듯한 자세로 그렸다. 그 신발들은 하나하나의 주름결이 살아 있어, 마치 세월을 견딘 낡은 신발을 정직하게 그려낸 초상화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개별적이고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자크 데리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예상대로 데리다는 샤피로나 하이데거가 신발을 마주한 경험에서 진실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며, 오히려 그 둘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언급한다. 그는 샤피로를 질책하며, 하이데거가 무엇을 하려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다음은 그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또 하나의 선, 또 다른 분리의 체계가 있다. 그것은 액자 속에서 그림으로서 존재하는 작품이다. 액자는 작품을 하나의 부가적인 비-작동(désœuvrement) 상태로 만든다. 그것은 잘라내지만 동시에 다시 꿰매어 붙인다. 보이지 않는 레이스(끈)는 캔버스를 뚫고(마치 ‘찌르기(pointure)’가 종이를 뚫듯) 그 안으로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와 작품을 그것의 주변, 즉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에 다시 꿰매어 붙인다.
그때부터, 이 신발들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그것들이 맨발과, 그리고 다시 붙들려야 할 대상(소유자, 평소의 보유자, 그것을 신고 그것에 의해 지탱되는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신발들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림의 경계 안에 놓여 있지만, 그 경계는 끈의 방식으로 사유되어야 한다.
작품 안의 작품-밖(hors-d’œuvre), 작품 바깥이면서 동시에 작품인 것: 끈은 (역시 짝을 이루는) 구멍들을 통과해 보이지 않는 면으로 지나간다. 그리고 그것이 그 면에서 되돌아올 때, 그것은 가죽의 반대편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캔버스의 반대편에서 나오는가?
금속으로 가장자리가 둘린 구멍들을 통해 지나가는 끈 끝의 철심(prick)은 가죽과 캔버스를 동시에 관통한다.
철학자, 미술사가들의 위와 같은 평론에 대해 고흐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가 그 신발 그림을 통해 진짜로 하고자 했던 말은 무엇일까?
어쩌면 신발은 그저 신발일 뿐이지만, 이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은 신발 한 켤레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은, 해석이 하는 일(작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