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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 May 03. 2024

고생 끝에 운수 좋은 날


둘째는 발로 키운다면서요? 그 발은 문어발인가요? 아니면 오징어 다리? 그것도 아니면… 지네발 일지도… 남들은 쉽게만 키운다는 둘째이지만 우리 집 둘째는 너무 귀여운데 또 너무 버겁다. 아기일 때는 너무 순해서 남들에게 치일까 봐 걱정이었건만 그 걱정이 불효가 될까 싶었는지 아이는 자라면서 일명 진상 지수와 개구쟁이 지수를 상승시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밖에 나가면 그 수치가 줄어든다는 것.

날로 개구쟁이 지수가 상승 중이다.

개구쟁이이며 겁쟁이인 아이를 데리고 가기에 치과만큼 어려운 곳이 또 있을까 싶어 치과검진을 미뤘던 탓이었는지 아이의 치아 상태는 처참했다. 고작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신경치료라니. 아이의 떼쓰기만 걱정해서 최대한 미뤘던 치과 검진은 결국 신경치료와 거금의 치료비라는 눈폭탄이 되어 되돌아왔다.


이번에도 문제는 치과진료다. 지난번 치료했던 치아 바로 옆에 또 충치가 생겼다. 양치도 열심히 했건만 왜 시련은 이리 다가오는지. 시간은 더디 가는 것 같지만 잡아놓은 진료 예약 날짜는 참으로 빨리 돌아온다.

어김없이 그날도 다가왔다. 치과까지 거리는 차로는 10분 정도로 가깝지만 문제는 주차다. 아직 초보 딱지를 떼지 못한 나에게 주차는 제일 큰 난관이다. 게다가 대학교 안에 있는 치과라서 개강 시즌이라 더 복잡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다. 버스를 타고 갈까? 다리가 짧아 버스에 오르내리기 힘든 둘째를 데리고 버스를 환승하려고 하니 생각만으로 내 관절이 시려 온다. 그럼 어쩌지… 몸이 불편할 것인가, 마음이 불편할 것인가 고민할 것도 없이 유치원 하원 후 잠깐 시간이 남아 집에 들어온 것이 잘못이었다. 옷만 갈아입고 가볼까 싶었는데, 아이는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누웠다가 장난감을 만졌다가. 진료 시간이 다가와 애타는 어미의 마음을 유치원생이 알리 가 없다. 한없이 느긋한 아이덕에 엄마는 더 초초해지고, 버스냐, 자동차냐의 선택은 쓸데없는 고민거리였다. 시간이 없으므로 초보운전자는 떨리는 마음으로 시동을 걸었다. 병원까지 가는 길은 오케이, 순조롭다. 


아뿔싸.


역시 주차장에 자리가 없다. 한 바퀴, 두 바퀴… 빙빙 돌다가 겨우 세 바퀴째 저 멀리 빈자리를 찾았다. 주차 금지 표지 기둥이 서있지만 어쩔 수 없다. 진료시간 5분 전. 언덕이어서인지, 주차금지 표지 때문인지 자리가 있다. 공간이 여유 있었던 덕분에 그 어렵다는 언덕길 평행주차를 해놓고 뿌듯했다. 비탈길에 주차할 때는 핸들을 꺾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케이! 미션 컴플리트.


주차가 끝나서 마음을 너무 놓았나, 치과에 들어서니 아이가 갑자기 떼를 쓰기 시작한다. 차례가 되었지만 무서워서 안 들어가겠다고 망부석이다. 달래도 보고, 혼도 내보고. 심지어 의사 선생님이 장난감으로 꼬셔도 본다. 

‘장난감 지금 하나 고를래? 치료 잘하면 끝나고 하나 더 줄게!’

