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한국어도 한국 이름도 애써 지운 채 브리아나(Brianna)로 살아온 지 25년이 넘어도 결국 '더 글로리'라는 제목의 한국 드라마를 보는 순간 내면에 깊숙이 묻어둔 아픔과 고통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살아났다.
나는 부자 동네 학교에 전학 온 가난한 집 아이였다. 사업 실패로 사정이 어려워진 부모님은 강남에 있는 이모할머니의 혼수품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말이 점원이지 가게일 뿐 아니라 집안일도 해야 하는 마름이고 가정부였다.
이모할머니 댁 지하에 살게된 덕분에 내가 그 동네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부모님의 기쁨이었다. 자식을 챙길 겨를 없이 먹고사는 일로 바쁘셨던 부모님은 내가 좋은 환경의 학교에 다니면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잘 지낼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드는 5학년 여자 아이들의 세계가 복잡 미묘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부모님은 모르셨다.
드라마의 대사처럼 그들은 그들과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대화하다 내가 오면 모두 입을 닫았고 단톡이나 생일파티같은 곳 어디에도 초대받지 못했다.
사춘기가 절정인 중2 때까지 일진 아이들의 온갖 심부름과 폭언, 폭행에 시달리며 노예처럼 살아야하는 내 삶은 지옥이었고 자존감은 바닥을 모르고 떨어졌다.
유학 간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 미국 코리아타운에 한복과 이불을 파는 가게를낸 이모할머니를 따라 부모님도 고민 끝에 이민을 결정하셨다. 생계에 대한 고민과 함께 내가 겪는 왕따 문제를 가게 손님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이민의 이유였다.
미국의 공립학교는 더 가혹했다. 영어도 못하고자존감이 바닥인 나는 여전히 아웃사이드였다. 아이들은 나를 중국인을 낮춰 부르는 말로 놀리거나 벙어리라고 놀렸다. 선생님은 친절했지만 웃는 얼굴 뒤의 모습은 냉정했고 주눅 들어 움츠린 동양인 학생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은 없어 보였다.
나보다 더 영어를 못하는 부모님께 의지할 수도 없어서 학교에 관련된 문제는 모두 스스로 해내야만 했다.
나는 행복한 기억이 없는 한국과 내 한국 이름을 지웠다. 부모님이 한국말로 질문하셔도나는 영어로만 대답했다.
나는 내 영어이름 (Brianna 강함 용기)처럼 강해지기로 했다. 온전히 미국 사람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열심히 공부했고 좋은 직장도 가졌다. 그리고 미국 남자와 결혼했고 갈색눈에금발의 예쁜 딸도 낳았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마음속 깊이 숨어있던 치유되지 못한 불안이 고개를 들었고 나는 직장도 관두고 헬리콥터 맘이 되어 아이 주변에서 맴돌았다.
도저히 아이를 혼자 둘 수가 없었다. 내가 겪었던 어떤 고통도 아이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나의 불안과 초조함은 극에 달했고 보다 못한 남편은 홈스쿨링을 제안했다.
어느 날 문득 집에서 혼자 공부하고 혼자 인형에 말 걸며 노는 아이가 쓸쓸해 보였다. 아이는 나와 다른 인격체인데 나는 내 아이를 나의 일부로 생각하고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다 아이를 다시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아이는 잘 적응했지만 나는 아이 곁을 맴도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매일 학교 주차장에서 네 시간씩 기다렸다.
오늘도 학교를 나서며 다른 아이들과 인사하기 바쁜 아이가 얼굴이 상기된 채 차에 타자마자 재잘대기 시작했다.
“엄마, 무슨 카드를 써야 했는데 인종이 무엇인지 체크해야 했어요. 나는 백인과 아시안 중 한참 고민했어요.”한다.
그래서 “너는 어디다 체크했니?” 하니까
물론 “아시안이죠.”하며 아이가 해맑게 웃는다.
“나는 엄마가 한국 사람인 게 좋아요. BTS 뷔도 블랙 핑크 제니도 한국인이잖아요.”한다.
내가 그토록 나 자신에게서 지우고 싶었던 한국인의 모습이었지만 아이는 엄마가 한국 사람인 것이 좋았나 보다.
‘ 나의 상처로 아이를 옭아매고 있는 내가 아이에게는 또 한 사람의 가해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에 항상 피해자가되어 살아온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딸 엘레나가(Elena 밝고 빛나는 사람이라는 뜻)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도록 내 과잉보호에서 놓아주기로 했고 나는 다시 직장으로 돌아갈결심을 했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주말 한글학교에도 보냈다. 한글학교에서는 온전한 한국 이름을 원하는 아이의 의견대로 남편의 성 이 아닌 내 성을 쓰기로 했다. 아이는 새 한글 이름을 얻었고 내 한국 이름을 다시 찾아주었다.
아이가 잠든 방에서 아이의 한글 공책이 펼쳐져 있어서 들여다보니 네모난 칸 노트에 처음 갖게 된 한글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제 이름은 이빛나입니다.’ '우리 엄마 이름은 이미래입니다.’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