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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오 Oct 28. 2022

지식인을 위한 변명’으로 숨가빴던 사르트르

    눈이 사팔뜨기면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가? 장폴 사르트르는 4살 때 독감을 앓고 오른 눈 각막이 하얗게 변해 시력을 거의 잃으면서 사팔뜨기가 됐다. ‘삐딱한 시선’은 사물보다 책을 먼저 보았다. 한 살에 아버지가 죽고 외할아버지 서재에 파묻혀 살면서 특이한 시선을 갖게 됐다. 백과사전을 먼저 보고, 사물은 나중에 알게 됐다. ‘꽃’이라는 관념을 먼저 알고, ‘꽃’이라는 실물을 보게 됐다는 이야기다.


    ‘삐딱한 시선’은 ‘소유’를 부정했다. 사유재산을 반대하니 카페에서 일하고 식당에서 먹고 여관에서 잤다. 여자도 소유하지 않기 위해 결혼도 계약하고, 아이도 갖지 않았다. 노벨상도 거절했다. 노벨상이 ‘소유’를 이념으로 하는 자본주의에 편중됐다는 이유다. 내 인생도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던져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삐딱한 시선’이다. 


    ‘무소유’의 철학자가 딱 한 가지 소유하고 싶은 게 있었다. 담배다. ‘흡연은 파괴적인 소유 행위’라는 것이다. “담배를 피움으로써 세계가 내 속으로 흡입될 때 나는 세상을 단지 보고 듣고 만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소유하게 된다”. 다른 건 다 포기하더라도 담배만 ‘소유’하면 흡연을 통해 세상을 다 ‘소유’할 수 있게 된다는 논리다. 


    사르트르는 ‘철학계의 제임스 딘’이라 불릴 정도로 반항아 같은 이미지로 인기를 끌었다. 반항아의 무기는 삐딱하게 문 담배였다. 그의 사진은 대개 담배를 물거나 피우고 있는 모습이다. ‘담배 없는 삶은 살 가치가 거의 없다’고 단언하던 그였다. 하루 평균 2갑을 태웠으니 손에서 담배가 떨어질 때가 없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그를 흉내내며 ‘실존주의의 담배’를 피우곤 했다. 


    그렇게 담배를 많이 피우면 ‘구토’가 나는 게 당연할 것이다. 소설 ‘구토’의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은 바닷가에서 물수제비를 뜨려고 돌멩이를 들었다가 불쾌한 느낌에 깜짝 놀랐다. 종이쪽지를 줍다가, 거울을 보다가, 친구의 멜빵을 보다가 구토를 느꼈다. 원인을 찾아 방황하던 주인공은 어느 공원에서 마로니에 뿌리를 보고 깨달았다. 이유도 없이 존재하는 사물을 보면 구토가 난다는 것이다. 


    담배를 피우다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끼면 불편할까? 사르트르에게 타인의 시선은 지옥의 형벌 같은 것이었다. 희곡 ‘닫힌 방’에서 지옥으로 간 3명은 창문도 거울도 없는 방에 갇히는 형벌을 받는다. 자신의 모습은 타인의 시선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형벌일까? 그래서 ‘타인은 지옥이다’(Hell is - Other People)는 것이다. 


    ‘우리 모습은 우리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We are our choices). 그는 삶을 작동시키는 연료로 담배를 선택했다. 아침 3시간과 저녁 3시간, 하루 6시간씩의 집필을 계속하기 위해 50년 넘도록 온갖 연료를 자신의 몸에 부어 넣었다. 거의 매일 같이 니코틴(담배 2갑), 알코올(포도주 1.3병), 암페타민(각성제. 0.2g), 아스피린(진통제. 15g), 바르비투르산염(수면제. 4g), 카페인(커피) 같은 약물을 콸콸 주입했던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 아래, 사르트르는 본질을 찾기 위해 자신의 건강을 마구 갈아 넣는 실존으로 몸부림쳤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찾기 위해 ‘숨가쁘게’ 달려왔던 그는 75살에 ‘숨가쁜 질환’으로 그의 실존을 거뒀다. 만성폐쇄성 폐질환(COPD)이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 


    ‘나에게는 존재할 권리가 없었다. 나는 우연히 생겨나서 돌처럼, 식물처럼, 세균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내 생명은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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