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랜 시간 동안 데이비드 베나타의 반출생주의(Antinatalism)에 동감해 왔다. 아니 역설해 왔다. 일단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 자체가 싫었다. 중학생 때부터 임신이란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여성들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다 사회적 압박 때문이겠거니 했다.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임신을 못(안)하면 죄인처럼 눈치를 봐야 했으니까.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을 보고 행복해 보인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늘 잔뜩 지쳐서 무미건조해 보였고, 인생의 주도권을 아이에게 빼앗긴 듯한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반출생주의자였던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른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것이 미안하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삶이 참 버거웠기 때문에, 나는 절대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켜서 이런 고통을 선사하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었다. 많이도 울었고, 여러 번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고, 긴 시간을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은 절망적인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삶이 그냥 살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열심히 노력해서 비용을 지불해야 간신히 유지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각종 슬픔과 고통 또한 반드시 느껴야 할 것이었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주변인의 죽음, 부상, 인간관계 실패 등 수없이 많은 고통이 그 아이를 기다린다. 저주가 아니다. 전부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일이다. 모두가 느끼는 고통이라고 해서 괜찮은 고통인 것은 아니다. 내(미래의) 아이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예민한 성향을 타고나서 남들의 곱절로 힘들어할 수도 있다. 나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반출생주의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반출생주의자로서 베나타 교수와 메일까지 주고받았던 내가 조금 변했다. 아이와 셋이 걷는 부부가 더없이 자연스러워 보이고,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곧 결혼할 남자친구와 똑같이 생긴 아이가 그와 똑같이 유희왕카드나 포켓몬 피규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엄청나게 행복할 것 같다는 상상까지 한다. 스스로도 난데없는 이 심경의 변화가 매우 낯설다. 차라리 반출생주의에 확신이 있었던 때가 편했다.
어째서 내 생각이 변하게 되었을까? 아마 행복하고 안정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살면서 처음으로 행복하고 자유로우며 안정을 느낀다. 최근 반년 넘게 글을 거의 쓰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인 것 같다. 행복해서 별로 깊은 생각도 들지 않고 고민도 없으니 쓸 말이 없었다. 나는 사실 20대 내내 ‘언제든 삶을 고통 없이 끝내게 해 주며, 가족들로부터도 완전히 잊히도록 해 주는 버튼’을 수시로 상상하며 살았다. 그것은 아무리 좋은 순간에도 나 스스로를 검열하도록 하는 장치였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그래도 그 버튼을 주면 망설임 없이 누를 거지?’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 늘 ‘누르겠다’고 대답했다. 가상의 상황이었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라도 그 버튼이 내게 주어진다면 기꺼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허무주의 속에 살던 내가 지금 출산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 엄청난 의미가 있는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은 그 버튼을 아예 떠올리지 않은지 3년이 넘게 지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아이를 낳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내가 아이를 생각하게 될 정도로 행복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가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해 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이 행복의 이유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의 존재가 나에게 주는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