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되겠지 와 어쩔 수 없지 사이의 그 무엇
꿈을 잃어버린 듯한 2030들이 안쓰러운 생각이 들다가도 꿈을 잊어버린 4050들도 못지않게 불쌍하게 여겨지는 요즘이다. 나 역시 꿈을 잊고 산지 오래다. 독거 중년들은 고독사(孤獨死)가 인생 최고의 공포로 다가올 때가 많다. 생명이 끊어진 지 몇 주, 몇 달이 되도록 아무도 찾지 않고 혼자 죽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 본연의 공포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고독사에 대한 두려움은 별로 없는 편이다. 물론 남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은 있지만, 죽음 이후의 일이 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독사보다는 객사(客死)를 선호하는 편이긴 하다.
아직도 꿈을 간직하고 있는 4050이 있다면 부럽긴 하다. 재산 증식에 대한 욕심, 자식에 대한 기대를 제외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꿈이 있는 4050이라면 말이다. 지금 내게 어떤 꿈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남에게 손 벌리지 않을 만큼의 경제력이 뒷받침된다는 가정하에 내 몸을 누이기 충분하고, 청소가 편리한 열 평 남짓한 작은 집에서, 가능한 죽기 직전까지 눈과 귀가 양호해서 좋아하는 책과 음악을 적당히 즐기고, 사지를 원활하게 움직여서 남의 손 빌리지 않고 살 수 있었으면 하는 정도? 이건 꿈이 아니고 작은 소망에 가까운 것 같다. 죽기 전에 가보지 않은 곳 없이 5대양6대주를 누빈 후 객사하는 꿈은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둔 지 오래다.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이 되고 긍정적인 삶을 관통하는 지표가 있긴 하다. “Whatever 정신”이라고나 할까. 내가 어떤 모습일지라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겨내고, 길을 찾고, 재미를 느끼면서 살아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대책 없는 낙관이라든가 ‘어쩔 수 없지.’라는 패배적 비관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균형을 잡는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Whatever”를 기억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누구나 삶의 고비를 넘어가는 순간이 있다. 인생 단 하나의 목표만 보고 달려가다가 좌절되었거나, 내 마음 같지 않은 인간관계 때문에 괴롭거나, 부끄러운 치부가 드러나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고 비웃는 듯한 기분이 드는 그런 때, 한 가지 생각에 매몰되어 자책하면서 사라지고 싶은 순간에 “Whatever”의 마법을 속는 셈 치고 믿어보시길.
I’m free to be whatever I
Whatever I choose, and I’ll sing the blues if I want
I’m free to say whatever I
Whatever I like, if it’s wrong or right, it’s alright
Free to be whatever you
Whatever you say, if it comes my way, it’s alright
You’re free to be wherever you
Wherever you please, you can shoot the breeze if you w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