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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린 꽃들
Dec 16. 2022
내가 학생일 때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새 학년이 시작될 때마다 장래희망에 대해 적어내는 연례행사가 있었다. 매년 봄, 그 저질의 회색 빛깔 서류를 받아와 앞으로 무엇을 할지 부모님과 의논했다 — 요즘도 이렇게 하는진 모르겠다. 부모님 서명이 필요했기에 즐겁지 않은 그 과정을 해마다 겪어야 했다. 그 일이 즐겁지 않았던 이유는 부모님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그 서류에 어떤 직업을 나열해도 두 분은 큰 이견이 없었다. 더 큰 문제는 나였다. 학년이 낮을 땐 의사나 변호사, 그러다 선생님이나 공무원, 나중엔 다들 회사원을 대충 적어 내는 그 서류를 두고 나는 항상 며칠을 고민했다.
중학교 때는 주로 예술과 관련된 직업들을 적어냈으나, 고등학교부터는 광고기획자, 엔지니어, 파일럿 등 도저히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폭을 넓혔다. 그렇게 공을 들여 고민할수록 부모님께 내 장래희망을 말하는 일은 왠지 더 부담스러워졌다. 아버지는 내가 나열한 직업들에 대해 아는 만큼 얘기하셨고, 어머니는 그저 내가 무엇을 하든 다 잘할 거라고 자신감을 주시는 걸로 상담은 언제나 비슷하게 끝났다.
그렇게 나는 소프트웨어공학으로 진로를 결정해 대학에 입학했다. 딱히 그쪽에 큰 뜻이 있었다기보단 수능을 치를 때 내가 관심 있던 분야가 그 분야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 폭넓은 관심은 대학생이 돼서도 그칠 줄 몰랐다. 이제는 누구도 장래희망을 적어내라 하지 않았지만 탐색은 더 깊어져, 한 때는 경제학이나 산업공학으로 전과까지 알아봤다. 한 발은 전공분야에, 다른 한 발은 다른 분야에 걸쳐둔 그 상태가 취업까지 이어져 어느 공공기관 사무직이 내 첫 직장이 됐다. 취업준비를 시작할 즈음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깊어져, 상대적으로 다른 일을 병행하기 쉬울 것 같은 공공기관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목표를 이루고 보니 다른 일을 병행할 만큼 사회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2년 정도 지나자 허구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마음은 온데간데없었고, 내 현실의 이야기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회사를 그만두고 스물아홉에 와이프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고 보니, 일단 여기서 제대로 된 직장을 잡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때는 나에게 방향을 제시해줄 아버지와 나를 무한정으로 응원해줄 어머니 모두 돌아가신 후였기 때문에, 늘 그래 왔지만 이제는 정말로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해야 했다. 태어날 자녀까지 있어서 더 이상 내가 무엇을 할지 고르는 게 아니라 무엇을 해야 내 가족이 편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했다. 처음으로 내 장래희망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변수로 등장한 순간이었다.
지금은 데이터 과학자라는 직업을 갖고, 내 부양의 의무 정도는 그럭저럭 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난 아직도 장래희망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삼십 대 중반이 돼서도 여전히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 한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 적은 없다. 그러기엔 내가 이렇게 살아온 지 너무 오래돼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다만 나는 장래희망을 더 이상 "고민"하진 않는다. 그 단어에 이미 포함되어 있듯 나는 더 나은 날들을 "희망"하며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