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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언주 Nov 13. 2022

그리는 손

2화

   왜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는 거예요?

   여자가 카드 한 장을 뒤집으며 나무라듯 창민을 쳐다보았다. 

   여기, 절망만 바라보고 있잖아.

   고개를 든 창민이 테이블 쪽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검은 망토를 두른 사람이 몸을 돌려 쓰러진 컵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민은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타고 올랐다. 

   새벽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가 어둠이 가장 깊은 법이에요. 

   안타깝다는 듯이 여자가 창민을 바라보았다. 창민은 그녀가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치부를 들켜버린 심정이었다. 

   농장에서 쫓겨난 그는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떠나가는 버스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불시착한 운석 파편처럼 형편없이 부서진 돌덩이가 된 기분이었다. 더 내려갈 바닥이 없는데 그런 순간마저 몸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화장실에 끌고 들어가기엔 캐리어가 너무 컸다. 발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고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때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책을 읽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하이, 그쪽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급한 마음에 창민은 그에게 짐을 잠깐 맡겨도 되겠냐고 했다. 그는 책갈피에 손가락을 끼우고는 자세를 바꿔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민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화장실을 다녀왔을 때 캐리어가 있던 자리에는 메모 한 장만 남아 있었다. 

  Thanks, Sayonara!      

   여자가 마지막 카드를 뒤집었다. 

   확신을 가져야지. 자신을 믿고…… 그렇지, 티핑 포인트가 나오네. 좋은 흐름을 탔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아요. 이렇게 카드가 당신을 응원하고 있어요. 아마도 변화를 스스로 느끼고 있었을 텐데. 

   변화가 어찌 되었건 창민은 잘 될 거라고 말하는 여자가 고마웠다. 한국으로 돌아갈 티켓도 구하지 못하는 처지에 그녀의 말이 크나큰 위안이 됐다.      

*     

   창민이 새해 첫날 도착한 멜버른은 한여름이었다. 두 번이나 경유한 서른여섯 시간의 긴 여정이었다. 스카이 버스에서 내렸을 때 마중 나오겠다던 형도가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축제 인파로 넘쳐났다. 빔을 쏘아 만든 오로라가 밤하늘에 일렁이고 고층 빌딩의 벽면으로 영상이 흘러갔다. 형도의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농장 주소가 찍혀 있었다. 시내 교통이 통제된 사실을 깜박했다고 했다. 어찌 되었든 창민은 눈앞에 펼쳐진 축제 속으로 자석에 끌리듯이 휩쓸려 들어갔다. 

   밤이 늦어서야 그는 센트럴 역 앞으로 다시 돌아갔다. 길 건너 편의점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추출기에서 뿜어 나오는 짙은 커피향이 창민을 맞았다. 투명한 유리벽은 편의점 내부를 거울처럼 담고 있었다. 백색 전열등 불빛에 창백한 사람들의 모습이 얼비치다가 사라지곤 했다. 낯선 분위기에 두려운 마음이 조금 일었다. 가까운 진열대에서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 냉장고에서 탄산음료 한 병을 꺼냈다. 

   계산하고 돌아서는데 저만치 통유리 앞에 서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여자가 잘 보이는 곳에서 샌드위치 포장을 뜯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의식했는지 여자가 돌아보았다. 건조하고 서늘한 눈빛이었다. 동양인이면서도 웨이브 진 금발 머리카락 사이로 콧등과 선명한 턱선이 어딘지 모르게 배우 김혜수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연기 특강으로 김혜수의 수업을 들으며 언젠가는 함께 작업할 거라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스카이 버스가 도착할 때마다 여자는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살폈다. 오기로 한 사람이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자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고 다시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여자를 다시 만난 건 성당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을 때였다. 

   창민은 한동안 일할 알바라도 찾기 위해 아침마다 주립 도서관으로 갔다. 메일을 확인하고 인터넷을 사용하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오후에는 성 프란시스 성당으로 갔다. 홈리스에게 나누어주는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며 하루를 버텼다. 종소리가 나고 트램이 지나갔다. 성당 쪽으로 한 여자가 길을 건너왔다. 센트럴 역 편의점에서 보았던 그 여자였다. 창민은 성당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사이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인파를 헤치며 그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뛰었다. 한 블록쯤 달려가자 건널목 앞에서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잰걸음으로 길을 건너는 여자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뒤를 따라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굳이 여자를 따라가는 이유를 댄다면 ‘그냥’이었다. 그것 말고는 할일이 없었으므로. 빅토리아 시장 가까이서 한눈을 파는 사이 또 한 번 여자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길 잃은 사람처럼 멈춰 섰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자가 엘리자베스 호텔 건물에서 세움 간판을 들고 나왔다. 타로 하우스를 알리는 간판이었다. 배너에는 타로와 신비한 동양의 별점이라고 쓰여 있었다. 배너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렸다. 마음 한편에는 어떤 계시 같은 것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고 창민은 문이 열린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앞으로 좋은 형국. 잊어, 그래야 살지.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커버를 걷었다. 몇 걸음을 떼더니 다시 돌아서 테이블에 손을 짚고 창민에게 말했다. 

   그것도 질서라면 질서라고 할 수 있지. 복잡할 게 뭐가 있어. 사는 게 장거리 계주라고 생각하면 답이 바로 나오지 않나. 달리다가 넘어질 수도 있고, 바통 넘겨받을 사람까지 누가 생각하겠어. ……궁금한 거 더 없어요? 오늘은 웬일로 예약 손님이 없네. 

   창민이 뭉그적거리고 일어나지 않자 여자는 차를 마셔야겠다고 했다. 카밀러 티백을 꺼내더니 창민에게도 마실 건지 물었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여자가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창민은 대답 대신 테이블에 깔린 그림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 그림 재밌죠. 그리는 손은 그려지는 손을 그리고, 그려지는 손은 또 저렇게 시작도 끝도 없이 돌고 도는 거야.

   창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이라고들 하죠. 하지만 모든 순간을 다 우연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 

   미스터, 뭐라고 부르죠?

   강창민입니다.

   난 살아가는 게 이벤트의 연속이라고 생각해요. 같은 시간이 끝없이 반복되지만 매일 다른 사건들이 일어나잖아. 여기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죠. 하기야 세상에 일어나면 안 될 일이 어디 있겠어. 그건 그렇고, 갈 데는 있어요?

   여자가 창민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난감했다. 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숨을 한번 삼킨 창민이 의자를 조금 뒤로 밀어 테이블에서 떨어져 앉았다. 

   여길 좀 봐주었으면 좋겠는데. 

   무슨 말씀인지?

   하루 여섯 시간, 주급으로 계산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창민이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스터 강이 사무실을 잠깐 봐주면 해서. 어딜 좀 다녀와야 해요.

   창민은 비자를 해결해 주겠다는 한마디에 여자가 내미는 손을 덜컥 잡고 말았다. 여자는 타로 하우스를 굳이 사무실이라고 했다. 수납장 하나를 열어 침낭을 보여주었다. 젊은 남자가 있기에는 좀 쪽팔리겠다는 혼잣말이 창민의 귀로 파고 들었지만 못 들은 체했다. 그녀의 말투는 ‘너 말고도 있을 사람이 많다’는 식이었다. 창민은 더한 것도 참을 수 있다는 오기가 생겼다. 여기서 자신을 알아볼 사람도 없을뿐더러 더는 나빠질 일도 없었다. 머물 곳이 생겨 막힌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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