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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린 Jan 16. 2023

성평등주의자의 임신

임신, 출산과 육아의 여정에서 너와 나의 역할

임신 19주 차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배도 약간 나와 티가 조금씩 나기 시작한다. 


활자중독자답게 벌써 육아서를 못해도 10권은 읽은 것 같다. 읽으면서 얻은 것은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 잃어가는 것은 지난 10년간 견고하게 쌓아 올린 나의 성평등 철학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오랜 시간 동안 일을 하면서 나는 여자와 남자는 동등하며, 사회적으로 특정 성별에게 더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일을 성별을 뒤바꾼다고 해도 완벽하게 수행 가능하다는 믿음을 쌓아왔다. 하지만 내가 여태껏 읽어온 육아서는 100이면 100 -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 엄마와 아빠는 다르다고 말한다. 우선 임신 자체를 여자만 할 수 있으며, 아이가 태어나고 첫 몇 달은 남자는 거의 소용이 없을 정도로 아이와 여자(엄마)는 붙어지내게 된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 대체 가능한 존재가 전혀 아니었다. 젖을 생산하고 모성 본능을 일으키는 몸의 명령이다.


나의 이 철학이 뿌리부터 흔들리며 찾아드는 건 해소하기 어려운 좌절이었다. 앞으로 육아 휴직으로 보낼 6개월 동안, 나는 회사에 나가지 않을 것이며 24시간 동안 아이와 붙어 하루에도 몇 번씩 밥을 주고 기저귀를 갈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남편은, 어느 정도의 변화는 있겠지만 회사를 다니고 운동 등 취미 생활을 하는, 여태까지 일궈온 일상을 전반적으로 유지하게 될 것이다.


자의식과 자존심이 강하고 성취에 있어서는 질투심도 강한 나는 그 6개월 동안 내가 느끼게 될 피곤 섞인 질투, 허탈함, 그리고 분노가 눈에 선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새 이 모든 예습된 (?) 부정적인 감정들을 지난 몇 주간 남편에게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당신은 아이가 태어나면 이것도 저것도 해야 한다, 나의 일상은 180도 변하는데 당신의 일상에는 아무 변화도 없는 것은 불공평하니 당신도 이 정도의 희생을 해 나의 자유시간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라며 계속해서 그에게 스트레스를 주입했다. 아직 아이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여느 때처럼 나의 요구사항을 다다다다 쏟아내던 어제, 남편이 혹시 자기가 스트레스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쩔 거냐고 나에게 물었다. 요새 안 그래도 가슴 통증이 있었다며, 자신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을 자기가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그는 예전에도 공황 발작을 겪은 적이 있다. 남편이 스트레스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나는 그동안 나만 생각하고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이 나를 덮치자 그 순간 아차 싶었다.


나는 그가 나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까 봐, 정확히 주입하지 않으면 아기가 태어나고 그를 미워하게 될까 봐 무서워서 계속해서 말을 한 건데, 그는 사실 다 이해했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의 목소리는 크고, 내가 예단하는 것보다 남편의 기억력과 이해력은 뛰어나다. 심지어 내가 지나가면서 하고 잊은 이야기도 그는 다 기억한다. 나의 말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무게가 실려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내가 내 마음 하나 편하자고 생각 없이 내뱉은 모든 말들이 남편의 마음에 잘 떼어지지 않고, 떼어져도 지저분한 풀자국을 남기는 싸구려 포스트잇처럼 찰싹 붙어버린다는 것이다. 


과잉한 나의 자의식을 내려놓기로 결심한다. 


여자와 남자의 생물학적 차이, 그리고 그에 따르는 어쩔 수 없는 역할의 차이는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생물학적으로는 동등하지 않을지 몰라도, 나와 그는 앞으로 인생의 크고 작은 파도를 함께 헤쳐나갈 동등한 파트너이다. 


전업주부, 내조 등의 이름을 굳이 붙일 필요 없이 지금은 그에게 정서적 지지가 필요한 때이고, 감사하게도 나는 그를 도울 수 있는 마음적 신체적 여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고 휴직 기간 동안 나는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내가 더 잘 해낼 수 있는, 더 "자연스러운" 역할을 택할 것이며, 그는 그가 가능한 선 안에서 서포트를 할 것이다. 그 이후에도 꼭 육아휴직이 아니라도 그가 일하고 내가 쉴 때도 있을 것이며, 또 내가 일하고 그가 쉴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인생이라는 항해를 함께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긴 인생에서 6개월은 너무도 짧고,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로 만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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