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통 삶아 먹은 여자와 산 남자
(1) 촛불이라면
촛불이 그대라면
나는 성냥이고 싶다
꺼진 심지에
나를 살라 불을 붙이고 싶다
(2) 황도밍고나무
황도밍고
1942년 태어나
2019년에 가다
하느님이
이름표 달아 주었네
산 나무에 죽었다고
이름표 달아주었네
죽었어도 살아있다고
이름표 달아 주었네
(3) 내가 쏜다-
전화가 왔다
내일 아버지 산소에 가려는데
누나도 같이 갈 테야.
바람도 쐴 겸.
누나 위해 동생이 애를 쓴다
둘이 가면 누나 심심 할 거라고
찻길을 에둘러 평촌 셋째 누이 태우고
아버지께 갔다
아버지께 여쭤 봤다
아버지 사위 만났어?
사위 만나서 좋아?
절을 올리고
도토리 몇 알 주워보고
밤도 몇 톨 주워보고
돌아오는 길
점심은 내가 쏜다,
맛있는 것 먹자.
큰소리쳤다
점심을 먹고
카드를 내미는데
이미 계산이 끝났단다
화장실 간 사이 남동생이 글쎄
그러지 말지
나 좀 내버려 두지
그런 힘으로라도 버티게 내버려 두지
(4) 칫솔
더 부드러운 칫솔 없느냐는
어머니 말 한마디에
달려가나 아들이 사 온 칫솔
그 부드러운 칫솔을
아버지는 1박 2일 여행 온 사람처럼
아침저녁 딱 두 번 쓰고 떠났다
그 칫솔
아들은 버리고
어머니는 주워왔다
아버지 이 살살 닦던 칫솔
어머니 이빨 싹싹 닦는다
(5) 내 아버지
젊은 날 소나무처럼 푸르렀던 아버지
늘그막에 새우처럼 구부리고 주무셨지
주름투성이 마른 북어 같은 얼굴에
꿈틀대던 무성한 솔잎 눈썹 지금도 아련하지.
(6) 채워본다
샤워를 하고
헐렁한 사각팬티를 입고
헐렁한 양말을 신고
헐렁한 티셔츠를 입었다
네 몸이 빠져나간 자리
내 몸으로 채워 본다.
(7) 열받네
밥솥에 밥이 없는 걸 봐도
나 굶을까 걱정하지 마
스트레스가 쌓이면
굳은 빵 쪼가리나
날짜 지난 우유나
냉동실에 인절미나
아무거나 주워 먹어
배 빵빵하게 채우는 거
당신도 알잖아
그러다 병나면 어쩌나
걱정하지 마
병원에 안 가도
걱정하지 마
설령 뱃병이 나도
시드럭부드럭
스스로 추스르는 내 몸
당신이 더 잘 알잖아
나 혼자서도
아무거나 잘 먹고 똥 잘 싸니
아무 걱정 하지 마
?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열받네
나 버리고 간 당신을
내가 왜 걱정하지?
(8) 대답 좀 해봐
당신 지금 어디 있어?
천당에 있어?
지옥은 천부당만부당
혹시 연옥에 있어?
어디 있든 한 번쯤은
다녀가야지
마누라 보고 싶지도 않아?
천당이 너무 좋아서
여기 올 생각도 없어?
연옥에서 달련받느라
올 새가 없는 거야?
꿈에 잠깐도?
아니면
곁에 와 있는데
내가 모르는 거야?
(9) 양파
울고 싶을 땐 양파를 까자
함께 울어주는 양파를 까자
(10) 시집살이 1
우리 형님
나 선보러 대문으로 들어설 때
문구멍으로 내다보았지
옥색 치마 흰 저고리
날아갈 듯 우아하고 황홀했지
첫눈에 반한 어머니뻘 우리 형님
시집살이 고추보다 매웠지
부모에게 효도하고 우애 잘해라
아버지 말씀 지키느라
꿈속에선 형님과 싸우고
꿈 깨면 순종하며 살았지
세끼에 새참에
청소하고 빨래하고
30년 같은 3년,
그이는 서울에서 애가 닳고
첫애는 시골 형님 댁에서 태어났지
(11) 시집살이 2
우리 형님 현명도 했지
딸내미 맹장수술 뒷바라지 끝나자
소 한 마리 팔아서
서울귀퉁이 별 보이는 단칸방 얻어
소처럼 부리던 동서 올려 보냈지
분통같이 뽀얀 간호사들이
시동생을 총각으로 알더라나
눈웃음치는 꼴 못 보겠더라나
탈이 나도 큰 탈 나겠더라나
병원 원무과에 근무하는 시동생에게
고구마 한 자루 부치 듯
인심 한 번 크게 썼지
내 서울살이 3년쯤 앞당겨졌지
쥐꼬리 월급에
착하고 답답한 시동생
꿈도 못 꿀 거사 형수가 감행했지
(12) 아주 죽지는 않고
그는 죽었다
아주 죽지는 않고
그의 아내
그의 아들
그의 손자
그의 친구
그의 이웃
지인들 머릿속에서
그리움으로 되산다
그답게 웃고
그답게 말하며
그답게 행동하며
나도 그럴 테지
아주 죽지는 않고
아들 며느리 손자
지인들 머릿속에
살아있을 테지
나도 그이처럼
그리움이 될 수 있을까?
