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망지 Oct 26. 2022

펜팔과 메일링 그 어딘가에 위치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두시부터 다섯시간,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편지


시간은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어

정적속에 우리는 소리치고 있어     


좋아하는 밴드의 신곡 가사로 열어보는 다섯번째 편지입니다. 매일매일 일기쓰듯이 빼먹지 않고 습관으로 자리 잡은 메일링 서비스지만, 어디까지나 근무시간 중 짬나는 시간에 사무실 안에서 적어내리고 있다는 것을 염두해주시기 바랍니다. 자꾸 새로운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들을 적어나가고 싶어도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대화의 주제에도 제한을 가져다주는 모양입니다. 모든 말들이 전부 한 곳으로 응집되곤 하네요.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청각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성능의 커다란 마샬 스피커로 유튜브 뮤직을 종일 틀어놓는데요, 그날그날 선곡들이 참 다채로워서 별 음악들을 다 듣고 있는 요즘입니다. 문제는 알고리즘의 선택이 그럼에도 한정적인 편이어서 자꾸 노래들에 질리게 된다는 거지요.      



좋아하는 밴드 라쿠나의 신곡이 나왔습니다. 조용히 에어팟을 꺼내들고 귓가에 꽂은 후, 눈은 업무에 고정되어 있지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청력에 온 힘을 다했어요. 라쿠나의 노래는 적어도 제겐 더욱 특별합니다. 항상 위로가 필요한 시점에 적절한 위로를 건네곤 하는 느낌이에요. 가만히 1번 트랙과 2번 트랙에 연이어 귀를 맡기다 보니 아, 나는 또 라쿠나의 위로를 받고 있구나. 이들의 음악이 이렇게 위로와 사랑이 되고 마는구나,, 심심한 속풀이가 되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제게 일어났던 연속적인 모든 일의 첫 시작이 라쿠나의 노래를 우연찮게 듣고, 좋아하게 된 그 순간부터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라쿠나로 시작된 긴 여정의 끝에서 생긴, 어쩌다 앓게 된 작은 병조차도 결국 라쿠나의 위로로 지혈되고 매듭을 짓고, 마무리가 되는구나. 싶은 그런 또 기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모쪼록 신곡을 꼭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어젯밤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합니다. 술을 또 가득 부어낸 또 하나의 밤. 오랜만에 만난, 잃은 줄 알았던 친구가, 회포나 풀자며 술을 마시자 했었죠. 꺼려지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옛사람과 절친한 사람은 제게도 결국 옛사람이 되는 셈이니까, 이러나 저러나 내 밑바닥을 너무 보여줬어서 차마 마주치기가 부끄러우니까. 그 사람을 한동안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종종 길을 가다 마주쳤을 때에도 내가 딱 괜찮을 정도의 미소만 지으며 호기로운 인사를 건넸을 뿐이죠. 그는 제게 부채의식이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아무쪼록 우리의 사이가 이런 식으로 틀어지게 될 것을 그도 예상 못했던 것처럼요. 부채를 가득 안고 저와의 독대를 준비하던 그는 마치 예상이 가듯이 다른 친구도 불러냈습니다. 아무렴 내가 그였어도 오랜만에 단둘이 보는 건 어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죠. 이런저런 꼬리를 무는 사건들이 순식간에 지나가 함께 술 마시는 인원이 커지고, 그 곳엔 제가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더러 오게 되었습니다. 술집 문 앞에 나가 잃었던 친구와 담배를 함께 피며 오랜만에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는데, 그게 그렇게 잔상에 남습니다. 꽤나 길었던 이별을 겪고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진 내가 대견하다고도 하고, 그때와 지금의 마음가짐이 확연히 달라진 스스로가 나도 경이로웠고. 서로를 마주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잃은 친구를 다시 찾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는 나를 배려하려 아무 말도 않으려 했지만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제가 물었죠. 모쪼록 잘 산다고 합니다. 그럴 것 같았고요. 앞으로도 잘 살라고 덕담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보다는 아니게. 

     

뜻밖의 불청객들로 인해 저는 제 역치만큼 솔직하지 못했습니다. 쪼그려 앉아 문에 기대어 나누었던 만큼의 농도의 진실됨으로 조만간 둘이서 또 만나기로 했지요.     


그에게도 들을 이야기가 아직 더 남아있으니까요. 친구를 오랜만에 다시 새로 사귄 느낌입니다. 이 나이 먹고도 친구는 끊기기도 하고, 다시 친해지기도 하네요.     


노란빛 맥주로 가득 찼던 밤입니다. 오늘부터는 편지의 말미에 날짜도 적겠습니다.     


ps.직장인에게 평일 밤 음주는 해악이네요.     


라쿠나의 노래에서 배운

위로와 사랑을 여기에 두고

2022.09.14. PM 2:51       




        





안녕하세요

수신인이 늘어나 편지에 더욱 책임감이 실리게 되었네요.   

