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지, 이하영 작가/기획자론
이 글은 세상에서 가장 흔한 이야기란 무엇일까, 내게 그런 고민이 주어졌던 무렵에 쓰인 것이다. 가장 자연스럽고 흔한, 그러니까 지금 이 말들이 쓰이는 순간에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 눈을 감으면 어디선가 태어나고, 눈을 뜨면 어디선가 단숨에 지워지는 이야기. 문서와 역사로 옮겨지고 각종 예술의 질료로 채택되어 형식을 얻기도 하지만, 결국 말해질 수 없는 곳, 비언어적 차원으로 고스란히 되돌아가는 이야기.
그것은 바로 누군가가 태어나서 죽었다는 이야기다. 태어나고 죽는 일처럼 흔한 게 있을까. 또한 죽음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은 예술이 있을까. 애초에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가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세계에 대해 벌여왔던 각축을―의지와 상관없이―그만두게 되었다는 뜻이다. 스스로 이동하거나 정박할 수 있는 자유 역시 거둬졌기에, 문장이라고 친다면 자족성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는 음소나 음운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혹은 무수한 인과와 연쇄로부터 풀려나, 자기가 멈춘 그 자리에서 아주 조용해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직 완료되지 못한 채, 자기의 끝을 미처 이해하거나 껴안지도 못한 채, 특정한 리듬과의 불일치 상태에서 그 자리에 붙박여 버린 이야기들도 있다. 그것은 스스로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끝을 맞이하여 아직 종결되지 못한 것이다. 누군가의 입을 빌려 발원되지 않고서는, 떠나지도 머무르지도 못한 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의혹들 한가운데서 서서히 미지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지가 되어버린 이야기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그것들에게는 어떤 길을 내어주어야 할까. 이 질문들은 과연 시각예술이라는 장르 안에서 어디까지 유효한 것이며, 어떤 단위까지 구체화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에 대해 가장 첨예하고 실천적인 방식으로 답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두 사람을 알고 있다. 바로 시각예술과 문학이라는 장르적 경계를 넘어서서 교류해 왔던, 나의 귀한 동료이자 스승인 강수지와 이하영 작가/기획자이다.
둘은 제각기 작가이자 기획자이며, 연구자이기도 한데, 사실 어떤 호칭으로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다양한 영역에서 탐구와 실천을 수행하는 작업자들이다. 생태, 기후, 여성, 인류세, 공동체, 훼손된 생애와 존엄성과 같은 몇 가지 키워드들로 의미망의 그물을 얼기설기 짠다고 해도, 결국 그들이 시각적/감정적으로 제공해 왔던 모든 것들을 전부 포섭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내용과 형식이기에 앞서, 작품이라는 현장을 통해 제시되는 인간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마음이 세워낸 도처였기 때문이다.
과연 이 두 사람의 작업에 대해, 혹은 마음이라는 표현을 빌려 잠시 엮어볼 수 있는 현장에 대해, 함께 쌓아왔던 우정과 시간의 궤적에 대해 어떤 말들을 할 수 있을까. 우린 90년대 초중반에 태어났고, 광주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5.18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겪지 못한 세대로서…… 아니다. 이제 이런 말들은 모든 가능성을 평평하게 눌러 범주화해 버리는 말들 같다. 물론 이런 교집합들이 유효하게 쓰이던 시점들이 있었지만, 저 말들의 열도 안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절실해지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오늘은 좀 더 ‘내용적인’ 측면에 집중하고 싶다. 사실 두 작가/기획자가 가지고 있는 독창적인 역사성은 굳이 광주라는 카테고리를 빌리지 않더라도, 이미 다양한 영역과 맥락에서 가동되고 있는 것이며 어떤 지점에 놓여도 노래가 되어 발원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좋은 서사라는 것은 특정한 시대 안에서 관성의 추를 구성하며 무겁게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대한 구분과 로컬이라고 명명되는 모든 장소성 너머로 자유롭게 횡단할 수 있는 자율성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들은 아주 먼 곳으로 뻗어갈 수 있는 탁월한 이야기를 구사해 왔으며, 그 이야기를 유효한 것으로 설득시킬 수 있는 가장 미학적인 방식을 탐구해 온 작업자들이다. 그 이야기들을 곁에서 오랫동안 듣고 싶은 사람으로서, 나는 부족한 말들로나마 그들의 행보에 주석을 덧붙일 준비를 해본다.
