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을의 생활' - 못다한 이야기

by 일상탐색자 메리다








1999년 12월 어느 날,


분식집에서 알바를 하는 동안 배달맨이 바꼈다. 내가 알바를 시작했을 때 먼저 있었던 배달맨은 엄청 무뚝뚝한 아저씨(고3 여학생의 시선으로 20대 후반부터는 다 아저씨)였는데, 그는 머지않아 그만두고 곧 다른 배달맨이 들어왔다.


20대 초반, 보통 키, 마른 체형, 작은 얼굴, 동그란 뿔테 안경, 츄리닝 복장. 외모는 껄렁해 보였지만 보기보다 꽤나 성실했던 오빠였다.(고3의 시선이란... 쩝!)


그 오빠는 쉴 틈 없이 배달을 하면서도 가게에서 유일한 10대였던 나를 많이 도와줬다. 생산 과정 중 들러붙은 냉면, 쫄면 찢기, 산더미같은 스티로폼 포장 용기 정리하기, 스케줄표에 짜여진 찌든때 청소(6화 '프로페셔널 여인의 프로페셔널함' 참조)를 본인의 일처럼 같이 했고, 2개월을 못 채운 알바 기간 동안 썸 아닌 썸을 타게 되었는데(썸이라고 생각한건 나 혼자만이었나..),


그 오빠와의 첫 데이트(였다고 생각하는건 나 혼자만이었나..)에서 시내의 다른 지점 분식집에서 만났고, 4화 '분식 맛집'에서 잠시 언급했다시피 내가 일했던 가게와 사뭇 다른 풍미의 분식을 먹어서 실망했고, 실망한 분식과 함께 오빠에게 나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라는걸 확인했다.


우리의 관계는 여기까지인걸 되뇌이며 쓰라린 마음을 숨긴채 알바를 이어갔지만 여전히 나에겐 심쿵 포인트가 있었다.


직원 식사 시간. 따로 쉬는 시간 없이 손님을 응대하며 재빠르게 점심을 먹어야 했던터라 비빔밥, 쫄면같이 모든 재료를 한 그릇에 넣고 비벼 먹어야 하는 메뉴를 선택했는데, 나는 아무리 휘저어도 잘 비비지 못했다.


열심히 섞고 뒤집어봐도 밥과 야채, 고추장 양념이 조화되지 못하고 따로 분리되버려서 더 비빌까, 그냥 대충 먹을까를 고민하고 있으면 그 오빠는 본인 그릇을 한쪽에 밀어놓고 내 그릇을 가져가서 맛깔스럽게 비벼줬는데, 나는 아직도 그 오빠만큼의 비빔 실력자를 만나지 못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빠라고 불러본 사람.


나 혼자만의 감정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던 한 때다.








2000년 여름 어느 날,


단기 알바로 설문조사 알바를 지원했다.


그때는 동네, 이름, 집 전화번호(집전화라니!)가 적힌 두꺼운 전화번호부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설문 응답을 요청했는데, 주제는 정치적인 이슈였던걸로 기억한다.


알바비는 많지 않았지만 앉아서 전화만 하는 일이라서 편할 것 같았고, 하루나 이틀만 해도 되는 단기 알바라서 별 고민없이 지원했다.


회사측에서도 여성이고 대학생이라서 일사천리로 면접을 통과시키고 곧바로 실전에 투입했지만, 그 경험은 나의 전화 공포증을 새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전화를 걸어 "00 설문조사입니다"라고 말하면 바로 뚝 끊어 버리는 사람, 정치 이슈에 대한 본인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사람, 기분 나쁨을 있는대로 표현하는 사람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전화로 옥신각신하다보면 진이 빠져 더이상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설문조사 알바는 하루만에 끝이 났다.








2007년 봄,


20대엔 강남이 참말로 좋았다.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거리를 걷다보면 나도 절로 강남 멋쟁이가 될 것 같았다.


퇴근 후엔 역삼역에서 강남역까지 걸어갔다.


색색의 화려한 네온사인, 쿵쿵 음악 소리, 세련된 옷차림의 사람들, 근사한 음식 냄새.


어느 가게든 선뜻 들어가기 어려운 주머니 사정이었지만 그 거리에 서있는 것 만으로도 내 경제 신분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한참동안 강남역 근처를 걷고나서야 저녁 식사때를 놓쳐 허기진 속으로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탄다.


한강을 건너 강북으로 향하는 지하철 2호선 안에서 나는 늘 암울했다.


화려한 네온사인도, 커다란 음악 소리도 없는, 붉은 노을과 다닥다닥 등을 맞대고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을 배경으로 개가 컹컹 짖어대는 좁디좁은 골목을 지나 반계단을 올라간다.


옆집인지 앞집인지 뒷집인지 분간이 잘 안되는 말소리, 다투는 소리, 아이의 우는 소리, 텔레비전 소리가 계단을 오르는 동안의 BGM이다.


엄지손가락만한 굵은 열쇠를 꽂고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지하철을 타기 전까지의 화려하게 반짝이던 기운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무채색의 나로 돌아간다.


냉장고를 열어 먹다남은 김치찌개를 데우고, 도시락 김을 뜯어 밥상을 차려 주린 배를 채운다.


왼손으로는 하이힐을 신고 걸어 욱신거리는 발바닥을 주무른다.


다음날 아침이면 강북에서 강남으로 출근하는 짙은색 정장 무더기들에 섞여 반짝반짝 빛나는 고층 빌딩으로 흡수되듯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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