   

우스갯소리로 편지를 재촉하는 독자에게 답신이 오지않으면 다음 번 편지의 발신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심심풀이가 명분이지만 펜팔과 메일링 그 어딘가에 위치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답장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말밖에 드릴 게 없네요. 두시부터 마의 다섯 시간 동안 저는 이 글을 씁니다. 뒤늦게 편지를 수신하게 된 독자들에게 밀린 서신을 모조리 보내드렸습니다. 지난날에 싸질러놓은 제 글들을 다시 살피자니 부끄럽기 짝이 없더군요. 하지만 날 것 그대로라는 점에서 제 메일이 갖는 매력이 있으니까 수정 없이 곧이곧대로 보내드렸습니다. 앞으로는 새로 추가될 수신자들에겐 밀린 편지는 보내지 않으려고요. 지나간 글보다 앞으로 써내려갈 글이 더 좋을 것이라고 장담할 테니 아쉬워 말아주세요. 지난 편지에서 언급했던 Mistki 의 Glide를 들어준 독자분이 있습니다! 노래를 그다지 진득하게 듣는 편은 아니라 음악영업엔 재능이 없었는데, 영화 애프터양은 제게 또 이런 영업을 가능케 해주네요. 가능하다면 언급한 영화도 꼭 좀 봐주세요.     


지금 당장 에어팟을 꽂고 듣고 있는 노래는 드뷔시의 달빛 입니다. 저도 클래식을 듣는 제가 퍽 이질적이어서 웃음이 나오는데, 추천 곡으로 메인에 뜨기도 했고. 회사에 울려 퍼지는 블루투스 스피커에 지금 흘러나오는 곡이 영 취향이 아닌 힙합곡이라, 차라리 클래식이 취향에 더 맞을 것 같아, 글을 쓰는 이 시간에 배경음악으론 더 적합할 것 같아, 망설임 없이 드뷔시를 골랐습니다. 고상한 척은 아니지만, 가끔 생각 없이 클래식을 배경으로 틀어두면 생각이 많아지는 한편 생각이 정리도 되어서, 역설적이게 생각이 없어지면서 생각이 많아져서, 그 어딘가에서 장점을 마구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 제 친구 H의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회를 다녀오더니 연일 피아노곡 이야기, 아니 정확히는 조성진 이야기를 해대더군요. 이 친구와 최근에 종종 만나 같이 걷던 적이 있었는데, 브금으로 노래좀 틀어보라는 제 제안에 덥썩 피아노 연주곡을 틀어주는 걸 보곤 처음엔 제가 기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사실 선입견이고, 달밤에 듣는 클래식은 참 숭고하기도 하더라고요. 취향이 아닌 시끄러운 힙합에서 벗어나고파 찾아 들은 드뷔시의 달빛이 퍽 마음에 드는 오늘입니다. 가끔은 도망친 곳에서 안락을 얻게 되네요. 오늘의 좋은 도망침이었습니다.     


쓰고 싶은 글의 주제들이 마구마구 생겨납니다. 습관이 된 글쓰기 덕분에,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있지 않을 때에도 글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좋은 주제들은 잊기 전에 메모장에 적어놓습니다. (아 큰일입니다 에어팟을 뚫고 뉴진스의 노래가 들려옵니다.. 클래식이 밀리게 생겼어요.. 감정을 잡아야 하는데,,)     


어젯밤엔 굶주림 끝에 피자를 다섯 조각이나 집어 삼켰습니다. 제 원래 최대가 네 조각이었는데, 이게 또 성장했다는 징표일까요. 저는 제 동네까지 와주는 친구들에게 항상 깊은 감사와 표현할 수 없는 애정을 느낍니다. 그도 그럴것이 제 동네는 조금은 외졌고, 누군가의 노고와 결심이 있지 않으면 지나치기도 힘든 곳이니까요. 어제는 일이 끝나고 과외까지 있던 고단하고 긴 하루였는데, 운동을 핑계로 제 동네까지 온다는 친구와 도모하여 피자파티를 열었습니다. 노상에서 먹는 피자와 맥주가 그리도 달콤한지 처음 알았네요. 무엇보다 저희 동네에 그렇게 운치 좋은 노상구역이 있다는 것도요. 이 동네엔 제 동네친구가 한 톨도 없어서, 홀로 동네의 모든 걸 누리기엔 제가 그렇게도 혼자를 싫어합니다 :( . 아무튼 이 곳까지 와주는 친구들 덕에 저는 그래도 제 거주지를 사랑해요. 우걱우걱 피자를 삼키고 맥주를 적시고, 생각해보니 나는 왜 매일 음주를 하고 있지? 싶기도 하고, 웃으면서 친구는 제게 알코올 의존증이라 놀리고, 잔잔하게라도 취하지 않은 밤을 맞기엔 제가 지금 현실에 사실은 너무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걸까요? 사실 힘든 걸 내색을 잘 안하는 편이라 저도 저에게 잘 속곤 합니다. 하물며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하는 게 인간이라던데, 저는 이번 주 일기를 쓸 때 매번 취해있었거든요. 일기에서도 전 정직하지 못한 편일 겁니다.     