연동
강수지와 이하영. 이 두 명의 작업자가 현시점에서 시대와 무엇을 교환하고 있는지, 어떤 흐름을 꾀하고 있는지 말하려면 무엇보다 숱한 공동작업을 진행해 온 두 사람의 연동에 대해 짚어야 한다. 강수지와 이하영은 듀오에 가까운 형태로서 기획과 연구, 제작, 최종적인 디스플레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함께 협의하고 도모한다. 무엇을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 여러 시각으로 논의하고 다양한 방향성을 짚어가며 작업의 궤를 함께 구성한다.
이토록 유기적이고도 조직적인 방식의 협업을 보고 있으면, 허먼 멜빌Heman Melbilee의 《모비 딕Moby Dick》에 나오는 독백이 자연히 떠오르기도 했는데, 바로 배 갑판에서 퀴케그와 밧줄로 연결된 이스마엘의 언술이다. 그는 동료의 움직임이 자기 자신의 움직임과 이어지는 것을 본다. 더불어 “나 자신의 개인성이 이제 두 명의 공동자본 회사 안에서 합쳐지는” 것을 본다. 마치 이스마엘의 묘사처럼, 나는 제각기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의 복수성 안에서 서로 연결되며 연대의 단위를 구성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움직임은 다른 움직임을 추동한다. 합쳐진 움직임은 더 큰 움직임을 추동한다. 이것은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자 시스템이 된다. 이 시스템이 작동할 때, 요지부동의 세계라는 것은 다소 상대적인 개념이 된다. 이제 세계는 차라리 서로 닮아있는 것들이 모인 채 꿈틀거리며 연동하는 지형에 가까운 것이 된다.
그러므로 다양한 분야의 작업자, 활동가, 연구자들이 강수지와 이하영의 작업에 기꺼이 합류하게 되는 흐름은 지극히 당연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 두 사람의 작업에 초대된 공동작업자들은 서로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추동하며, 독창적인 방식으로 배합의 문양을 함께 구성한다. 그것은 주변에 끊임없이 귀 기울이고, 연속적으로 맞물려지는 일상의 매듭 속에서 기꺼이 서로 연루되고, 새롭게 교차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능한 지점일 것이다. 이 시점에서 문득 이하영의 다이어리 앞장에 끼워져 있는,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실뜨기 이미지가 생각난다. 또한 유기된 동물들의 복지와 행복을 기원하느라 항상 손발이 바빴던 강수지의 모습도. 확실한 것은 두 사람이 주변의 생을 북돋아 주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한때 그 다독임에 힘을 얻었던 사람으로서, 또한 지난 협업의 궤적에 일부 참여했던 작업자로서, 나는 최종적으로 이들이 구성하고자 하는 세계가 무엇인지, 인간의 정치를 넘어서는 정치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더불어 가장 원형적인 방식의 사랑이 이곳에 축조되는 것을 본다. 공명의 무한한 파동을 타고 흘러가, 세상 곳곳을 누빌 수 있는 리듬으로서 기꺼이 합류할 수 있는 방식을 엿보게 된다. 이제 그들의 작업이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을 갖추고 있는지, 가장 최근의 전시에서부터 하나씩 살펴보자.
수집을 위한 배회
축조하기 위해서는 자재가 필요하다. 재료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수집하기 위한 배회는 대개 길고 어둡고 지난해서 마치 미궁을 맴도는 것과도 같다. 어찌 보면 강수지, 이하영 두 사람의 작업에선 무엇보다 수집이라는 수행이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수집을 수행한다는 말은 어딘가 비문처럼 들리는 구석이 있지만, 내겐 그들의 행위가 단순히 작업을 위한 채취라기보다는, 특정한 수행에 가까운 몸짓이자 회복을 위한 기도에 가까운 모습으로 보일 때가 많았다.
최근 두 작가/기획자는 야생조류 유리창 충돌 기록자이자 동물권 활동가인 ‘희복’과 함께, 5.18 기념공원 대동광장에 세워진 애도의 조형물 ‘글라스파사드’에 부딪혀 죽은 새들의 충돌흔을 주목하였다. 무고한 죽음을 기억하는 조형물에 의해 무고한 생명이 지워지는 아이러니란 대체 무엇일까. 사실 윤리라는 것이 스스로 공감하고자 하는 것을 선별하고 채택하는 정치적 행위에 가까운 것이라면, 현시점에서 유효한 윤리라는 것은, 이 시대의 저항과 평등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각자만의 답을 끌어안고 있었던 세 사람은 밤새 광주의 거리와 아파트의 방음벽들을 배회하며, 그동안 도시 곳곳에 숨겨져 보이지 않았던 죽음을 하나씩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때 하늘을 가로지르던 되새였으며, 직박구리의 꼬리였고, 노면 위에 내려앉는 멧비둘기의 발이었던 것이었다.
