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육아 기질육아_강점육아
다시 앞장의 글을 들고 오겠다.
육아의 원칙대로만 한다면, 사실 ‘육아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자연’스러운 육아가 바로 육아의 원칙이다. 그러나, 아이는 낳는다고 저절로 크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자연스러움’을 발견하고, 이것을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게 돕고, 본연의 모습이 ‘사회’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발현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육아의 원칙이다.
이번에 이야기 할 첫 번째 이야기는 “관찰”이다. 관찰은 정말 쉽다. 위 단락에서 말하고자하는 내 아이의 ‘자연스럼’을 발견하면 된다. 관찰없이 발견할 수 있다면, 그리 하시오~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정말 불가능하다.
우린, AI가 아니다. 우린 누군가의 자식이고, 박다해와 같이 000이란 자아가 있고, 누군가의 친구여서, 나름의 필름을 장착하고 살아왔다.
박다해가 하는 평소의 행동은 친구들이 넘어갈 만하지만, 다른 다해가 같은 행동을 하면, 친구들은 니가 “박다해가?”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 말은 한 사람에게는 고유의 기질이 있고, 사회구성원으로 그것을 풍기는 향이라는 것이 개개인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개개인이 다 다른 인격이 아이를 낳고 키울 때는 나의 인격으로 자녀를 사회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자녀로 있는 그대로를 봐주어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사람이라 함은 응당, 그렇게 하는 것이 죽을 것 같이 힘들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육아의 힘든 점이다.
이 기나긴 말을 쉽고 명쾌하게 양육자들이 느끼는 문장으로 표현해보자.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아요”
당연하다. 육아는 “내 생각”대로 될 리가 없다. 육아는 자녀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아보고, 있는 그대로 가장 아름다움을 꽃 필 수 있을 때까지 사이드로 빠져서, 물이나 주고, 거름이나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부모들은 자꾸 그 풀 옆에 쪼그려 앉아서, ‘이거 할래? 저거 할래?? 이거 주까? 저거주까?’한다. 정작 아이의 표정을 어두워져 가는데, 부모만 신난다. 결국 어떻게 될까? 진심 궁금하지도 않다. 결국 센터에 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관찰’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죽이기 위해서, 내 뜻을 펼치지 않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의 베스트가 무엇인지 알아 차리기 위해서이다.
많은 선생님들은 ‘관찰’을 굉장히 익숙하게 한다. 이 때 선생님들은 양육자가 아는 모든 선생님들을 다 이야기 한다. 문화센터 선생님부터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하다못해 물레방아돌리는 체험하는 날 만난 선생님까지 모든 선생님들은 관찰을 굉장히 쉽게 잘한다.
이유는 명확하다. 사전정보가 없으니, 저 아이가 지금 이 순간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정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촉을 세우고, 아이가 지금 하는 모든 행동, 말투, 표정, 뒤통수까지도 정보를 캐치하려고 엄청 노력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잘 못해요~ 잘 모르겠어요. 라고 이야기하는 부모들이 많다. 그럼 내가 결혼을 하셨잖아요. 마음에 들었었죠? 어디가 마음에 들었었어요? 왜 그 행동이 좋았어요? 그렇다. 모르는 타인에서 부부가 되기까지 서로 엄청 ‘관찰’을 했을 것이다. 그 때 하던 행동들, 그 때 세웠던 촉들이 관찰의 방법이다.
그러니, ‘내 아이를 나는 잘 모른다.’는 것을 기본으로 생각하고, 저 아이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 저 아이는 무슨 행동을 하려는 걸까?라고 접근해보아라.
이러한 접근도 어렵다면, 자녀가 하는 행동을 세세하게 모두 써라. 그럼 일관성이 보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아래의 일부분을 완성하기를 바라라는 것이다.
육아의 원칙대로만 한다면, 사실 ‘육아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자연’스러운 육아가 바로 육아의 원칙이다. 그러나, 아이는 낳는다고 저절로 크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자연스러움’을 발견하고, 이것을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게 돕고, 본연의 모습이 ‘사회’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발현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육아의 원칙이다.
-모든 가정이 화목해 질 때까지
릴라쌤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