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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었다. 어둠 속에서 거실 에어컨이 취침 모드로 돌아가고 있었다. 꿈에서 깬 것 뿐인데 이상했다. 꿈이 현실 같고, 현실이 꿈만 같았다. 그러니까 꿈속에서 윤이 한 말이 현실처럼 느껴지는 수상한 여름밤이었다. 노크 따위는 하지 않았다. 윤의 방은 쉽게 열렸다. 윤은 침대에 모로 누워 있었다. 처음에 나는 거칠게 윤의 손목을 잡았다. 양손 다 손목을 그은 흔적 같은 건 없었다. 나를 불순물처럼 바라보는 그 눈빛 때문이었다. 아니 윤은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윤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주먹으로 윤의 복부를 가격했다. 윤은 침대에 나뒹굴었다. 나는 다시 일으켜 세워 윤을 때렸다. 내 안에서 아비의 유전자가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내 야만서을 가까스로 감싸고 있던 껍질이 벗겨진다. 윤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비명은커녕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만 때리는 내게 경멸의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너는 대체 뭐가 불만이야. 애비가 널 떠나서 그래? 애새끼야. 애비 같은 건 없는 게 나아."
윤의 등을 발로 걷어찬다. 이어 윤을 바로 눕히고 나는 배 위에 올라탄다.
"행복하다고 말해. 행복해 뒈지겠다고 말하면 그만 둔다."
윤의 얼굴에 내리꽂을 기세로 주먹을 높이 쳐든다. 윤의 눈가에 눈물인지 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 맺혀 있다. 주먹으로 그 얼굴을 가격하려다가 참는다. 보이는 곳에 상처를 만들고 싶지 않다. 시간은 뜨겁게 달구어져서 축축 늘어져 있다. 윤의 상체 위에 내 상체를 눕힌다.
"아프지. 어서 아프다고 말해라."
나는 윤의 귓가에 대고 말한다. 윤은 두 눈을 감은 채 가늘게 숨을 쉬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하얀 눈이 꽃잎처럼 날리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꼭 나를 감시하는 눈 같았다. 여름밤에 눈이 내린다는 게 믿을 수 없어서 그 와중에 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어서 나는 도망쳤다.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바람 한 점 없는 뜨거운 여름 위를 달렸다. 티셔츠 등짝이 땀으로 젖었다.
나는 그 여름의 폭력을 잊지 않았지만 모르는 척했다. 고백하자면 윤의 죽음과 그것과는 관련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선생님이 그림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겁이 났다. 윤은 방에 그림을 남겼다고 했다. 그 수상한 여름밤을 그린 건 아닐까. 왜 선생님은 아들의 생일에 나를 그곳으로 불러냈을까. 내가 모르는 무엇이, 두 사람 사이에서만 피어난 비밀의 꽃 같은 게 있지는 않을까. 그 둘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니까.
택시에서 내리자 작고 하얀 눈이 내 어깨 위로 낙하한다. 눈 내리는 봄밤은 춥지 않다. 사월의 눈이라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덮어 줄 것만 같다. 많은 눈들이 점점이 흩어져 날린다. 선생님은 이 깊은 밤,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가해자라도 들어오라는 듯 선생님 댁 문은 무기력하게 열린다.
선생님, 연약한 게 악하기까지 하면 뭐가 될까요.
나는 돌아온 탕자처럼 빈 몸으로 환한 불빛을 바라본다. 거실 통유리에 빛이 들어차 있다. 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아니 숫눈처럼 하얀 공백을 남겼다. 윤의 방에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하얀 도화지가 이젤에 끼워져 있었을 뿐이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길 앞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춘다.
저 숫눈이 녹기 전에 내 이름을 적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