이 작업은 ‘위장술(胃臟術)’이라는 제목을 채택해 제주 4.3 미술제에서 전시된 것으로, ‘위장’이라는 말이 가지는 두 가지의 맥락을 주목한다. 존재를 훼손하는 압도적인 폭력으로부터 몸을 숨겨 은닉해야 한다는 점에서, 배고픔을 느끼는 장기를 가졌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주어진 삶을 살아내다 끝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서사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생물학적 종의 구분을 넘어서서 연대할 수 있다. 여러모로 유약하고, 너무나도 쉽게 끝나고 마는 몸이라는 것도 어떤 순간에는 가장 정치적인 질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두 작가/기획자는 새로운 방식으로 ‘기억하기’를 시도했다. 밤새 수집해 왔던 새의 사체는 레진 캐스팅으로 빠르게 떠졌고, 민주묘지에 있는 거대한 동상과 비슷한 질감과 색상을 덧입게 되었다. 벽면에는 5.18 사적지에 남겨진 탄흔 자국과 닮아있는 조류 충돌흔이 사진으로 걸렸고, 전시장 한쪽에는 활동가 희복과 함께 이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나눈 대화와 리서치 자료가 걸리게 되었으며, 관람객들이 가져갈 수 있는 사탕 모양의 버드 케이크가 함께 비치되었다. 버드 케이크의 포장지를 조심히 끌러보면, 그 안쪽에 적힌 제조법을 볼 수 있다. 살고, 먹고, 죽는 일의 대등함은 이렇게 다정한 방식으로 제안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제안으로부터 우리는 미묘한 온기와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겨울, 전라남도 목포에 위치한 동본원사에서 열린 강수지의 개인전 〈Temple of Love―우리는 우리가 알던 곳으로 왔다〉에서도 비슷한 방식의 수집이 진행되었다. 어떤 요소들이 모였는지 살펴보기 이전에, 먼저 이 공간의 특성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동본원사 목포별원은 1930년에 건립되어 광복 전까지는 일본 사찰 법당으로, 광복 후에는 정광사라는 한국 불교의 사찰로, 1957년 이후에는 교회로 탈바꿈하여 사용되었던 건물이었는데, 일본 목조 불당의 건축 의장을 석재로 표현하여 현재로서는 보기 드문 형태의 건축 양식이다. 건물의 용도는 시대에 따라 종종 바뀌곤 했으나, 특정한 신성함을 모시기 위한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그 본질적 특성을 1세기에 거쳐 유지해 온 것이었다. 이곳은 해당 전시에서도 떠나고 머무는 몸들을 위한 소환의 장소로서 기능하며 그 맥을 이어 나가는 동시에, 과연 거룩한 신성이라는 게 소멸해 버린 이 세계에서, 우리가 어떤 이름의 신들을 새롭게 불러올 수 있을지 자문하게끔 유도하는 현장으로서 새로운 역사성을 얻게 된다.
작품의 디테일로 소집된 요소들을 살펴보자. 먼저 살처분 매몰지에서 채취한 돌, 폐그물, 어상자 등이 채집되었다. 이 자재들은 주로 버려지거나 오염되어 남겨진 것들인데, 해당 작품 안에서는 신성함을 복원하는 장치로서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입게 된다. 전시장 정중앙에 놓인 미로 형태의 래버린스 역시 특수한 자재로 제작된 것이다. 래버린스는 가볍고 하얗고 크고 작은 바위 형태의 나열로 구성되어 있는데, 살처분 매몰지 인근 하천에서 채취한 돌과 바위를, 닥나무 껍질을 분쇄하여 솜처럼 풀어놓은 닥섬유로 떠내 제작되었다고 한다. 관람객들은 하나의 돌을 골라 쥐고 사원의 미로에 진입하게 된다. 이 진입은 특정한 공명의 순간을 유도하며, 한순간 세계의 채널을 바꾸는 전환과도 같다.
