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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혼잣말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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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우 Jan 09. 2023

겨울의 혼잣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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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먹었어?" 

  전화는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걸려왔다.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고, 별 생각없이 전화를 받았더니 목소리가 훅 들어왔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 목소리는 자기가 정이라고 했다. 번호가 바뀌었다면서 바뀐 번호 때문에 내가 목소리를 못 알아본 것처럼 말했다. 

  "난 아직 저녁 못 먹었어. 시간 되면 같이 저녁이나 먹자."

  정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누가 들으면 우리가 얼마 전까지 연락한 사이인 줄 알았을 거다. 그러니까 굳이 햇수를 세면 5년 만의 연락이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내가 어디로 가면 돼? 택시 타고 이동하면 되거든."

  나는 정에게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지 정은 배낭을 메고 30분 안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기에는 한참 늦은 시간이었지만 정은 식탁에 내 몫까지 편의점 도시락 두 개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배가 고팠던 것인지 먹기 시작했다. 정은 도시락을 먹으면서 대학 기숙사에서 짐을 뺐다고 말했다. 나는 정이 알려주는 정보만 들을 뿐이었다. 정이 다니는 대학교 이름이나 전공 같은 건 묻지 않았다. 

  "학기 내내 나 밥 혼자 먹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은 혼자 먹기가 싫었어."

  정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반도 먹지 않은 도시락을 덮어서 냉장고에 넣었다. 나름 정을 손님 대접하려고 선물 받은 청귤차를 처음 꺼냈다. 정은 내 손이 닿기 전에 이미 자기가 먹은 도시락을 분리수거를 했다. 정과 나는 청귤차를 마시면서 빗소리를 들었다. 밖에 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작은 방을 치우고 새 이불을 꺼내 잠자리를 만들었다. 밤이 늦었으니 자고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에게 새 수건을 건네면서 저 방에서 자면 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다음 날 아침이면 정이 떠날 줄 알았다.  


  출석부에 적힌 수강생은 아홉 명이었지만 매주 결석이 한두 명씩 생겼다. 도서관 4층 세미나실에는 일곱 명이 모여 있었다. 강의는 무난하게 마쳤다. 도서관 원형 벽걸이 시계가 밤 9시를 가리켰다. 수강생들이 빠져나가고 한 여자가 불쑥 앞으로 나왔다. 

  "강사님,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차갑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사서가 뒷정리를 해서 세미나실을 나갔다. 나하고 여자만 남게 되었다.  

  "사실, 이렇게 얼굴 보고 말하는 것보다 강의 설문 조사에 의견을 적으면 서로 불편할 일 없겠죠. 강의 끝나면 도서관에서 휴대폰으로 설문 조사 링크를 보내주거든요. 하지만 직접 강사님한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도대체 여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나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무난한 줄 알았던 하루가 사실은 함정을 파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일단 여자의 말을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오늘 강사님 질문은 참으로 무례했습니다."

  강의 중에 내가 어떤 무례한 질문을 했더라. 우리는 무엇을 잃어본 경험이 한번쯤 있잖아요. 어딘가에 둔 것 같은데 어느 날 사라졌거나 잃어버린 물건이요. 나는 한 말을 되짚어보았다. 

  "어떻게 그런 경험을 여기서 말할 수 있겠어요? 누군가를 잃어본 경험이라니요. 옆에 있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게 뭔지나 아세요? 그걸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에서 사탕 꺼내듯이 여기에서 경험이랍시고 말할 수 있는 건가요?” 

  마지막에 여자는 울먹거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봐도 여자의 말은 왜곡된 게 분명했다. 누군가 잃어본 경험이라니. 분명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흥분한 여자 앞에서 사실은 무의미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여자와 나 사이로 아까보다 물컹해진 침묵이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여자는 흥분을 가라앉힌 상태였다. 

  “딸 아이는 여전히 있어요. 일 년이 지났어도 바뀐 건 없어요. 교복도 그대로 옷장에 걸려 있지요. 사라진 게 아니에요.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요. 아이는 꿈에서 성장한 모습을 보여줘요." 

  여자의 목소리는 혼잣말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자의 말이 내 마음 바닥에 천천히 부딪혀왔다. 여자의 이야기는 가늘게 이어지는 어떤 노래 같기도 했다. 나는 무기력한 관객이 되어 여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도서관 직원이 노크를 한 후에야 여자와 나는 세미나실을 나왔다. 인사말 같은 건 없었다. 여자와 나는 짧은 눈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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