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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혼잣말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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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우 Jan 09. 2023

겨울의 혼잣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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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에는 평범한 겨울 밤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혼자 걸어도 혼자가 아닌 것 같은 사람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촌스럽게 반짝이는 술집 간판 아래에서 사람들이 담배연기를 날렸다. 밤풍경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는 행인1이 되어 나는 지하철 입구로 들어선다.  

  앞으로 조심해 주세요. 

  전동차 안에서 여자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인상을 썼다. 더 이상 뭘 어떻게 조심한단 말인가. 나는 어려서부터 조심히 살았다. 이혼한 어머니를 찾은 적도 없으며 어리광을 부리지도 않았다.

  "떼 쓰지 말고 늘 어른스럽게 조심히 굴어라."

  그런데 정의 어머니를 데려온 날,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리본이 달린 외투에 원피스를 입은 정의 모습은 마치 인형 같았다. 정은 나보다 열 살이 어렸다. 나는 정의 어머니를 어떤 호칭으로도 부르지 않았다. 호칭을 생략한 채 데면데면 지냈다. 정의 어머니는 정을 데려와서 우리와 함께 살았지만 서류 상으로는 남남이었다. 정은 커다란 토끼 애착 인형을 품에 꼭 끼고 다니면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마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정이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갑자기 다가온 것처럼 어느 날 정은 어머니와 함께 떠날 수도 있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 나는 자연스럽게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분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미술 학원을 다녔고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정과 정의 어머니는 내 예상보다 더 오래 함께 살았다. 정이 중학교 2학년이었을 무렵, 부산으로 가겠다고 결정했다. 그게 5년 전이었다. 대학생이 된 정이, 어느 날 불쑥 나타날 거라고는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휴대폰 알림음이 올렸다.  한파특보라니까 보일러 터지지 않게 난방 꼭 틀어주세요. 1층에 사는 집주인 할머니의 메시지다. 올겨울 들어 집주인은 이런 관리 문자를 세 번째 보내왔다.

  "낮에 빌라 앞에서 1층 집주인 할머니랑 대화했어. 내가 먼저 인사했더니 어디 사냐고 물으시잖아. 302호라고 하니까 할머니가 거기 집주인이라고 하셨어. 귤도 먹으라고 주셨어."

   정은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

  "걱정 마. 누구냐고 하길래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만 했어."

  창가에 고인 불빛을 보면 식탁에 앉아 있는 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불빛 때문에 백수인 줄 알았죠. 밤늦게 학원 끝나고 오면 302호 창문에는 항상 불빛이 있었어요. 백수니까 심심해서 남의 집 우편물을 가져갔나 생각했죠. 미안해요. 의심해서.”

  301호를 다시 만난 건 집 근처 편의점에서였다. 내 바로 뒤에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들고 있어서 같이 계산해줬더니 집으로 가는 내내 옆에 붙어 조잘거렸다. 

 “그래서 잃어버린 건 찾았니?” 

 301호는 잠깐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내가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혼잣말처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요, 리패키지 앨범 투명포카였는데 앨범마다 다른 멤버 투명포카가 들어있거든요. 투명 포토카드요. 어렵게 트위터에서 제 최애랑 교환성공해서 준등기로 거래했단 말이에요. 우편함에 배달완료라고 뜬 거 조회해보고 바로 왔는데 없는 거예요. 준등기는 우편함에 들어간 후부터 우체국에 책임이 없대요. 그런데 앨범 온라인 판매처에 전화했더니 랜덤으로 포카를 다시 보내주기로 했다면서 301호는 피식 웃었다. 사실은 거짓말했어요. 앨범에 포카 안 들어있었다고.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앞집 학생이 내뱉는 혼잣말이 차가운 어둠 속에서 활기차다.

 “이번에 포카 교환할 때 언니네 주소로 해도 돼요? 그 변태가 내 것만 가져가는 것 같아서.” 

 내 얼굴을 슬쩍 올려다보는 301호와 눈이 마주친다. 그러라고 하자 301호는 맑은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여자는 딸이 열일곱 살이라고 했다. 내년 겨울에도 여자의 딸은 열일곱 살 아이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여자는 딸의 시간이 결빙된 사연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나 역시 궁금하지 않았다. 혼잣말로 남아야 할 이야기도 있으니까.    

  “어? 오늘도 불이 켜져 있다!” 

  301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빌라 3층 우리집 주방 창문이다. 거실 형광등을 켜놓고 나왔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301호의 기침 소리가 겨울 어스름을 긁는다. 잠깐만, 나는 아이의 어깨를 잡고 마주 세웠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는 듯이 내 목에 있던 목도리를 아이의 목에 다정하게 감아주었다. 차고 날카로운 바람이 내 목덜미를 긋고 지나간다. 나는 잃어버린 걸 들키지 않으려는 듯 어깨를 움츠린 채 걷기 시작한다. 누가 켜 놓은 것인지 불확실한 저 불빛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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