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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여유 Jul 06. 2024

자유로이 만나는 시(詩)

시의 묘미를 알려 준 황유원 시인




도서관이 달라졌다. 책을 빌려주는 공간에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장소로 역할이 확장되었다. 언젠가 사서 선생님과 대화를 나눈 적 있다. 그에 따르면 지역 도서관들은 적극적으로 주민들의 삶 속에 들어가 문화 교류를 이끄는 추세라고 했다. 나 역시 우연히 알게 된 도서관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는데, 예상보다 더욱 알찬 시간을 보냈다. 그 이후로 가끔 도서관 사이트에 들어가 진행 중인 프로그램을 관심 있게 살핀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메인 화면에 걸린 새로운 프로그램 배너가 눈에 들어왔다.


‘황유원 시인과의 만남 : 시 낭송 및 생각 나누기’ 


요즘 시를 알아가는 재미에 빠진 나에게 시인과의 만남이란 문구는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포털 사이트 검색 창에 시인 이름을 넣어보았다. 

번역가이자 시인, 언어의 마술사 같은 수식어 아래 시인이 쓴 시집 목록이 나열되어 있었다. 포털 사이트에 제일 먼저 보이는 책은 대부분 신간이거나 작가의 대표작이다. 목록 최상단에 위치하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의 시집, '하얀 사슴 연못'에 눈길이 갔다. '시인과의 만남' 참여자들은 시 한편씩을 낭송해야 하므로 도서관에서 시집을 빌려 집으로 왔다. 



사람마다 책 읽는 방법은 제각각이겠지만, 나는 보통 목차를 훑은 후 순서대로 읽는다. 유일하게 손 가는 대로 보는 책은 시집뿐이다. 시집 '하얀 사슴 연못'도 그랬다. 제일 첫 시부터가 아니라, 제목이 끌리는 시부터 펼쳤다.



하얀 사슴 연못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얀

사슴이 살고 있다


이곳의 사슴 다 잡아들여도 매해 연말이면 하늘에서 사슴이

눈처럼 내려와 이듬해 다시

번성하곤 했다는데


이제 하얀 사슴은 백록담이라는 말

속에만 살고

벌써 백 년째 이곳은 지용의 <백록담> 표지에서

사슴 모두 뛰쳐나가고 남은

빈자리 같아


그래도 이곳의 옛 선인들이 백록으로 담근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백록은 어쩌면 동물이 아니라

기운에 가깝고

뛰어다니기보다는 바람을 타고 퍼지는 것에 가까워

백록담,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백록담> 표지 밖에서 표지 안으로

돌아오는 것도 같고


하얀 사슴 몇 마리가 백록담 위를 찬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은

청량해진다

연못에 잠시 생각의 뿔을 담갔다

빼기라도 한 것처럼


사실 지용이 <백록담>을 썼을 때 사슴은 이미 여기 없었다

표지의 사슴 두 마리는 없는 사슴이었고

길진섭의 그림은 그저 상상화일 뿐이었는데

어인 일일까

백록담,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살이 오른 사슴들이

빈 표지 같은 내 가슴속으로 다시 뛰어들어와

마실 물을 찾는다

놀랍게도 물은 늘

그곳에 있다




이 시는 정지용 시인의 <백록담>을 오마주 했다는 해설을 읽었다. 백록담이란 말을 수도 없이 듣고 뱉었으면서 왜 그 뜻을 생각해 본 적 없었을까. 하얀 사슴 연못이라는 시어로 내 마음에 들어온 백록담은 새롭다. 하얀/사슴/연못이라는 익숙한 세 단어를 중심으로 탄생된 시의 이미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사전에는 훌륭한 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오만 가지 단어들이 다 실려 있지만, 그 안에는 단 한 편의 시도 들어 있지 않다.'라고 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브루노 무나리의 말이 떠오르던 순간이다.



