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바람처럼 지나가버려…
허진호 감독의 신작 <보통의 가족> 스틸을 보다가 허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1998>가 떠올랐다. 20대에 봤던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다. 연애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는 요즘 2030이 이 영화 전반에 흐르는 감정선을 공감할지 의문이지만 당시 2030들에게는 마음속에 큰 반향이 일었던 작품이다.
당시에도 진부하기 짝이 없는 시한부 설정이었지만, 같은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감성과 방법에 따라 결과물이 다르다는 걸 실감했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정원(한석규 분)에게 어느 날 주차단속요원 다림(심은하 분)이 그의 일상에 뛰어든다. 시한부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삶을 정리하던 남자에게 봄날의 햇살 같은 여자가 등장해서 썸을 타기 시작하면서 정원의 일상은 흔들리고, 그와 만남에 조금씩 설레하는 다림은 아무것도 모른 채 갑자기 종적을 감춘 남자에 대한 원망이 깊어지지만 이내 일상으로 돌아간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초원 사진관 같은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나 혼자 좋아하다가 나 혼자 마음 접었던 상대가 있었다. 물론 영화처럼 상대가 시한부 인생은 아니었겠지만, 분명 서로 끌리는 것 같았는데 확신이 없고, 용기는 더더욱 없어 그냥 접어버렸던 마음, 시간이 흘러 그 사람과 사귀었으면 후회는 남지 않았을 텐데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아니야, 사귀지 않은 건 잘한 거야 마음이 오락가락했던 것도 오래전 일이다.
진로를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하고 싶은 것보다 할 수 있는 것 위주로 생각했고, 그게 합리적이라고 믿어왔다. 잠재력, 가능성 이런 건 애써 외면하면서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핑계를 대면서 늘 결정적인 순간에 쉬운 길로 도망가는 선택을 했던 것 같다. 좋아하는 일보다 잘하는 일을 하는 게 모두에게 이로운 거라고 믿어왔다. 언제나 이상보다 현실을 붙잡았기에 인생을 평탄하게 살아왔지만 언제나 제자리걸음을 걷는 느낌이고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채 나이만 먹었다는 자괴감이 올 때도 있다.
단지 그 시절에는 젊음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버린다는 것, 인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바람처럼 지나가버리고, 어느새 선택을 할 수 없는 순간에 와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차리는 게 인생의 비극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