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그해 삼척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여유 Jan 20. 2023

시골길에서 만난 당신

낯선 길에서 마주한 익숙한 얼굴

      



“이것 봐, 너무 깜깜해서 사람이 갑자기 나와도 모르겠다.”     

 

강원도 시골길을 운전하던 남편이 말했다. 우리는 3주간의 장기 여행을 위해 강원도 삼척으로 가고 있었다. 남편의 말에 뒷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동차는 아주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느린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차 안에서 깜깜한 시골길을 한참 바라보던 나는 그 순간 잊고 있던 어린 시절 옛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어스름한 달빛과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한 늦은 밤, 네 식구를 태운 자동차 한 대가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인적 드문 시골길을 달린다. 그리고 저 멀리 아주 작고 희미한 불빛 하나가 흔들린다. 가까워질수록 그 불빛은 더욱 또렷해진다. 누군가 그 길 한편에 쭈그리고 앉아 손전등을 연신 흔들어댄다.


할머니였다.

작고 낡은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우리를 기다리던 할머니였다. 명절이 되면 아버지는 차가 막히는 시간을 피해 저녁이 돼서야 할머니가 계신 강원도로 출발하곤 했다. 그래서 차가 막히지 않으면 자정쯤, 만약 차가 막히면 새벽에 강원도에 도착하곤 했다. 서울 사는 작은아들이 온다는 소식에 할머니는 한 시간 전부터 길가에 나와 이제나저제나 우리를 기다리던 것이었다.


할머니는 차가 들어오는 소리에 굳어진 허리와 무릎을 펴며 천천히 일어나 잘 왔다고 연신 우리 등을 쓰다듬었다. 투박하지만 따뜻하고, 주름졌지만 사랑이 느껴지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가던 기억이 난다. 손녀딸이 온다고 읍내 장에 나가 분홍색 플라스틱 리본과 노란 구슬로 꿰어진 목걸이를 사다 놓으셨던 할머니의 애틋한 그 마음이 나는 너무나도 그리워졌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 갑작스러운 사고로 할아버지와 사별하시고 삼 형제를 홀로 키워내셨다. 당시 시어머니였던 나의 증조할머니는 장남을 잃은 허망함을 모진 시집살이로 표출했고 그때마다 할머니는 어린 삼 형제를 떠올리며 견뎌냈다고 하셨다. 길고도 험했던 인생길의 눈물과 회한은 자식들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되어 할머니의 삶을 채워나갔다. 할머니의 인생은 그렇게 삼 형제로 가득 차 있었다. 


대학을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시골에 계신 큰어머니와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할머니가 자꾸 길에서 빈 병을 주워 장롱에 모아놓는다는 것이다. 큰어머니가 버리면 또다시 주워오기를 반복해서 다툼이 생긴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할머니를 서울로 모셔와 검사를 진행했고 평소 몹쓸 병이라고 말씀하시던 치매에 걸리신 것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시계는 과거를 향하고 있었다. 가난한 집의 가장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그 시절 돈으로 바꿔주던 빈 병이 길에 버려져 있는 것을 할머니는 지나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할머니의 인생길을 밝히던 가로등 불빛은 주인의 세월에 따라 하나둘씩 꺼져갔고 마지막엔 큰아들만 겨우 알아보는 작고 희미한 불씨만 남겨졌다.


나는 결혼을 앞두고 지금의 남편과 할머니께 추석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했었다. 하지만 추석이 오기 며칠 전에 할머니는 하늘로 먼 여행을 떠나셨다. 이 세상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꽃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우리 할머니는, 매일 밤 고아와도 같은 삼 형제를 지켜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던 할머니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셨다. 할머니의 상여는 어린 시절 우리가 마주했던 굴곡진 시골길 어귀를 지나 가을 코스모스가 활짝 핀 꽃길을 향했다. 나는 그 모습이 마치 할머니의 일생을 보여주는 것 같아 참 많이 울었다.





할머니가 사주신 플라스틱 목걸이를 차고 시골집을 뛰어다니던 어린 소녀는 어느새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같은 여자로서, 엄마로서 할머니가 걸었던 인생길의 고단함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안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버렸던 한 여자의 강인하고 헌신적인 삶은 그녀가 어머니였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시골길을 지나다 보면 나는 그 길 끝에 웃으며 앉아있는 할머니를 만나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다시금 주름진 그 손을 잡고 주황빛 불이 켜진 마당으로 함께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먼 훗날 할머니를 만나면 이야기해야겠다. 삼 형제와 그들의 가족은 할머니를 아주 오랫동안 그리워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간절히 바란다. 그녀의 인생길이 고단했을지언정 외롭진 않았던 길이었기를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삼척라이프의 시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