시인과의 만남 당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빨리 걸으려고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가 10분 만에 후회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감성이 피어오르려 할 때쯤 메시 운동화 사이로 빗물이 들어와 양말이 조금씩 젖어들어갔다. 시집에서 읽은 시를 떠올리며 걷겠다던 야심 찬 계획은 실패했다. 물웅덩이를 피해 조심조심 걸었더니 보통 때보다 늦어져 버렸다. 결국 정각이 되어서야 도서관에 도착했고, 황유원 시인과 참석자들은 이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만남은 도서관 시(詩) 동아리에서 주최한 자리였다. 매주 2시간씩 함께 시를 읽고 감상을 나눈다는 이 모임은 몇 년 간 꾸준히 이어져 왔다고 했다. 시에 진심인 분들이 모인 자리여서 그런지 시 낭독과 함께 심도 있는 감상평이 이어졌다.



시가 낭독될 때마다 나는 시인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 독서 후 감상을 노트에 적어 내려 갈 때면 늘 궁금했다. 작가의 의도대로 해석한 걸까? 시를 접하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이 암호 같은 말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이 사소한 단어에 이런 의미가 정말 들어가 있는 건지, 혹은 내가 지나치게 과장된 해석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옆에 작가가 있다면 붙잡고 물어보고 싶던 적이 많았다. 시인과의 만남은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그동안의 의문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이런 궁금증은 나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시인이 대학원 재학 시절 운동장에 앉아있을 때 보이는 그대로 썼다는 시를 누군가 읽었을 때, 참석자들은 시인에게 물었다. '이 시구는 이런 의미인가요?', '이 단어는 00을 상징하는 건가요?' 하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시인은 말했다.


"저는 들리는 것을 써요. 그렇다고 아무거나 쓰는 건 아니죠. 나에게 다가온 것을 씁니다. 저는 이래서 시가 좋아요. 동작만 있고 의미가 확정되지 않는 것이 시의 묘미라고 생각해요. 시는 단어의 조합이죠. 이런 시를 독자가 재해석하는 거예요. 다양성이 생기는 거죠." 



시인은 누군가의 감상평을 들을 때 한 번도 맞다, 아니다로 대답하지 않았다. 새로운 의미로 해석된다는 사실이 기쁘다고 했다. '시의 묘미'라는 말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언어로 그려낸 동작에 누구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사람마다 자신만의 해석으로 시를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홀가분한 기분까지 들었다. 십자말풀이처럼 정해진 정답이 없기에 시도, 시를 읽는 사람도 자유롭다. 

마지막으로 내가 낭송했던 시를 마음속으로 다시 읊어본다.

그저 자유로이, 애처로운 사슴을 떠올리며.



에스컬레이터


미국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에서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사슴이 병원으로

뛰어 들어갔다는 뉴스를 보았다

공개된 CCTV 영상에서 사슴은 재빨리 병원으로 뛰어

들어가자마자 로비에서 한번 주욱

미끄러지더니

다시 일어나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올라갔다

당연하게도(하마터면 ‘하필이면’

이라고 말한 뻔했다) 에스컬레이터는

올라가는 게 아니라 내려오던 것이었고

세상에서는 늘 그런 일들만이 당연하고

교통사고를 당한 사슴은 내려오던 에스컬레이터에 난생처음 뛰어올라

말 그대로 죽을힘을 다해 저 높은 곳을 향해

한발 한발 뛰어

올라갔을 텐데

당장은 어디로도 뛰어 올라갈 일 없는 나는

노트북을 덮고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

사슴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뛰어 올라갔을

그 에스컬레이터를 생각한다

가만히 있으면 다시 내려가서

위층으로 가려면 계속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에스컬레이터를 생각하고

어쩌면 천국은 결국

고작 이층에 있는 것이지만

때로는 이층까지 가기도

그토록 힘들다는 것을 생각한다

천국이 알아서 내려와주면 좋으련만

천국은 저 위에 있어서 우리는 자꾸

올라가다 미끄러지기만 한다는 것을

결국 제압되어 안락사에 이른 후에도

천국은 내려올 생각이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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