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공원처럼 잘 가꿔진 드넓은 잔디밭과 푸르른 하늘과 뾰족뾰족한 삼나무 숲 너머로 멀찍이 보이는 오름 봉우리 뿐입니다. 어디선가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올 겁니다.
운이 좋았다면 오는 길에 이차선 도로 양 옆에 이어지던 숲속에서 꿩이 날아오르는 걸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제주도에서 미술관 투어를 나서려면 자동차를 이용하는 게 편리하기는 하지만 제주도립미술관은 버스로도 갈 수 있습니다. 제주공항에서 파란색 간선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면 미술관 정문 앞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어요.
제주도에서 가장 번화한 제주시는 나름대로 도시 분위기인데, 큰 도로에서 벗어나서 숲속으로 난 이차선 도로를 따라오다가 만나는 제주도립미술관 정문은 대학 캠퍼스처럼 외부와 차단하는 느낌이 듭니다.
드넓은 주차장을 지나면서 한적함에 감탄하고 주위를 둘러싼 고요함을 즐기면서 곧 만날 미술관에 대한 기대를 갖고 걸어 보세요.
가는 길 중간에 자그마한 원형 아크로폴리스를 지나서 드문드문 조각상이 서 있는 잔디밭을 계속 걸어가 보세요. 그 길의 끝에 미술관을 만날 거라고 기대하는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울까요.
기분좋은 설레임을 충분히 즐겼을 무렵이면 마침내 온전하게 시야를 꽉 채우는 미술관 건물을 만납니다. 아마도 감탄이 터져 나올 거예요.
주위를 둘러싼 연못 덕분에 마치 아름다운 호수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무채색 미술관 건물은 파르테논 신전을 초현대식으로 재현한 것처럼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하거든요.
거울처럼 잔잔한 수면에 비친 하늘과 울창한 숲이 우거진 오름에 둘러싸인 미술관을 바라보노라면 일순 아름다운 유럽의 성을 촬영한 잡지 화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만큼 비현실적인 기분이 듭니다.
일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일제히 스마트폰을 들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바쁜 광경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제주도립미술관은 그 정도로 놀라운 곳입니다. 광활한 대지에 커다란 기둥이 늘어선 아름다운 건물 뿐 아니라 그 곳을 둘러싼 적막함과 하늘과 오름과 한가로움이 더욱 경이로운 곳이예요.
토끼를 따라서 이상한 세계로 간 앨리스처럼, 미술관 작품 사이를 넘나들며 내 마음 속에서 화가를 만나서 대화하는 미술관 여행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지요!
제주도립미술관은 백화점에서 윈도우 쇼핑을 즐기듯 미술품을 구경하러 가는 곳이 아닙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인파에 쓸려가듯 줄 서서 그림을 보면서 뭔가 느끼려고 애쓰는 도심의 미술관과 다릅니다.
이 곳은 무척 특별하고도 독특한 장소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아우라를 만나러 가는 곳이예요.
비행기를 타고 머나먼 외국으로 가지 않고도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울에 비해 인구밀도가 수십배나 낮으며 아열대의 식물이 울창한 곳,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바람이 육지의 온갖 먼지를 날려버려서 햇살이 유난히 투명한 제주도에는 그러한 미술관이 몇 군데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제주도립미술관은 제주시내권에 위치해 있어서 접근성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관람료도 저렴해서 부담없이 방문할 수 있는 곳이랍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미술관에 특별한 전시가 열린다면 더할나위 없겠지요. 마침 2023년 12월부터 2024년 4월까지 ‘색채의 마술사 : 앙리 마티스와 라울 뒤피’전이 열리는 중입니다. 관람료가 이만 원으로 다소 비싸기는 하지만 한나절 동안 미술관에 머무르면서 여유롭게 작품을 감상한다면 충분히 본전을 뽑고도 남았다는 만족감이 찾아올 겁니다.
층고가 높아서 개방감이 드는 일층 로비에서 전시회 티켓을 끊은 후 입장할 수 있어요. 도슨트는 따로 없으며 이어폰을 미리 준비한다면 바이브 앱을 통한 모바일 도슨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전시회장 곳곳에 있는 전시해설을 읽으면서 한 점 한 점에 주의를 기울여 감상해본다면 도슨트가 없어도 작품이 가진 인상이나 의도를 온전하게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앙리 마티스와 라울 뒤피는 둘 다 프랑스 화가이며 바다를 사랑한 화가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바다 위의 섬 제주도에서 바다를 사랑한 화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로 기획했다고 하네요.