사실 전환의 요소는 전시장 곳곳에 있다. 사원 안쪽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마치 파고라처럼 기능하는 아치형의 입구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것 역시 내면의 상태를 새롭게 환기하기 위한 장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래버린스 양옆에 드리워진 장막에 새겨져 있는 형상 역시 특별하다. 가까이 다가서서 그 안쪽을 들여다봐야 보일 수 있는 문양들은 이 세계의 소수자성을 대변하는 상징이거나, 혹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각종 동식물의 형태인데, 그 존재들은 이 사원 안에서만큼은 신성함이라는 지위를 얻어 새로운 이름의 신이 된다. 이곳에서 존재는 자신에게 덧씌워진 세속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제 상징을 바꾸고, 가장 자유로운 영혼으로서 좌정해 있는 것이다.
관람객들이 낯선 신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때, 혹은 미로 안을 배회하고 있을 때 전시장을 메우고 있는 음향 작업 역시 인상적이다. 이것은 사운드 아티스트 박서영과 함께한 작업으로, 〈Stabat Mater: Song for Gaia〉이라는 제목과 테마 안에서 감상자들이 이곳에 온전히 머물게끔 유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음악은 우리를 중심으로 수렴하고, 이 공간의 최종적인 지점을 향해 우리를 안내한다. 악장이 어느 정도 울려 퍼지고 나면, 래버린스 안에서 길고 짧은 배회를 마친 관람객은 미로의 중앙지점에 도착해 기이하게 신성한 형상의 조형물을 마주하게 된다. 이것은 뒤엉킨 폐그물의 곡선이 분출되어 흘러내리는 형태로, 마치 양 날개가 드넓게 펼쳐진 것처럼 높게 걸려있어 기묘한 신성이 두드러지는 형상이다. 이 앞에 선 누군가는 파울 클레의 그림을 보며 새로운 천사를 묘사하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가장 낯설고 기이한 형태의 신성. 동본원사에 놓인 이 형상 역시도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 앞에 출현한 곳이면 어디서든 하나의 파국을 보는 천사”로서, “꾸준히 잔해들 위에 잔해들이 쌓이는” 것을 보며, 이곳에서 떠날 수 없기에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죽은 자들을 깨우고, 산산이 부서진 것들을 맞추고자” 할 때 단숨에 불어오는 폭풍은 무엇일까.
그것은 미래라는 이름의 시간성이다. 미래는 예측 불허의 형태로 솟구치고 범람한다. 그것을 응시하고 있는 “천사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들”이란 무엇일까. 버려지고 남겨지고 오염된 것이 모여 구성된 현장에서, 깊은 곳에서 솟구치듯 융기하는 신앙이란 무엇일까. 작품은 이러한 질문들을 던짐과 동시에, 자연히 ‘함께-되기’를 수행하게끔 유도한다. 이곳에서 우린 이성적인 규율과 논리적 판단이 아닌, 비언어적 체험과 자기 내려놓기, 명상에 가까운 수행에 참여하며 나와 너 사이에 놓인 완강한 경계를 지우게 되는 것이다.
사실 강수지, 이하영 두 작업자가 잔해들을 수집해 왔던 것은 꽤 오래전부터였다. 즉 사원이라는 특정한 장소성을 짓기 이전부터, 훼손되고 망가진 것들의 더미를 뒤적이고 잔해를 수집하며, 그것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활용해 새로운 형태의 증언을 지속해 온 것이다. 특히 2021년 화순 소아르갤러리에서 열린 강수지의 개인전,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니〉에서는 그러한 연구와 재구성이 두드러진다. 현재 기후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는 ‘공장식 축산업’을 화두로 다루기 위하여, 강수지와 이하영은 2021년 봄부터 약 8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출입제한이 해제된 전국 살처분 매장지를 직접 답사하며 리서치를 진행했다. 현장의 모습을 영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하였으며, 매몰지를 나뒹굴고 있던 각종 오브제를 모았고, 이를 활용하여 사진과 조각, 설치 작품의 형태로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버려진 스티로폼 조각들을 모으고, 저 먼 곳에서부터 전승되어 온 오래된 레시피를 모으고, 기억과 공명을 위한 노트에 삽입될 수 있는 이미지를 모은다. 줍고 모아 만든 것들로 구성된 전시장을 볼 때면, 자연히 이 모든 시도가 어떤 마음을 기반으로 두고 있는 것인지 가늠해 볼 수 있게 된다. 그들에게 전시장은 결국 모두를 위한 공간이며, 지고한 1인칭 작가로서의 위계를 견고하게 굳힌 곳이 아니라, 피부에 내려앉는 세계를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며 공존의 의미를 되묻는 현장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구성하는 자재들은 당연히 지상에서 쓸모를 다해가는(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되는 것이다.
