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혹한 관계

by 일상탐색자 메리다






"종신보험 아직 없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가입해야 보험료가 저렴해~ 이거 하나 들어놓으면 다른 거 다~ 필요 없어."


평소 내가 일해보고 싶었던 직종에 자리가 나왔고, 나는 여자 FC에게 알바를 그만두겠다고 얘기했다. 며칠 후, 여자 FC는 은근슬쩍 보험 얘기를 꺼냈다.


비서를 하는 몇 개월동안 FC에게서 보험 상품 설명은 처음 들어봤다. 실손, 생명, 화재 보험도 구분하지 못했고, 나를 고용한 FC들이 무엇을 영업해서 그렇게 돈을 펑펑 써대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나를 붙잡고 상품 설명을 했다. 마치 지금 당장 가입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처럼. 왜 하필 지금?


'촉'이 왔다. 같은 사무실에 있던 다른 비서들도 이미 그들 고용주 FC의 고객이 되었는지 모른다. 다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보다 더 오래 근무했던 비서들은 계약을 종용받았을 거라 짐작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으레 겪는 관행처럼 FC가 설계해 주는 대로 순순히 계약자 란에 서명을 했다.


마지막 알바하는 날까지 팀 분위기는 훈훈했다. 나의 고용주 FC들 뿐만 아니라 워크숍에서 술잔을 부딪혔던 다른 FC들도 다른 데 가서도 잘 될 거다,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해라 등등 덕담을 쏟아냈다. 미래를 축복하는 좋은 말을 듣는데도 마음 한구석은 불편했다. 피고용인으로 만나서 계약자가 되어 떠나는 것이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껄끄러웠다. 그렇지만 계약 철회를 하기엔 그동안 맺어온 관계도 있고, 갖고 있으면 먼 훗날 도움이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알바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 때 여자 FC에게서 두어 번 연락이 왔다. 대화 내용은 그저 그런 안부 연락이었다. 통화 끝에는 얼굴 보자, 놀러 와라, 밥 한 번 먹자 했지만 한 번도 진짜 만나기 위해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설마 했던 그들의 속내가 뻔히 보였다. 그들은 '고객관리'로 나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약 시점부터 2~3개월간 계약이 잘 유지돼야 FC에게 수수료가 많이 떨어진다고 했다. 그 사이에 고객이 계약을 철회하면 수수료 및 운영비를 FC가 다 토해내야 한다고 했다. 계약 1건당 얼마를 받는지 정확히 아는 바는 없지만 계약 고객에게 여러 서비스와 선물이 가는 것은 그들이 그만한 선물을 하고도 이윤이 남으니 하는 것이리라.


계약한 지 2년이 지나면 그 이후의 계약 상태는 FC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다. 그때 해약해도 FC는 모든 뽑아먹을 수수료를 다 뽑아먹은 상태고 본사에서도 더 이상의 페널티가 없다고 했다. 모든 책임은 고객이 떠안는다. 24개월 동안 납입한 보험료를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니 고객 입장에서는 해약이 망설여질 수밖에.


다른 회사에 입사한 후 2개월동안 7만 원 정도였던 보험료를 잘 납부했다. 그러다 나쁜 사장놈 때문에 월급이 밀렸을 때는 보험료도 함께 밀렸다. 보험료가 납부되지 않자 곧바로 여자 FC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 있냐고. 나는 회사에서 월급이 나오지 않는다고 힘겹게 얘기했고, FC는 참 힘들겠다 위로하는 말투였다. 그래도 보험이 실효되면 미래를 내다봤을 때 굉장한 손해이니 월급 문제는 잘 해결되길 바란다고 했다.


며칠 후, 나는 고민 끝에 보험을 해약했다. 밀린 월급을 언제 다 받을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후로 두 FC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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