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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hnnap Jun 20. 2024

〈은랑전〉




79. 그들은 수백만 년이 흐른 후에도 남아 있을 유일한 재료,
즉 돌로 도시를 세웠다.




 재밌게 읽었다. 비잔티움 엠퍼시움이 제일 섹시했지만, 인용한 문장이 등장하는 메시지로 이 책의 이미지를 가져가고 싶다. 프랭크 허버트 단편집에선 안 그랬는데, 이 책은 여러 단편들을 통해 작가가 스스로 맞서고자 하는 몇 가지의 질문이 비교적 뚜렷하게 느껴졌다. 주제가 아닌 질문이. 그래서 좋았다.


 〈메시지〉에서는 김종영미술관에서 돌덩어리들을 이리저리 보며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언어와 시각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을 모든 풍경들은 결국에 낭비되는 건가’ 역사 끝에 남겨지는 건 사소한 예술품 따위인데, 그래서 시대가 바뀐 후에도 여전히 인간에 대해 뭔가를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예술의 자격 같았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파인만스러운 발상에 기댄 종을 막론하는 보편적 예술의 형태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이 계속 이어져 온 생명의 줄기에 대해 괜찮은 이야기로서 그 원인을 진단한다.

 〈환생〉은 뒷부분의 플롯이 헷갈렸지만 대략적인 뉘앙스는 잡을 수 있었다. 이수경 작가의 너의 총합을 떠올리게 했다. 생명의 줄기 속에 어떤 식으로든 희미하게 과거의 흔적은 남지만 역사 속에서 망각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기억만이 아니라 망각 역시 누적된다는 걸 대단히 긴 수명을 가진 외계인을 통해서 풀어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은랑전〉에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비슷한 생각이 담겨 있었다. 미야자키는 고도의 과학기술이 전쟁에 쓰인 시대를 겪으며, 개개인은 자신들 노력의 최종적인 용처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덕성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개인의 재능과 역량은 세상에 의해 방향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스승의 밑에서 6년을 수련해놓고, 결국엔 그 시간을 뒤엎는 즉시적인 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그 결정은 지난 과거를 망각하여 자신의 과거와 단절됨이 아니라, 어느 과거가 특히 더 현재에 지배력을 가짐을 말하고 있었다. 또한 탕젠원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다소 맹목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는 스승에 맞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정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작가적 입장에서 그 판단의 윤리성을 규명하지 않고 열어둔 것도 좋았다.

 〈혼령이 돌아오는 날〉에선 책 전체에서 삽으로 은유되는 과거를 향해 손을 뻗치는 다정한 태도와 기록의 의미란 어디서 발생하는지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 돋보였다. 현 인류와 다른 형태로 존재하게 된 미래의 종을 중심으로 작가는 부메랑을 던져 서사를 진행시킨다. 나는 보존된 주화에는 글자 자(字)자가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집 우(宇)자가 쓰인 주화를 더 소중히 마음속에서 잃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면 교환학생을 가지 않고 훗날을 기약하는 대신 독일어 공부라도 하는 게 맥락상 맞겠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것 같다.

 〈추모의 기도〉〈비잔티움 엠퍼시움〉은 소프트웨어의 생애주기를 떠올리게 하는 치밀한 상상력이 즐거웠다. 전자에서는 모든 공적 행위의 도덕적 의도를 부정하는 강경한지 치밀한지 구분이 안 되는 인터넷 트롤링이 등장한다. 그저 베댓을 먹고 싶은 경향성 따위의 무목적을 논리로 포장한 변론이 기능케 하는 익명성의 절망스러운 면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 좋았다. 왠지 체리장 선생이 떠올랐다. 후자는 블록체인 기술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가상현실과 연계한 군사적 시나리오를 제시했는데 그것이 2018년이라는 게 놀라웠다. 탕젠원과 소피아는 분명 모두 설득력 있는 캐릭터인데 묘하게 균형을 잃은 느낌인 게 거슬리면서도 좋았다. 탕젠원은 좌파인지 우파인지 판단이 안 가는 정말 첨예한 인물이다. 여기서 나온 엠프라는 장치가 바로 뒤에 진정한 아티스트에서 감정곡선을 추적당하는 관람객으로 이어지는 듯한 구성도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역사적 배경과 서사적 상상을 결합한 면도 책 전반에서 눈에 띄었다. 보편적인 얘기가 아닌 개인적인 얘기에 바탕을 뒀다는 게 느껴져서 소설을 통해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와 씨름하고 있구나, 철학자들처럼 한탄만을 늘어놓는 것과는 거리가 있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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