애초에 그들은 이곳을 가장 덜 훼손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귀한 시도들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인칭이라는 구분과 무관하게 무수한 연결망 안에서 이어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작가적 인칭이라는 위계와 구분을 내려놓는 방식으로, 더 멀리 뻗어 나가던 이야기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떤 재생을 부축하고, 염원하며 세계를 아우르던 이야기들. 이에 대한 경청은 이제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가장 절실한 방식으로 눈앞에 와 닿아 있는 것이다.
먹고 일하고 함께 살며
어찌 보면 이 모든 과정은 존재와 세계를 둘러싼 모순을 짚어내는 공동의 제례이자, 거대한 협동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줄곧 말해왔다시피, 이들에게 연동이나 협동이라는 것은 중요한 테마다. 특히 그것이 먹고 움직이며 노동하는 순환 속에서 이루어질 때, 자연의 궤도와 밀접한 곳에서 진행될 때, 그것은 공명의 근원적인 루틴과도 같은 것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농촌 자치공동체 홍동마을의 구성원들을 커머너들(Commoners)이라 지칭하며, 그들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연대와 돌봄의 방식을 끊임없이 구성해 오기도 했다.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록하며, 더 나아가 예술의 영역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 오기도 했다. 참고로 홍동마을은 전국에서 유기농업운동과 대안 교육이 최초로 실시된 곳이자, 이하영 작가/기획자의 가족들이 머무는 곳이며, 강수지와 이하영 두 작업자가 함께 새로운 전시 공간을 짓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누군가 무해하고 건강한 공동체, 혹은 새롭게 구성될 수 있는 로컬이란 무엇인가 물어온다면, 홍동이라는 장소는 분명 가장 중요한 답변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근대성이라는 것이 우리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때 어떤 시도들이 유효할지, 더불어 범지구적 기후위기라는 이슈 안에서 노동과 예술은 어떤 맥락을 공유해야 할지, 이런 질문들에 답할 수 있다는 대안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
마치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처럼, 홍동마을은 연대와 돌봄, 생태의 중요성에 대해 주목해 왔다. 그 역사의 궤적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1958년 ‘풀무학교’가 설립된 시점까지 거슬러 가야 한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계를 부단히 개선하는 사람을 기르는’ 것을 건학정신으로 둔 이곳은, 실제로 무작위한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의 흐름을 거스르며 농업과 지역을 지킬 수 있는 교육을 시행해 온 곳이었다. 졸업생들은 저마다의 실천을 지속해 오며 현재까지 이러한 지향을 이어온 것이다. 결국 연대와 상생에 대한 지향이 두 사람의 작업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이유 역시, 홍동이라는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러한 영향이 두드러졌던 것은, 지난 2021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냉장고 환상이라는 기획전에 설치된 〈굿 플레이스: 조왕신들을 위하여〉(장동콜렉티브: 이하영, 김소진 기획/강수지 제작)라는 작품에서였다. 일단 ‘굿 플레이스’란 말의 어감이 흥미로운데, 이는 오직 여성들의 ‘감’과 ‘말’을 통해 아주 먼 곳에서부터 구전된 레시피들이 최종적으로 모이는 장소에 대한 지칭이다. 더불어 먼 과거에 냉장고가 없었던 시절에도 먹고 살아가는 일에 대한 답을 어떻게든 찾아내었던 지혜로운 여성들―조왕신이라고 칭해질 수 있는 그들을 기억하기 위한 장소다. 결국에 이것은 일상에서 전해져오는 지혜와 노고, 문화를 되새기는 작업인 것이다.
하얗게 칠해진 제사상 위의 음식들, 길게 드리워진 위패의 형상들, 그리고 조왕신을 이곳으로 초대하기 위해 동원된 경쾌한 장단의 음악은 무속적인 뉘앙스로 현장을 구성한다. 음악의 가사는 이하영이 형식을 갖춰 직접 작사했으며, 작곡과 연주는 사운드아티스트 김호영, 보컬은 조재희가 맡았다. 약 5분간 ‘신명’나게 진행되는 음향 속에서 관람객들은 먹는 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생과 사의 맥락에 밀접하게 닿아있는 것인지 주목할 수 있다.
