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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언주 Nov 13. 2022

그리는 손

1화

   이런 데 와본 적 있어요?

   내키지 않으면 그냥 가도 된다며 여자가 향로에 불을 붙였다. 눈이 커진 창민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던 여자였다. 

   창민은 고개를 저으며 세 평 남짓한 실내를 둘러보았다. 입구 위쪽으로 붉은 부적이 붙어 있고, 좁은 선반 아래에 상담료를 알리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테이블에 깔린 그림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압정이 꽂힌 아트지에 오른손이 왼쪽 소맷부리를 그리고 다시 왼손이 오른손을 그리는 그림이었다. 여자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움직일 때마다 마치 그녀가 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점이 더 나을 텐데, 결이 많아…….

   혼잣말로 웅얼거리던 여자가 창민의 앞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닥터 백이라고 해요.

   여자는 서랍에서 흰 천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손바닥으로 구김이 간 부분을 밀어내고 카드를 섞었다. 카드는 여자의 손끝에서 부채처럼 펼쳐졌다.  

   당장 궁금한 거라면 타로도 괜찮아요. 한 장 뽑아 보세요.

   여자가 말했다. 

   사람을 찾고 있구나. 

   여자의 말에 창민이 테이블 앞으로 바싹 몸을 붙였다.  

   찾을 수 있겠어요?

   창민은 자기도 모르게 여자에게 답을 구하고 있었다. 여자가 카드를 모았다가 다시 펼쳤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블라우스의 줄무늬가 어지럽게 일렁거렸다. 그녀는 찾을 사람을 생각하며 세 장을 다시 뽑으라고 했다. 형도를 떠올리며 창민이 카드를 뽑아냈다. 

   카드를 뒤집던 여자의 얼굴에 설핏 웃음기가 스쳐 지나갔다. 백골의 기사가 말을 타고 있는 그림에 데스라는 단어가 씌어 있었다. 해석이고 뭐고 필요 없어 보였다. 창민은 등줄기로 힘이 빠져나갔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거예요. 태양은 다시 떠오르기 마련이고…… 그 사람이 무슨 마음으로 당신을 만났는지 한번 보기나 하자구요. 

   여자는 다음 카드를 넘겼다. 

   의도가 있었던 걸로 보이지는 않네. 제삼자가 개입됐어. 시작부터 불안한 관계라고나 할까. 그래도 그 사람이 길을 터주고 가잖아 이렇게. 간절하게 마음을 쏟았으니 보상은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3번 펜터클 카드는 왜 나왔을까…….

   여자가 손톱으로 카드를 가볍게 두드렸다. 창민은 고개를 숙이고 들여다보았지만, 그림이 뭘 말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보상이 있을 거라는 말에 그동안 일들이 한꺼번에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호주를 생각하게 된 건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친구 경훈의 영향이 컸다. 그는 현지 공장에서 육가공 기술을 배워 와 ‘안심마켓’ 정육 전문점을 열었다. 청년창업 성공사례로 매스컴을 타더니 프랜차이즈 사업까지 펼쳤다. 하필이면 창민이 개인 방송을 말아먹고 쉬고 있을 때였다. 그런 경훈을 보면서 창민은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워홀에 관해 알아볼 만큼 알아보기도 했다. 해외청년일자리 플랫폼이나 시청 홈피의 공식 프로그램에는 신청자가 넘쳐났다. 

   창민은 웹서핑을 하다가 ‘오지 문’이라는 블로그를 알게 되었다. 오지는 호주 사람을 말하는 현지식 표현이었다. 댓글을 살펴보고 친구 맺기를 했다. 일상을 담담하게 올려놓은 글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블로거에게 쪽지를 보내고 대화를 신청했다. 운영자인 형도는 워홀 5년 차로 영주권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과장되지 않은 말투가 믿음을 주었다. 창민은 오지문이 호주로 들어가는 문으로 여겨졌다.  

   형도가 소개한 질롱의 브로콜리 농장은 8천 에이커가 넘었다. 지평선까지 펼쳐진 채소밭이 처음에는 신기했다. 창민이 농장에 도착하자마자 면접이랄 것도 없이 형도와 계약서를 썼다. 창민의 영어 실력이라면 머지않아 매니저로 추천할 수 있을 거라고 형도가 말했다. 계약서에는 작업 시간과 조건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본래 그런 줄 알았다.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브로콜리 모가지 꺾는 일이 시작되었다. 짙푸른 초록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작업 시작과 동시에 깨달았다. 꺾인 자리에서 뿜어 나오는 풀냄새가 적의를 드러냈다. 브로콜리는 일요일도 모르고 아침만 되면 주먹 같은 머리를 디밀고 올라왔다. 꽃이라도 피면 상품으로 가치가 없어졌다. 

  거대한 평원에는 풀을 뜯는 소 떼들만 드문드문 보였다. 남반구의 여름 햇살은 길고 지루했다. 하늘빛이 적황색으로 바뀌어도 주춤거리는 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밤 열 시는 돼야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트랙터가 끽끽 소리를 내며 종일 고통스럽게 움직였다. 트랙터마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몇 달 견디면 매니저가 될 거라는 기대에 그럭저럭 견뎠다. 그런 환상마저 깨어나게 만든 사람은 집주인이었다. 갑자기 농장으로 찾아와 노동자들에게 월세를 내놓으라고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형도에게로 몰렸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던 형도는 에이전트가 급여를 챙겨 달아난 것 같다고 했다. 형도와 작업자들 사이에 몸싸움이 일어났다. 작업이 중단되자 농장주가 달려왔다. 

   형도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혼란을 틈타 달아난 것이다. 농장주가 내민 송금 영수증엔 워홀러들이 형도와 했던 계약과는 차이가 있었다. 농장주는 자신과 계약하지 않은 불법 노동자는 떠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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