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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베짱이 Dec 03. 2022

[티코]와 동기애

자동차 대마왕(2)

누구나 처음은 설렌다!

처음 써본 만년필, 처음 먹어보는 뷔페 음식, 그리고 첫 방송, 첫 미팅, 첫사랑,.....

그리고 나의 첫 자동차... [티코]


내가 [티코]였으며, [티코]가 나였을 정도로 그 시절의 추억을 꺼내 들면 가슴 뛰는 심장 박동 속에 [티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비가 오는 날이거나 별빛 총총한 날에는 가끔 학교 운동장에 가서 잠을 청하기도 했었다. 한 번은 후배들 둘과 셋이서 비좁은 차 안에서 쪽잠을 잤는데, 다음날 이른 아침 차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보니 한 아저씨가 화가 난 표정으로 빨리 차를 빼라며 소리쳤다. 사실, 전날 늦은 밤에 넓은 운동장에서 후배 둘을 태운 채 운전 연습을 하다가 장난스레 축구골대 안에 차를 주차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이다. 차를 빼면서 우리는 동물원 울타리에 갇힌 원숭이들 마냥 구경거리가 되었는데 운동장 한가운데에는 조기 축구 동호회 아저씨들 20여 명이 우리를 쳐다보면서 웃고 있었다.


[티코]와의 수많은 추억 중에 특히 잊히지 않는 두 개의 사건이 있는데 그중에서 이번 편은 [티코]를 운전한 지 일주일도 안된 왕초보가 계획에도 없던 첫 고속도로 주행기를 꺼내볼까 한다.


[티코]와 실수로 하게 된 첫 고속도로 주행은 첫 만남의 설렘처럼 아직도 기억 속에서 출렁거린다. 같은 과 동기였던 여자 사람이랑 지금의 썸 같은걸 탈 때 그 애매모호한 감정의 끈도 풀어볼 겸해서 그 여사친을 불러내어 드라이브를 떠났다. 뒤쪽 창문에는 삐딱하게 찢은 노트 한 장에 '초보운전'이라 대충 적고 테이프로 더덕더덕 붙이고서는 용감하게 차를 몰았다. 그때 즐겨 듣던 노래를 녹음해둔 테이프를 준비해서 틀고는 따사로운 봄햇살과 감미로운 봄바람을 차 안으로 유인하여 그 친구를 설레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현재 기억 속 추억의 앨범을 조심스레 열어보니 대충 그러한 사진들이 떠오르는데...

1993년 때 이른 봄날의 어느 오후였지 싶다.


그때는 별것도 아닌 이야기로도 깔깔대며 웃다가 숨이 넘어가는 고비를 겪곤 했었던 참으로 순수하고 해맑던 시절이었다. 옆에서 식은땀을 몰래 훔쳐가며 유머까지 짜내는라 내가 어디를 가는 건지도 망각한 채 운전하는 왕초보의 본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여사친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목청이 보여라 웃어대며 또는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약속도 없이 계획도 없이 길을 따라 마냥 달리고 달리다 결국, 고속도로로 향하는 차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톨게이트로 돌진했다. 한 번 들어간 고속도로는 유턴이 없기에 다음 도심으로 빠져나가는 I.C 가 나올 때까지 숙명처럼 앞으로만 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샌가 웃음기가 싹~ 사라진 차 안에는 출발부터 열어둔 뒤쪽 창문에서 아까와는 다른 폭풍 같은 바람이 쉼 없이 쳐들어와 그렇잖아도 잔뜩 긴장한 우리 둘의 대화까지 집어삼켜버렸다. 더구나 뒤쪽 창문에 대충 붙여놓았던 '초보운전' 종이 딱지는 바람에 위쪽 테이프가 떨어져 나갔고 아래쪽만 사력을 다해 매달려서는 춤을 추며 울부짖고 있었다.


[티코]의 창문 수동 손잡이

하지만 달리는 차량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음악을 끄고 더 큰 소리로 대화하는 수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 당시 [티코]의 창문은 자동이 아닌 수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출발할 때 그 좋았던 맑은 하늘은 먹구름에 잡아먹히며 점점 빛을 잃어가더니 빗방울을 숨긴 바람들이 차 안으로 서서히 침투하고 있었다.

씽씽 달리는 고속 차량들의 돌진이 무서워서 속도는 줄곧 60~70km/h를 벗어나지 못했고 고속도로 상식도 없던 터라 갓길에 차를 세우기까지 한참의 고민이 필요했다.

그 시절은 핸드폰도 내비게이션도 없이 그저 지도책자 하나를 옆에 펴놓고 길을 찾던 때라 옆에 앉은 여사친은 웃음을 잃은 채 지도책을 찢을 듯이 넘겨가며 내게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손짓을 하는 인간 내비게이션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땅거미가 질 무렵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우리는 이미 낭만이고 뭐고는 온데간데없이 정신상태는 누더기가 되어있었다.

 

그때 그 여사친과는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단둘이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고, 그냥 과 동기로써 우정을 쌓아가며 남자 친구 같은 동기가 되었다. 그렇게 썸만 타다 끝나게 된 이유가 이 사건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날 '낭만'이란 것은 찾아보기 힘들 만큼 '동기애'가 필요했던 험난한 시간이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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