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베짱이 Dec 04. 2022

[티코]와 함께 등록금이 사라지다

자동차 대마왕(3)

"형, [티코]가 사라졌어... 혹시 형이 타고 간 건 아니지?.."


"무슨 말이야? 어제 도대체 얼마나 술을 마셨길래 차도 못 찾아~"


회사에서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을 형이 황당하거나 화가 날법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어봤지만 역시나였다.  형은 형 차가 있었기에 단 한 번도 [티코]를 타고 출근하거나 어디를 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형과 자취했던 집 주변을 몇 바퀴 돌고 동네 전체를 돌면서 골목골목을 샅샅이 뒤졌지만 정말 [티코]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전날 밤에 학생회 임원들 회식이 있어서 술을 마셨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해 평소 소주 한, 두 잔이나 맥주 한 병 정도가 최대치였고 더구나 그날은 운전 때문에 한 두 모금 정도를 마신 것이 전부였다. 잠시 골목 어귀에 주저앉아 어젯밤 회식이 끝나고 귀갓길을 되짚어 보던 나는 무릎에 힘이 탁 풀리면서 주저앉았다.


"형, 큰일 났어... [티코] 트렁크 내 007 가방에 학우들 등록금이 500만 원 이상 들어있어..."


다시 전화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내게 형은 큰일이 터졌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차분하게 되물었다.


"확실히 다 찾아본 거 맞지?"


"확실해 형... 다 찾아봤어"


"그럼 일단 가까운 경찰서에 빨리 전화해서 차량 도난신고부터 해"


그렇게 내 몸과 같이 아끼던 [티코]가 증발해 버렸다. 그것도 학우들의 피 같은 등록금까지 함께...




1994년 대학 3학년 때 나는 과 학생회장이었고, 그 당시 총학생회 주관으로 학교를 상대로 등록금 투쟁을 한창 벌이고 있었다. 매년 인상되는 등록금을 동결시키기 위한 학생회의 투쟁 과정에서 등록금을 학교에 수납하지 말고 학생회에서 걷어 그것을 무기로 학교 측과 협상을 하려는 계획이었다. 다행히 학생회 수납 초기였기 때문에 학생회 임원들 몇 명의 등록금만 먼저 받았는데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 임시로 내 007 가방(학사장교후보생들의 검은색 가방)에 넣어 차량 트렁크에 숨겨두었다.


경찰에 바로 신고를 했지만 솔직히 경찰관의 무심한듯한 몇 가지 질문과 막연하게 기다려 보라고 하는 대답에 신뢰가 가지 않았다. 나와 형은 [티코] 보다는 트렁크에 실린 007 가방을 노린 범죄라고 추측했었고 나는 몇 날 며칠 잠을 설치고 입맛도 잃은 채 잃어버린 등록금 액수를 어떻게 채워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 숨 막히는 1주일 정도가 흐르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혹시 OOO 씨 아는 이름인가요?"


나는 너무나 익숙한 이름 OOO을 경찰관에게 듣는 순간 잠시 멍하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이름은 내가 너무도 좋아하여 열정을 바치고 있던 대학 방송국의 아끼는 후배 이름이었던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제 후배인데, 이 사건이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제말 잘 들으세요..."


경찰관은 갑자기 톤 다운시킨 목소리로 또박또박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는데, 그 순간 범인을 잡은 경찰관의 말투가 이런 것이구나 라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그 OOO 씨가 현재 가장 유력한 용의자예요. 하지만 아직 완벽한 증거를 조사 중이니까 혹시 학교에서 마주치더라도 절대 물어보면 안 되고 티도 내지 마세요."


나도 모르게 꼭 그렇게 하겠노라고 맹세하듯 경찰관에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조만간 증거 확보되면 다시 전화할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넋이 나갔던 나는 그 후배와의 며칠 전까지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그 후배는 대학 방송국에서 나를 가장 잘 따르는 후배 중 한 명이었는데 내 자취방에 자주 놀러 와서 잠도 자고 갈 정도로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요 며칠간 학교 방송국에서 얼굴을 본 적도 없었고 또 평소처럼 무심코 자취방에 놀러 온 적도 없었다.