오늘은 아침에 출근하면서 엄마랑 다투고 나왔습니다. 별 거 아닌 일로 매번 싸우게 되는 게 모녀관계인지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싶은데, 엄마랑은 매번 비슷하게 이유 없이, 이유가 생겨서 싸우게 됩니다. 두 모녀의 아침 출근시간이 겹쳐서 둘 다 간단하게 삶은 게란 하나 씩 입에 물고 아침 문안인사를 나누는데, 오늘은 제 접시에 계란 뿐만 아니라 사과도 한쪽 올려져 있더라고요. 여기서 조그만 포인트로 저는 턱관절이 좋지 않습니다 :) 그리고 그 이유엔 엄마의 지분도 약간 있어서 저는 엄마에 대한 이런 식의 조그만 원망을 항상 가지고 다닌답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시간이 촉박해 사과를 보자마자 헉소리가 났지만 용기를 내어 베어물었죠. 요즘 더 악화된 턱의 상황 때문에 역시나 조금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뭐 그 뒤는 예상이 가듯이 둘 다 촉박한 출근시간에, 사과를 자르네 마네, 턱 운동을 평소에 해야하는데 왜 안 하냐, 운동한다고 완치되는 게 아니다, 그래도 노오력을 해야 하지 않냐, 내가 턱이 나가고 싶어서 나갔냐, 등등. 그리스신화의 에리스가 놓고 간 황금사과처럼, 그 뜬금없는 사과 한쪽이 오늘 아침 한 모녀의 우애를 깨뜨리고 말았네요. 엄마는 일부러 저 들으란듯이 오늘 일진이 아주 사납다. 별자리 운세나 봐야 겠어 하면서, 코 앞에서 핸드폰으로 운세 어플을 들어가더라고요. 뭐 그 후론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저는 전철역으로, 엄마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했죠. 이게 우리 모녀의 사이클이니까요.      


아무튼 별자리 운세, 그놈의 별자리 운세. 그게 참 우리 엄마를 좌우합니다. 그리고 이럴 때면 내가 우리 엄마 딸인게 피부로 느껴져서 이유모를 소름이 돋습니다. 저도 별자리 운세 믿는 걸 참 좋아하거든요. 그래도 우리 엄마가 더 독해요. 매일매일 달라지는 행운의 색상을 꼭 챙기려고 옷으로 그날의 색상이 커버가 안 될 경우를 대비해 속옷까지 색깔별로 쟁여놓지를 않나, 이제는 색상 별로 그날그날 달고 다닐 가방고리까지 뜨개질로 완성했더라고요. 그런데 우리엄마의 운세 이용방식은 조금 이상해요. 주객전도가 된 모양이라고나 할까. 그날의 운세가 나쁘거나 화가 나는 일이 있을 거라고 하면, 미리 그날 기분이 안 좋아지곤 해요. 마치 오늘의 운세가 허락해준 나의 기분이라 마음껏 그날은 그런 기분이어도 된다는 듯이요. 운세가 미리 앞서 하루를 다 결정해놓는 느낌이 있어요.           


저는 매일 그런 건 아니지만, 그리고 의식적으로 그런 건 아니지만, 정반대로 운세를 활용하곤 해요. 하루가 다 끝나고 나면 그제서야 그 날의 운세를 뒤늦게 확인해요. 그리고 그 날 하루를 짜맞추는 거죠. 아~ 이래서 오늘 이랬구나. 물론 늘 인터넷에 나오는 운세가 그렇듯 그럴싸하게 잘 맞을 때도, 터무니없이 쌩뚱 맞을 때도 있죠. 그치만 그렇게 하루가 끝나고 보는 운세가 더 마음이 편해져요. 다 끝난 하루에 뒤늦지만 명분을 제시해주는 것만 같아서, 이 인위적인 시차로 내 하루가 정리될 수 있는 거라면, 전 그걸로 마음의 위안이 생기거든요. 그래도 제가 엄마 딸이긴 한게, 행운의 색상만큼은 저도 웬만해선 지키고 싶거든요. 이것만은 미리 확인하곤 해요. 그냥, 미신이지만, 믿어서 기분 좋은 미신이라면 믿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생각 난 김에 이 글을 전송하고 나면 오늘의 별자리 운세를 확인하러 갈래요. 엄마와 싸울만한 날이었는지 확인해봐야죠.     


하고 싶은 이야기의 꼭지가 하나 더 남았는데, 아무래도 분량 조절 상 오늘의 편지는 여기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여섯번째가 가면 일곱번째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당신의 오늘 하루, 이상하리만큼 드뷔시와 별자리운세가 막연히 떠오르길 바라며,

위로와 사랑을 여기에 두고,

2022.09.15 PM 16:20     


여섯번째 편지 드림

이전 01화 아무도 원치 않았지만 너무 심심해서 쓰는 메일링 서비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