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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뭐 잃어버린 거 없어요?”
현관벨이 울려 비몽사몽간 잠에서 깨어 문을 열었더니 목소리가 훅 들어왔다. 열린 문틈으로 보니 오며 가며 계단에서 몇 번 마주친 앞집 학생이다. 저 301호에 사는데요. 301호는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그래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까지 돌린 채였다. 손가락 사이로 잔기침이 눈치 없이 툭툭 튀어나왔다. 교복 위에 패딩을 입고 가방까지 메고 있는 걸로 봐서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여기 벨을 누른 듯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당돌한 십대라고 생각했다. 일부러 묻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까 301호는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뭐 편지라든가. 우편물 같은 거요. 혹시 분실된 적 없나 해서요.”
말하면서 301호는 내부로 흘낏 시선을 던졌다.
“없는 것 같은데.”
"내 것만 없어졌나봐, 씨."
301호는 혼잣말을 바닥에 내뱉더니 홱 돌아서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현관문을 닫았다. 밤샘 작업도 모자라서 오전까지 일을 마무리 한 후에야 겨우 눈 좀 붙였던 건데 잠이 확 깼다. 기분이 별로였다. 처음부터 상대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의자에 시선이 닿았다. 그 의자는 일주일째 주인 없이 놓여 있었다. 정이 홈쇼핑에서 산 캠핑용 안락의자였다. 내가 별말 하지도 않았는데 변명처럼 겨울을 앞두고 저렴하게 구입했다고 했다. 정은 그 의자를 북향으로 난 거실 창을 향해 놓았다. 의자에 파묻히듯 앉아서 내보내던 정의 잔기침 소리. 정은 병원에 가지 않으면서 계속 기침을 해댔는데, 나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관심을 받으려는 일차원적인 행동 같아서 더 그랬을 것이다.
"병원에 가는 게 어때?"
같은 집에 살면서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은 손사래까지 치며 과한 동작을 했다.
"겨울에 잠깐 잔기침이 나오는 거야. 이러다 괜찮아져."
"생강차 한 잔 줘?"
"정말 괜찮은데."
말은 이렇게 하면서 내가 생강차를 타서 주면 정은 두 손으로 컵을 받아들고 미소 지었다. 잔기침을 하면서도 생강차를 홀짝 마시던 그 모습이라니. 그러니까 301호를 외면하지 못한 건 결국 잔기침 때문이었나. 한 번은 정에게 천식이 있는 게 아니냐고 물어보았다. 정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런 질문이 관심의 표현이라고 여겼는지 실실 웃었다. 나는 인터넷 쇼핑몰 장바구니에 공기청정기를 담아놓았지만 결제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전에 정이 떠나지 않을까, 은근히 바랐는지도 모른다. 결국 일주일 전 집에 돌아오니 정은 없었다. 하도 감쪽같이 사라져서 빈 캠핑의자만 아니었다면 정이 왔다 간 것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서류봉투(준등기) 가져간 사람 도로 넣어놓으시길
일부러 본 건 아닌데 301호 우편함에 붙은 종이가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왔다. 301호 학생이 적어놓았겠지. 오늘은 그런 것에 대해 얘기하고 이미지를 그려보면 되겠지 싶었다. 어느 날 갑자기 잃어버렸거나 사라진 것들. 현대인의 마음 그리기-심리 테라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밤 9시까지 구립도서관 성인 회원을 대상으로 한 겨울 강좌였다. 이 일을 소개해 준 사람은 작년까지 홍대에서 작업실을 같이 썼던 동료였다. 당시 같이 대중을 타깃으로 한 심리 서적 시리즈에 삽화를 그렸다. 옛 동료는 그 경력을 ‘억눌린 현대인의 마음을 상징적인 그림으로 표현한 일러스트’ 라는 문구로 포장해 도서관에서 강의를 했는데 겨울에 치앙마이에 갈 예정이라 임시 강사를 구하는 중이었다.
“별 거 아니야. 그냥 왜 이걸 그렸는지 물어보고 얘기 들어주면 돼. 거기 사람들 마음이 허전해서 오는 거야. 진짜 마음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를 가지. 도서관 무료강좌를 듣겠어. 이번만 잘 맡아줘요. 내가 볼 때는 자기가 적임자야. 작업실 썼던 사람들 중에 자기가 가장 무난했잖아. 이것도 사람 상대하는 일이라 예민하면 못해. 자기는 할 수 있어."
큰 고민 없이 나는 강의를 맡기로 했다. 동료가 나를 평가한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무난한 사람. 과연 내가 그런 사람이었나. 무난한 사람이었다면 초등 교과서 삽화 수정 같은 건 바로 해결했을 것이다. 머리 모양과 옷 색깔만 바꾸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니까. 하지만 나는 편집자의 지적 사항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편집자의 말에 의하면 출판사 홈페이지 건의사항에 올라온 글을 전해주는 거라고 했다. 여자아이는 긴 머리에 옷은 분홍 계열이고 운동하는 장면은 짧은 머리에 남색, 검정, 흰옷을 입은 남아들만 등장하는 내 삽화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었다. 그런 평이 출판사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왔다. 작성자는 자신이 초등학생 교육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데 없는 시간을 쪼개어 교과서 내용을 검수한다고 썼다. ‘어버이날 부모님께 감사 편지 쓰기’ 같은 내용도 한부모 가정 아이나 기타 사정으로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 수 있다며 ‘보호자에게 감사 편지 쓰기’ 등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마감 기한을 넘기고 편집자의 독촉 전화를 받은 후에야 나는 삽화를 수정할 수 있었다.
첫 강의는 무난했다.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고 현재 마음을 색깔로 표현하는 시간을 가졌다. 강의가 끝났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무난하고 무탈한 하루가 저물어가는 중이었다. 그런 줄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