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하진 않았던
오늘은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빨리 가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너무 하기 싫어서 결국 시작조차 안 하고 몇 시간 동안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내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도 집에 가면 분명 책상에 쌓인 종이뭉치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소파에서 뒹굴거릴 것이 뻔했다. 이 모든 것은 아무래도 나태해져 버린 나의 긴 핑계인 것 같다. 어쨌든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나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헤어진 뒤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학생들은 거의 집에 간 후라 도서관에는 나밖에 없었다. 조용하면서 아늑한 공간. 참 좋다. 대출할 두 권을 고르기 위해 책장을 쭉 둘러보기 시작했다. 로맨스 소설 하나, 기억에 관한 책 하나 이렇게 두 권을 채울 예정이었다. 과학 책들을 모아둔 곳에서 <기억의 비밀>이라는 책을 집었다. 아무 데나 펼쳐보니 딱 내가 생각했던 내용이라서 좋았다. 이런 과학책들을 고를 땐 주의해야 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정보와 가깝지만 결이 다른 책들이 많기에 빌리기 전에 목차를 꼼꼼히 봐야 한다. 이제 로맨스 소설을 고를 차례인데.. 에세이 칸에 재미있어 보이는 책들이 너무 많다. [언어의 온도]? 어디서 들어봤는데.. 한참을 둘러보고 있자니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 (-)야, 책 고르는 중이지?
- 아, 네네! 지금 이렇게 두 권할까 생각 중이에요.
- 이리 와봐, 여기에 좋은 에세이 책들이 많아~
사서 선생님이 에세이 책을 추천해 주셨다. 내가 에세이 칸에서 오래 있어서 에세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좋은 에세이 책들을 여럿 추천해 주셨는데, 사실 내가 도서관에 온 주목적은 로맨스 소설이었다.. 그래서 조금 민망하게 웃으며 ”혹시.. 재미있는 로맨스 소설에는 뭐가 있을까요? “라고 여쭤보니 사서 선생님도 웃으시며 일본 소설 쪽으로 가셨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처럼 슬픈 것보단 헤피 엔딩인 소설을 읽고 싶었다. 결국 추천받은 <어리고 아리고 여려서>라는 책을 빌렸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작가 스미노 요루가 쓴 책인데, 오늘 할 일을 다 끝낸다면 읽고 잘 예정이다.
방과 후, 텅 빈 학교는 특유의 분위기가 좋다. 너무나도 조용하고 고요한데 이상하게 편안하다. 더 있으면 잠들 것 같아 책을 빌리고 후다닥 나왔다.
로맨스 소설을 앞에 두고 공부를 하고 있자니 굴비를 앞에 두고 쳐다보며 밥 먹는 자린고비 이야기가 생각난다. 책을 얼른 읽고 싶어서 과제를 열심히 하게 된다. 해야 할 일을 하기 싫다는 핑계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닌 결과 이렇게 공부에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는군. 무의미하진 않았던, 사소한 일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