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회의를 주재할 왕이 없는, 이상한 어전회의가 열렸다. 여드레 전 부임한 일본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주둔하던 일본군 2만5천8백 명을 덕수궁 주변에 배치해 놓고 대신들을 협박해 어전회의를 열었지만, 정작 회의를 주재할 고종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이토 대사는 부임 바로 다음 날 천황의 친서를 전달하려 했지만 고종은 거절했다. 닷새 뒤 협약안을 전달하려 했지만 역시 고종은 거부했다. 바로 그 날 17일, 이토가 3번째 알현을 청했지만, 고종은 몸이 불편하다는 구실로 자리를 피했다. 이토는 회의에 참석시킨 대신을 한 명씩 윽박질러 다음 날 새벽에 과반수 동의를 받아냈다. 을사오적이 을사조약을 통과시킨 것이다.
고종은 인후염을 핑계로 이토의 알현을 피했다. 1905년 을사년(乙巳年)에 그야말로 ‘을씨년’스러운 늦가을 추위에 잘 어울리는 멋진 핑계였다. 정말 인후염이었을까? 조약은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서명했다. 고종의 국새는 찍히지 않았다. 그래서 을사조약이 아니라, 억지로 맺은 ‘을사늑약’(乙巳勒約)이다.
인후염은 회의나 약속에서 빠질 때 꽤 그럴듯한 구실이 된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목에 염증이 생기는 호흡기질환이다. 쉽게 말해 감기다. 곁에 있으면 옮을 수 있기 때문에, 말리기 쉽지 않은 멋진 핑계거리다. 하지만 회의에서 빠졌을 때 져야 할 책임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이토는 고종 대신 회의를 주재하며, 고종이 몸이 아파 각료회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했다면서 늑약을 밀어붙였다.
고종은 12살부터 55살까지, 조선 말기에 43년간(1864~1907) 임금으로 지냈다. 처음 10년은 아버지(흥선대원군)가 휘두르는 ‘붓대’를 따랐다가 그 뒤로는 부인(명성왕후 민비)이 두른 ‘치마’에 자주 휘둘렸다. 바깥(세계)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집안(국내)에서 아버지와 아내의 눈치만 보며 지낸 탓이다. 고종은 갑자기 바뀐 환경에 필요한 ‘면역력’을 기르지 못했다.
하필 때는 급변하는 세계적인 ‘환절기’였다.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이 떠올랐다. 유럽은 아프리카, 서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에 이어 동북아까지 뻗쳐왔다.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남하하고,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 서진했다. 세계지도를 놓고 열강들이 가위바위보를 하던 시기였다. 이런 세계적인 ‘환절기’에 준비 못한 갑작스런 개방으로, 조선이 ‘인후염’에 걸렸을까?
감기 같은 상기도(上氣道. 코와 목) 감염이 길어지면, 어느 순간 폐렴 같은 하기도(下氣道. 기관지와 허파) 감염으로 깊어질 수 있다. 허파에 물이 차면서 노인처럼 몸이 약한 경우 삼킴곤란과 호흡곤란으로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가장 흔한 사망 경로다. 별다른 질병 없이 자연스러운 노화로 몸이 약해지면서 노환으로 자연사하는 것과는 다른 경로다.
고종이 다스린 조선 말기가 그랬다. 운요호사건(1875), 강화도조약(1876), 임오군란(1882), 동학농민운동(1884), 갑신정변(1884), 갑오경장(1894), 을미사변(1895)처럼 나라를 뒤흔드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중증 폐렴처럼 깊은 고름으로 터져 나왔다. 영조와 정조 이후 쇠락한 왕조는 급변하는 ‘세계적인 환절기’에 빠른 속도로 ‘병세’가 악화됐다. 인후염 같은 가벼운 감기로 넘겨버릴 단계가 결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