일층 전시실에 있는 라울 뒤피의 작품들은 해안가나 부두 풍경을 그린 경쾌한 스케치나 수채화가 많습니다. 어렵고 복잡한 그림이 아니라 마음 내키는 대로 날렵하게 그려낸 그림들입니다. 푸른색을 사랑한 화가라고 불렸던 만큼 바다나 하늘 뿐 아니라 건물이나 배경 등 어느 곳에나 다채로운 파란색을 마음껏 사용한 그림을 보다 보면 눈이 시원해질 정도예요.
라울 뒤피 본인의 자화상이나 아내를 그린 유화 작품들도 있습니다. 일러스트나 패션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근현대화가인만큼 미니멀한 화풍으로 꽃을 그린 작품이나 텍스타일을 디자인했던 여성 의류도 있습니다.
미디어아트 전시실도 있는데 바닥에 앉아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대형 스크린으로 움직이는 ‘전기의 요정’ 작품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파리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라울 뒤피의 ‘전기의 요정’은 1937년 파리만국박람회의 전기관을 꾸미기 위해 제작한 작품으로 가로 60미터 세로 10미터의 초대형 작품이라고 하네요.
커다란 전시실 하나를 다 채우고도 남을만큼 엄청나게 큰 작품이라는데 미디어아트로 감상하자니 실제로 보는 느낌은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고 살짝 아쉽기도 했어요.
2층으로 올라가면 근현대 미술의 거장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계단이 널찍한데다가 건물 한쪽 면이 통창으로 된 유리로 되어 있어서 한 발 한 발 올라가는 기분이 날아갈 듯 하네요. 마치 '천국의 계단' 같아요.
앙리 마티스의 ‘재즈(ZAZZ)’ 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트북 작품이라고 하는데요,
가위로 오려낸 푸른색 조각 만으로 여성의 모습이나 소년의 실루엣을 표현한 작품을 보면 걸작은 기교가 아니라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라는 걸 보는 순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종이 오리기 기법(Découpage·데쿠파주)은 마티스가 말년에 암과 투병하면서 붓으로 그림을 그리기가 어려워졌을 때 고안해 낸 방법이라고 해요.
인파에 떠밀려다니지 않고 다른 사람들 눈치 볼 필요도 없이 작품 한 점 한 점과 대화하듯 감상을 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거예요.
미술관 전시를 즐겨하는 분이라면, 한적하고 아름다운 미술관에서 걸작품들을 원 없이 바라보다가 전시실을 나올 때 기분은 뭔가 후련하기도 하고 여운이 너무 진해서 살짝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텐데요,
그럴때면 1층 델문도 카페에 들러보세요.
함덕 바다에 떠 있는 델문도로 유명한 카페 델문도는 제주도에 지점이 몇 군데 더 있는데요, 제주도립미술관 1층에 자리잡은 카페 델문도도 아주 멋집니다.
제주도립미술관 카페 델문도 통유리 창 밖으로는 거울 연못에 푸른 하늘과 구름이 비쳐서 언뜻 하늘 위에 뜬 채로 커피를 마시는 꿈을 꾸는 것 같을 수도 있어요. 직접 원두를 볶는 로스터리를 운영하는 카페답게 풍미가 진한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다 보면, 입구를 지나면서 스치듯이 보았던 기념품샵이 떠오를 지도 모르겠네요. 미술관 투어 기념으로 하나 쯤 갖고 싶은 아이템이 떠오른다면 가기 전에 한 번 들러보세요.
여행 도중에 간편하게 들고 다닐 에코백이 필요하다면 채색이 화려한 명화가 인쇄된 에코백을 사도 좋을 거 같고 일기를 쓰거나 필사를 하는 분이라면 라울 뒤피의 그림이 인쇄된 노트도 좋을 거 같네요. 소품 가격이 부담된다면 마티스나 뒤피의 작품 중 마음에 드는 그림이 인쇄된 엽서 한 장 사는 걸로도 충분할 거 같아요.
실은 저도 몇 가지 아이템을 구입해서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제 몫으로는 마티스의 푸른 빛 데쿠파주 작품 엽서 한 장을 사서 식탁 위에 붙여 두고 감상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