머리 가다듬고
자세를 고쳐 앉아본다
(13) 전화
언니,
점심 먹었어?
이제 먹어야지.
아직?
지금이 몇 신데?
밥도 없다 얘.
언니, 그럼 어떡해?
걱정 마,
냉동실에 떡이 있을 거야,
그거 한쪽 데워 먹으면 되지 뭐
언니, 그러지 마
제발 그러지 마
밥은 꼭 챙겨 먹어
(14) 칼 갈 던 남자
부엌칼이 안 드네
보름달도 아닌데
둥실 떠오르는 그는
칼 같은 사람 아니지
칼칼한 성격도 아니고
칼질도 못하는 남자
숫돌에 나긋나긋
칼을 갈아 주던 이
무딘 칼 날 세워 싸악 싸악
신문지나 베어보던 이
무 썰고 감자 썰고
칼질은 내가 했지
칼질하다 칼이 안 들면
칼을 번쩍 쳐들고 말했지
여보, 칼 좀 갈아 줘!
(15) 화통 삶아 먹은 여자와 산 남자
화통 삶아 먹은 여자와
화통을 싫어하는 남자가
오십 년을 살았다
남자는 늦둥이
천둥 같은 아버지와
양철 째는 형수 밑에서
조카들과 27년을 살고도
화통 삶아 먹은 여자와
오십 년을 살고 갔다
여자는 팔 남매 맞이
50년이나 살면서
싸울 일인들 좀 많았으랴
한판 붙고 싶어도
남자가 싸우기도 전에
몸져누워버리니
여자는 무슨 수로 싸웠으랴
그래도 미안하다
미안해도 어쩌랴
존경하는 아버지
내 아버지 유산을
화통 삶아 먹은 목소리를
(16) 사진
사진은 참 좋아
근심걱정 없이
웃고 있잖아
사진은 참 좋아
다투는 일 없이
마주 웃고 있잖아
사진은 참 좋아
더 이상
늙을 일도 없잖아
사진은 참 좋아
보고 싶을 때마다
내 옆에 그냥 있잖아
(17) 합류
허동인시인
민현숙시인
김소운시인
시어머니 이기순
시누남편 신언숙
당숙 유원상
아버지 유준상
사촌오빠 유희권
고모 유복순
20년 전 10년 전 5년 전에
풀밭에 풀꽃으로 스러져 간
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마음 가난한 사람들 속에
평생을 체로 걸러낸 듯 슬픔도 말간
남편 황홍현이 합류했다
(18) 가여운 것들
주민등록증이 주인을 잃었어
여권이 주인을 잃었어
운전면허증이 주인을 잃었어
인감도장 통장도장
뿔도장 목도장이
주인을 잃었어
돋보기 선글라스
안경들이 주인을 잃었어
베란다에
자전거가 주인을 잃었어
한날 한 시에 주인을 잃었어
그들은 멍청해
잃은 줄 모르고 기다리고 있어
(19) 지우개
밉다 밉다 밉다 밉다 밉다 밉다
매미처럼 한 열흘 울다가 죽고 싶게 밉다
주민등록등본에서
그를 쓰윽 지워버린 지우개
(20) 여덟 살
할머니,
증할머니 보고 싶어요
증할머니 보러 가요
그래 그러자,
그런데 가서
할아버지 돌아가셨단 말 하면 안 돼
왜 안 돼요?
증할머니가 아시면
슬퍼하실 테니까
우리처럼요?
우리보다 더 슬퍼하실 거야.
그래도
거짓말하면 안 되잖아요.
(21) 우리 집
강북구 번2동
오패산터널 위 달동네지만
하느님 모시고 살기
딱 알맞은 집이지만
남편이 나를 떼어놓고
하늘나라로 가다니
한 때는 슬픈 집이었다
그랬다
하느님과 성모님의 위로도
아무 소용없었다
그 꼴 보기
남편도 어려웠을 게다
그 마음 홀연히
내 곁으로 돌아와
빙그레 웃는다
말 안 해도 안다
하느님과 성모님처럼
늘 내 곁에 있어 줄 모양새다
코로나19 때문에 성당도 못 가고
집에서 텔레비전 켜놓고
미사 드리게 되었지만
이만하면 살만한 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