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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에 흔들린 꽃들 Apr 13. 2023

춤추는 그림자

나를 위한 춤

움직이는 그림자를 목격한 건 오후 여덟 시였다. 그 시간이면 나는 일과를 끝내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독서를 하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짧아져가는 초가을의 해가 막 저문 뒤의 하늘은 어두운 보랏빛으로 어두워져 가고 있었고, 인기척 하나 없는 바깥세상의 적막감이 나 홀로 사는 이 집에 스며들고 있었다. 늦은 저녁 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그 고요가 반가우면서도 그것에 내 방을 완전히 내주기는 싫은 마음이 교차했다.


음악을 틀면 고요가 달아날 것이고, 아무것도 안 하면 난 고요함에 잠식당할 것이다. 해결책을 찾던 중 몇 달 전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양초가 생각났다. 옷장 구석에 잠들어 있던 상자를 열자 은은한 라벤더 향기가 깨어났다. 의자 옆 탁상 위로 옮겨진 양초는 고요가 고독이 되지 않도록 천천히 타들어갔다. 나는 책을 읽으며 마치 잘 훈련된 반려견을 보듯 이따금씩 살랑거리는 촛불로 시선을 돌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촛불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심하게 일렁이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혹사당한 눈으로 독서를 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책을 내려두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나 그림자는 여전히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침대 옆에 놓인 스탠드 조명을 켠 뒤 양초의 그림자를 관찰했다. 흔들리는 촛불이 아닌 고정된 조명에 비친 그 왁스 덩어리의 그림자는 리듬을 타듯 미세하게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책을 덮은 뒤 이번엔 라이터를 양초 옆에 세워봤다. 라이터의 그림자 역시 미동을 보였다. 촛불을 끄고 조명 불빛만 이용해도 결과는 같았다. 그날 저녁, 나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작은 탁상 위에서 군단을 이뤄 이리저리 흔들리는 희한한 광경을 보다가 잠들었다.


그 뒤로도 흔들리는 그림자를 목격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조용한 내 방에서 뿐 아니라 회사나 길에서도 각기 각색의 그림자들은 멈춰있는 그들의 주인에 반항하듯 움직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기이한 현상이 그저 피곤한 내 두 눈에서 기인하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림자들의 진동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고, 어느 순간부터 유심히 쳐다보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주인과 따로 놀고 있었다.

병원에 가봐야겠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안과로 가자니 시력이 멀쩡했고, 정신과로 가자니 흔들리는 그림자를 본다는 게 그리 미친 거라 판단되지 않았다. 평소에 그림자를 보며 살지 않기에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었다. 그러나 증상은 점점 악화되어, 이듬해 봄에는 순탄한 내 삶의 정적을 깨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림자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느 날 회사 동료가 중요한 발표를 하는 도중에 그의 그림자가 팔다리를 흔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탱고를 추기 시작해 나는 갑작스레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발표는 일순간 중단됐고 회의실 안의 모두가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사이 그의 그림자는 브레이크 댄스로 종목을 바꿔 나를 참을 수 없는 웃음으로 인도했다.


그날 이후, 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춤추는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왈츠, 발레, 팝핀, 재즈댄스, 벨리댄스, 탭댄스, 그리고 전통무용까지, 바쁘게 길을 걷는 모두가 그림자를 통해 춤을 추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빛이 전하는 멜로디와 봄바람 속에 녹아 있는 리듬에 맞춰 신나게 몸을 들썩이는 그들을 보며,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여태껏 나 자신의 그림자를 확인하지 않았음을.


나는 해를 등지고 서서 조금의 오차도 없이 그저 내 움직임에 따라 이동하는 내 그림자를 보았다. 내가 한 손을 들면 그 또한 마지못해 한 손을 올렸고, 내가 고개를 숙이면 그 또한 고개를 떨궜다. 거리 위의 수많은 그림자들은 여전히 지치지 않는 춤을 추며 내 그림자를 지나쳐갔다. 모든 그림자들을 뒤덮을 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듯 축 쳐진 내 그림자를 보고 있자니, 그 또한 나를 위해 춤춰주길 바라게 됐다. 그러나 꿈쩍도 않는 그였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내가 춤을 추기로. 검지 손가락을 하늘로 찌르는 것으로 시작을 알렸지만, 아는 춤이 없었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아무렇게나 몸을 흔들었다. 사람들이 보든 말든 나의 흔들거림은 기세를 더해갔고, 내 그림자 역시 나를 따라 춤추느라 바빴다. 부끄럽지 않았다. 어차피 저들도 나처럼 춤추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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