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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hnnap Jun 23. 2024

〈오렌지와 빵칼(가제본)〉



138. 아쉬웠다. 트로피를 하나 잃은 느낌이라서.



 사랑스러운 인물이 많았다. 살인자ㅇ난감 시리즈와 같은 pop함을 느꼈다. 한 자리에서 후루룩 읽었다. 깔끔하고, 재밌었다. 인간이란 드라마가 선과 악의 근친물임을 멋지게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큰 주제는 아무래도 칼 융이 말한 그림자에 관한 것이었다.

 주인공인 영아는 5년째 교제 중인 남자친구 수원,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도덕적으로 참견을 붙이는 오랜 친구 은주와의 관계에서 수동적으로 구는 인물이다. 불편하고 거리끼는 구석이 있어도 싫은 말을 한 번도 꺼내지 않는다. 어린이집에서 근무하는 영아는 자신을 마일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면 깽판을 치는 금쪽이 원생 은우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영아는 겨우 이성을 유지하곤 했다. 호주에서 온 은우는 어머니와 둘이 사는데, 어머니는 무인 저가 식료품점인 25시 마트 건너편에서 파리가 꼬이는 친환경 고가 빵집을 운영 중이다.

 어느 날 은우는 주위 사람들의 달팽이관이 파업할 만큼 특히 못살게 굴고, 영아는 순간 통제력을 잃어 모든 원생들이 겁을 먹을 만큼 고함을 친다. 이성을 되찾고 다급히 사과하는 그녀에게 은우는 칭찬의 의미로 ‘You nailed it(해냈군요)’라고 속삭이는데, 영아는 자신의 얼굴에 알 수 없는 웃음이 피어나는 걸 느낀다. 상황을 잘 설명해서 학부모 컴플레인을 미연에 방지하라는 원장의 압력으로, 영아는 은우를 차에 태워 빵집으로 하원시키는 초과근무를 떠맡는다. 그리고 묘하게 비스듬하게 구는 은우의 어머니로부터 표정에서 눈과 입의 불화를 지적받고, 심리상담을 제공하는 어느 의학 센터의 연락처를 건네받는다. 이후에 수원도 영아에게 센터를 알아봐주는데, 깨닫기로 은우의 어머니가 알려준 곳과 번호가 같은 곳이었다.

 고민 끝에 해당 센터를 방문하기로 결심한 영아는 수원이 태워주는 차를 타고 방문해 상담을 받는다. 그리고 호주와 미국이 체결한 MOU에 의해 실효성이 검증됐지만 아시아 인구의 데이터가 부족할 뿐이라는 어느 시술을 권장 받는다. 전두엽를 향해 가해지는 해당 레이저 시술은 무료였고 정확히 4주 동안만 효과가 지속되는 것이었으며, 그 효과란 억눌린 자아를 해방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기능을 하는 화학물질을 비활성화함으로써 말이다. 이후 수동적이었던 영아는 수동공격적으로 변하더니, 후엔 파극으로 치닫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 쾌감을 얻는 행동들을 실행한다. 그 행동이 살인까지 이어지지는 않지만 자기파괴적 행동에 탐닉하며 전에 없던 쾌락을 맛본다. 역치의 절벽이 점점 높아지는 대책 없는 쾌락.

 소재 측면에서 굉장히 다채로운 재료들이 쓰여서 신선했다. 공정무역, GMO, 캣맘, 추락한 교권, 페르소나, 자코메티의 조각상, 돌봄 노동 등. 인물의 심리와 작품의 주제를 투영하듯 자코메티 작품에 대해 사회적으로 합의된 인상이 아닌 개인적인 감상이 서술된 것이 좋았다. 그리고 파괴적 행위를 펼치는 영아가 스스로 통제하고 있던 부분이 정확히 무엇인지 규명하여 작가로서의 사회적 책임감을 지키고 인물의 입체성을 구제한 부분이 좋았다. 아쉬웠던 부분이라고는 돌아봐도 특별히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일을 천연히 할 수 있는 작가라는 직업에 부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나의 삶과의 연관성에 있어서는, 보복 심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초과하여 모범생처럼 군 하루 뒤에는 그랬던 나에게 복수하려는 듯 족히 나흘은 붕괴된 채로 지내지 않을 수 없곤 한다, 비록 당하거나 그렇게 하는 게 딱히 재미는 없어도. 균형 그 자체가 선이라는 말은 정말 옳다. 더 부끄러워지기 전에 악마저도 부끄럽지 않은 것으로서 인정하고 분출할 수 있는 창구를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어느 감흥 없는 책에서와 달리 인간다움의 근원을 이성, 공감, 자유가 아닌 부끄러움으로 지목하는 듯한 결말도 좋았다.


116. 척 봐도 가루 입자가 곱지 못해 못한 불량이었다. / 볼드체를 빼는 게 맞지 않을까 싶었다.

157. 근처 주(차)장으로 나를 데리러 와 대신 운전 좀 해줘. / 볼드체를 넣는 게 맞지 않을까 싶었다.

+ 짝수 페이지에 ‘또’가 뭔가 이상한 위치에 있는 게 있었는데 페이지를 메모해놓지 않았다.


#오렌지와빵칼 #청예 #허블 #서평단 #동아시아 #전두엽 #사이코패쓰 #공정무역 #GMO #캣맘 #교권추락 #페르소나 #자코메티 #돌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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