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에 새로 발령받아 오셨던 A팀장님.
가장 오래 있었던 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셨죠.
아는 대로 전부 말씀드리면 저에게 힘든 업무를 맡기실 게 눈에 훤해 셋 중 하나 정도는 모르는 척했습니다. 팀장은 처음이라 정신없으셨을 텐데, 더 많이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팀장님을 싫어하냐고요? 그럴 리가요.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물론 지금은요. 그때는 첫 팀이신 만큼 시행착오도 많으셔서 선뜻 나서기가 꺼려지더라고요. 그래도 셋 중 둘, 과반수 이상은 대답해 드렸으니 너무 노여워하지 말아 주세요. 회사 생활이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밝은 성격이라 모두와 잘 지내던 B후배님.
너무 복잡한 시스템 때문에 애 많이 먹으셨죠.
시스템은 나도 잘 모른다고 초장부터 선 그어서 미안해요. 사실 다 해봤던 거였어요. 아마 팀에서도 내가 가장 잘 알았을 거예요. 근데 왜 알려주지 않았냐고요? 솔직히 조금 귀찮았어요. 한두 번에 끝날 일도 아니고, 알려주기 시작하면 계속 물어볼 거잖아요. 그리고 후배님의 과한 해맑음도 부담스러웠어요. 저는 정말로 조용한 게 좋거든요. 내향형 인간이라 미안해요. 그래도 열심히 독학한 덕에 지금은 시스템 달인이잖아요. 그럼 된 거예요. 그렇죠?
입담이 좋아 만나면 항상 즐거운 친구 C야.
지난번에 후배들과 모 술집에 들어갔다가 너를 봤어.
너는 못 봤다고? 당연하지. 내가 너를 보자마자 뒤돌아서 나왔거든. 못 본 척해서 미안하다. 서운하다고? 그래, 충분히 서운할 수 있어. 근데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어. 나는 항상 네가 불안하거든. 뭐가 불안하냐고? 말실수할까 봐. 입담이 좋은 대신 너는 항상 선을 넘나들잖아. 우리한테 와서 쓸데없는 소리 할까 봐 1차에서 먹은 술이 확 깨더라. 후배들은 괜찮지 않냐고? 무슨 소리야. 요즘은 후배가 더 무서운데. 그래도 개인적으로 내가 참 좋아하는 거 알지? 조만간 보자고.
고민이 생기면 나부터 떠올려 주는 친구 D야.
급전이 필요할 때도 너는 제일 먼저 나를 찾았었지.
그때 내가 무슨 핑계를 대면서 거절했더라? 너도 눈치챘을 수 있겠지만, 돈은 있었는데 빌려주기 싫어서 없다고 한 거였어. 네 사정 모르는 척해서 미안해. 너무하다고? 그럴 수 있지. 근데 나는 부모님이 친구분들과 돈거래하다 사이가 틀어지는 걸 몇 번 봐서 그런지 마음이 내키지가 않더라. 너는 다르다고? 대학 다닐 때 내가 20만 원 빌려줬던 거 까먹었구나. 네가 그걸 언제 갚았더라. 한 달 만에 준다고 하고 반년이 걸렸던 것 같은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잖아. 돈거래만 안 하면 우리는 아무 문제없어. 평생 가자, 친구야.
유난히 쿨한 척하던 전 여자 친구 E야.
연애 초창기에 자주 가던 논현동 뒷골목 기억나니.
길눈이 어두워 다른 곳에서는 헤매기 일쑤던 내가 그곳에서는 앞장서서 걷자 네가 물었잖아. 전 여자 친구랑 왔던 곳 아니냐고. 그날따라 꼬치꼬치 캐묻던 너의 집요함에도 나는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었지. 사실 맞아. 정확해. 역시 여자의 직감은 예리하다니까. 왜 거짓말했냐고? 나중에 밝혀졌지만, 네가 괜찮다고, 상관없다고 하던 거 다 허세였잖아. 쿨함을 강조하는 사람 치고 진짜 쿨한 사람을 본 적이 없거든, 내가. 어쨌든 그래서 쓸데없는 입씨름 하지 않았으니까, 참 다행이지? 어차피 지금은 너도 전 여자 친구지만 말이야.
선의라는 미명 하에, 많이도 속이고, 감추고, 모르는 척했다.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잘못한 것 같지도 않다. 다시 돌아가도 대부분은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세상에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전부 드러내거나 알리지 않아도, 괜찮은 것들이 있는 법이다.
그나저나 모아놓고 보니 참, 연기자가 따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