축제 기간이었던 학교로 향한 나는 방송국을 먼저 찾아가서 한 참 동안 후배를 기다려 보았다. 한 참 후에 그 후배가 나타났고 뿔테 안경 위로 상처가 나 있었는데 밴드가 그 상처를 다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안경도 다리가 부러졌는지 테이프로 감은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낯선 후배의 모습을 보면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무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경찰관의 다짐이 떠올라 입을 꾹 다물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다시 그 경찰관에게 전화가 왔다.


"경찰서로 나오시죠. 범인은 OOO 씨가 맞습니다. 그리고 차량도 찾았습니다."


경찰관은 이틀 전과 다르게 밝은 목소리로 내가 기뻐할 선물을 주는 사람처럼 들떠서 얘기하는 듯했다.


나는 처음부터 신뢰하지 않았던 경찰관들에게 속으로만 죄송해하면서 형과 함께 경찰서로 달려갔다.

경찰서에 도착한 우리에게 경찰관 한 명이 사건의 전말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그 후배가 늦은 밤 차량을 훔쳐서 도심 외곽으로 차를 몰다가 어느 산 중턱에서 굴러 떨어졌고, 차량을 버리고 산을 내려오던 중 군부대 초소를 지나쳤는데 밤중에 절뚝거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수상해 초소병의 신원확인으로 전 경찰서에 전달된 것이었다.


형과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순찰차를 타고 사건 현장으로 가서 언덕 밑에 처박혀 있는 [티코]를 보았다. 앞 본넷이 심하게 찌그러지고 문짝, 창문까지 파손된 [티코]를 보니 그 후배가 그 정도 다친 것이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형과 함께 가까스로 트렁크를 열자 등록금이 들어있던 007 가방은 다행히 구석에 처박힌 상태로 멀쩡히 살아있었다.

그제야 나의 첫 애마 [티코]의 중경상이 가슴에 박히며 뒤돌아서는 나를 자꾸 붙잡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첫 애마 [티코]는 나에게 갑자스러운 이별을 고했다.


가방을 껴안고 순찰차를 타고 오면서 경찰관에게 가방에든 등록금에 대한 설명을 하자 진심으로 경찰관도 다행이라면서 경찰서에 가서 돈이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자고 했다.

경찰관들이 너무 고맙고, 믿지 않았던 속마음이 또 미안해서 중국집 음식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며칠 후 학교 방송국으로 그 후배의 부모님이 찾아오셔서 우시며 내 앞에 무릎을 꿇으셨다. 당황한 내게 아버님은 아들의 장래를 위해 검찰에게 '탄원서'를 써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셨다. 나는 누구보다 나를 따르던 후배의 실수가 너무 안타까워 흔쾌히 아버님의 부탁을 들어 '탄원서'를 작성하여 검찰에게 제출했다.

후배는 트렁크에 실린 돈과 자동차를 훔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고, 단순히 운전을 하고 싶었던 호기심에 자주 들렸던 나의 자취방 책상 위에 있던 보조키를 슬며시 주머니에 넣었던 게 이 큰 사건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후배는 내 '탄원서'의 영향으로 감형이 되어 짧은 수감을 끝내고 나왔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 후배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며칠 후 다른 후배에게서 그 후배가 자퇴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가끔 마지막 면회를 갔었을 때 차디찬 수갑을 차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쇠창살 너머로 힘없이 던 후배에게 했었던 말이 떠오른다.


"형은 네가 실수한 거 하나도 생각 안 하니까 신경 쓰지 마... 나오면 형한테 바로와... 맛있는 밥이나 먹자"







                     

이전 02화 [티코]와 동기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