위패와 함께 놓여있는 레시피들은 주로 발효되거나 건조되고, 소금과 장에 절여지던 비법들로 결국 식재료가 상하지 않고 되살아날 수 있게끔, 생과 사의 경계에서 오가는 방식을 활용하는 조리법들이다. 해당 기획을 고안했던 이하영은 ‘잇지 않으면 잊혀지는’ 일에 대해 말한다. 어떻게 보면 문화라는 것은 결국 먹는 행위, 사는 행위, 죽는 행위에 이르기까지의 순환을 북돋아 주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흐름을 만물과 공유한다는 지점에서 생겨나는 평등함과 상생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번안되는 몸
언뜻 이들의 작업이 무수한 존재들의 이야기에 대한 번안이 아닐까, 존재들의 형식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고 지금 이곳에서 가장 유력하게 작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주된 방법론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확실히 두 사람은 경청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작업이라는 육체로 감싸 안는 것은, 살고 죽는 이야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실 살고 죽는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활짝 열린 창문이 무수하게 달린 집처럼 서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결국 수행에 가까운 일이며,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이 세계에 기입되고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해야 하는 메타성을 요구받는 일이다. 어쨌든 허물어진 경계 사이로 들어선 존재들의 서사는, 작업자들의 내부 안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재편된다. 그들의 세계는 구체적인 형상으로 압축된다. 이 형상들은 작업의 기본 골조이자 형식이 된다.
강수지와 이하영, 두 작가/기획자는 흔히 비예술적이라 치부될 수 있는 요소들을 끊임없이 작업의 영역 안으로 끌어와 유연하게 뒤틀고 변형해 왔다. 이야기가 될 수 없다고 여겨져 왔던 것들을 활용해 기어이 이야기로 만들었다. 형식을 재구성하는 일에 대한 유연성. 이것은 타 장르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왔던 이전의 행보와도 자연히 맞닿아 있는 것이다. 특히 그들은 여성의 문학을 번안하거나, 시각 매체와 결부시켜 활용하는 방식에 대하여 다양하게 시도해 왔다. 팬데믹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여성 인구의 자살률과 무고한 죽음에 대해 주목한 전시, 〈애도는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2021)에서는 김원경과 이서영의 문학 텍스트가 함께 하였다. 시는 천 위에 자수로 새겨지거나, 사진과 함께 나란히 놓이거나,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장소인) 국군광주병원의 내부 풍경과 함께 흘러나왔다. 전시장은 떠나간 것들이 마음껏 거닐 수 있는 현장이 되며, 문학 텍스트는 버려지거나 잊힌 몸들이 어디로든 뻗어 나갈 수 있는 노래가 되게끔 유도하는 경로가 되었다.
또한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고 오버랩이 기획한 〈공감본능〉(2021)에서 공개한 작품, 〈The Blue Notebooks ll: 공명의 기술〉 역시 새로운 방식의 협력 작품이다. 이것은 강수지 작가의 물푸레나무 사진(The Blue Notebooks)에서 출발하여 그 이미지를 표지처럼 배치하고, 낱장의 단위로 펼쳐진 노트를 거니는 느낌을 135개의 피그먼트 프린팅 사진 설치, 이서영의 문학 텍스트, 관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문답지를 활용하여 구현하였다. 전시장에는 나무토막이 부딪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빗자루와 같은 사물이 어딘가를 쓸어내리는 듯한 음향이 미세하게 퍼지는데, 이것은 약재, 염색제, 가구나 그릇의 자재로 쓰이던 물푸레나무가 역사적 맥락에 따라 곤장, 5.18 공수부대의 진압봉의 자재로도 활용되었다는 다면성을 짚는다. 사진을 들여다보거나 음향을 감상하거나 시를 옮겨 적는 행위로, 역사에 대한 해석과 공감은 새로운 방식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노선에 함께 참여한 사람으로서, 나는 특별한 기다림을 습득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라고 설정해두었던 완강한 경계선을 지우고, 대상에 대한 대상화를 관두고, 끌려오는 것들(혹은 나를 끌어가는 것들)의 감각에 기꺼이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떠나고 머무는 몸들을 위한 수행이라고, 노래를 부르기 위한 연습이라고, 집을 짓기 위한 단련이라고 나는 내 벗이자 스승들에게 배웠다.
함께 하며
이 글의 마무리를 나가며, 라고 적지 않고 함께 하며, 라고 적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강수지와 이하영, 이하영과 강수지라는 두 사람과 함께 무수한 조건들을 뚫고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서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은 내게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쁨이자 소중한 일이다. 나는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거나, 때론 곁에서 함께 걷는다. 지금 응시하고 있는 이 길이 사라질 것 같을 때, 재빨리 그 무엇보다 선명한 두 사람의 얼굴을 본다. 그럼 비로소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귄있진>2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