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의 감성이 느껴지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틀 내내 지루하게 비가 쏟아지는 주말, 문득 오래전 영화 하나가 떠올랐다. 이명세 감독, 안성기, 박중훈 주연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1999년작이니 정말 오래된 영화다. 이 영화를 보기에 썩 어울렸던 허리우드 극장에서였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1990>, <첫사랑. 1993>, <지독한 사랑. 1996> 같은 멜로 영화를 잘 만드는 이명세 감독이 누아르 영화를 연출한다고 해서 궁금증을 자아냈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개봉소식을 듣고, 망설임 없이 영화를 보러 갔던 기억이 난다.
<투캅스. 1993>에서 형사로 출연했던 안성기와 박중훈은 이 영화에서 신출귀몰한 범인과 그를 잡으려고 뛰어든 형사로 등장해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펼친다. 그리고 드디어 둘이 맞닥뜨려 제목처럼 ‘인정사정 볼 것 없는’ 빗속의 육탄전은 관객까지 지칠 정도로 치열하게 그려진다. 맥심 커피 CF의 오랜 광고모델이기도 했던 부드러운 남자의 대명사와도 같았던 안성기가 냉혹한 킬러로 변신하여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힌 작품이다.
차 안에서 초조하게 한 곳을 노려보는 한 무리의 남자들,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계단에서 통통 뛰어내려오는 빗방울을 맞은 듯한 어린 소녀가 하늘을 쳐다보자 Bee Gees의 ‘Holiday’가 흐르고 남자들이 쳐다보는 건물 앞에서 우산을 쓴 송영창을 향해 선글라스를 쓴 바바리코트의 안성기가 다가와서 순식간에 남자에게 칼을 휘두르고 달아나는 장면은 손꼽힐만한 한국영화의 명장면으로 완성되었다.
(4) 인정사정 볼 것 없다.(최고의 명장면) - YouTube
마침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폐광에서 맞닥뜨린 형사와 범인, 안성기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면서도 계속 엉겨 붙는 박중훈의 마지막 결투 장면에는 빗소리와 주먹을 휘두르는 둔탁한 소리, 그리고 간간히 흐르는 ‘Holiday’… 숨죽이고 지켜보는 관객들의 정적이 극장을 채웠던 것 같다. 마치 만화나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 같은 장면 전환이 인상적인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한국영화의 전성기가 이제 막 시작할 거라는 신호탄을 터뜨린 듯한 작품이었다.
이렇게 비 내리는 날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