그동안 치과 치료 후 받은 전리품들

아니 이런 특혜가 다 있나! 그토록 좋아했던 자동차 장난감도 소용없었다. 진료의자에까지 올라갔던 아이는 입을 벌리지 않았고, 내 속도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결국 진료의자에 내려와 다시 이야기를 해 보았다. 여전히 요지부동. 이럴 때마다 ‘이놈 시키 아빠 닮아서 고집이 세구만!’ 아이를 향했던 화살이 어느 순간 남편을 향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데려가 크게 혼이 나고서야 아이는 쭈뼛쭈뼛 진료실로 향했다. 아이가 유튜브 보는 게 싫긴 하지만 이럴 땐 도움이 되네. 좋아하는 유튜브를 핸드폰으로 재생시켜 놓고 겨우 치료를 시작했다. 치료는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끝났고 휴대폰을 들고 있었던 내 팔의 근육도 한 시간어치만큼 생긴 듯했다. 이제 치료는 무사히 끝났고 집으로 가면 된다. 30분 후에 정수기 기사님이 오시기로 해서 마음이 또 조급해졌다. 


비탈길이라 앞 뒤 공간을 너무 여유 있게 주차해 뒀던 게 문제인가. 내 차 앞 뒤로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것도 촘촘히. 만년 초보인 나는 그 여유 공간이 마치 종이 한 장 같았다. 게다가 주차금지판을 무시하고 주차해 놓은 벌로 앞 유리에는 큼지막한 주차 위반 스티커까지 붙어있다. 다행인 건 부슬부슬 내린 비 덕에 손으로 박박 문지르니 스티커가 떼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해서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시동을 켜면서 동시에 브레이크 위의 엄지발가락에 힘이 빡 들어간다. 살금살금. 핸들을 이리 꺾고, 저리 꺾고… 평행주차가 되어있던 차가 조금씩 빠져나온다… 치료를 끝낸 아이는 보채고, 정수기 기사님 오실 시간은 다가오고, 차는 빼기 어렵고… 땀이 잘 안나는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이 나오는 듯했고, 손이 떨려온다. 집에 가는 길인데 왜 이리 심장은 쿵쾅거리는지… 그러는 찰나 


‘쿵’


하아… 결국 비탈길에 서있던 차가 뒤로 밀려 뒤에 주차되어 있던 차와 의도치 않은 스킨십을 해버렸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생각나는 건 남편뿐. 덜덜 떨면서 전화를 거니 의외로 담담하게 대처 방법을 알려준다. 평소 감정이 없다며 놀렸던 남편이었는데 T성향의 사람과 결혼하길 잘했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남편이 얘기해 준 대로 뒷 차주인에게 연락을 했다. 뒷 차주도 치과에 방문하신 건지… 한숨과 함께 잠시만 기다리란다. 아이는 무슨 일이냐며 본인이 해결도 못할 일에 궁금증이 폭발하였고, 나는 이 상황을 어찌할 줄 몰라 긴장감이 폭발했다. 차주를 기다리는 동안 억겁의 시간 같았다.

@unsplash

이윽고 깔끔한 재킷을 걸친 중년의 신사가 나왔다. 난 허리가 펴질세라 죄송하다고 계속 사과를 했고, 차주는 본인 차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묘한 표정을 지으셨다. 긴장이 역력한 내 표정과, 천둥벌거숭이 같은 우리 둘째를 보셨나. 차주는 차를 다시 한번 더 살피더니 괜찮다며 그냥 가라고 하셨다. 분명 하늘에선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는데 빛이 내리쬐는 것만 같다. 심지어 내가 차를 빼지 못하겠으니 먼저 가시라고 하니, 직접 내 차를 옆으로 빼 주기까지 하셨다.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몇 번이고 인사를 드리니, 쿨하게 손 한번 내 저으시고는 자리를 떠나셨다. 온종일 긴장하고, 둘째와 씨름하며 힘들었던 하루의 모든 피로가 씻겨가는 기분이었다. 항상 운은 내 옆을 비켜간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은인을 만나다니.


그 이후로 갑자기 내 운전 실력이 드라마틱하게 상승하는 변화는 없었다. 삶은 드라마가 아니니까. 하지만 언젠가 꼭 비슷한 일을 겪게 된다면 한 번은 나도 보답해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 우중충한 날씨만큼이나 힘들었던 하루를 밝은 마음으로 끝맺게 해 준 뒷 차주, 신사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건강하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시 길 기원한다.


참으로 각박하고 살기 힘든 요즘이라고는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가 보다. 어느 곳에도 한줄기 빛은 있으니까. 오늘이야말로 나에게 참으로 운수 좋은 날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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