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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언주 Nov 13. 2022

그리는 손

5화

   누군가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창민은 컵라면을 꺼내려다 말고 문을 노려보았다. 노크를 하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화장을 지운 터라 창민은 오늘 일이 끝났다고 했다. 남자가 한국어로 뭐라 중얼거렸다. 우리말에 창민은 컵라면 하나를 더 꺼냈다. 

   라면 드실래요?

   그럴까요.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컵라면을 받아서 들고는 뜨거운 김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나무젓가락을 벌려 뚜껑 가장자리에 끼웠다. 두리번거리는 남자의 표정 속에서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목이 늘어진 셔츠와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는 패션이라기엔 너무 후줄근했다. 창민은 교민 잡지를 한쪽으로 밀었다. 연필을 쥔 손이 드러났다. 조명 때문에 바탕이 누렇게 보였다. 남자는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옆에 쌓아 놓은 카드를 한 장씩 뒤집었다.

   카드를 읽을 줄 아시는 모양이죠?

   창민이 물었다.

   아뇨. 

   그는 무안한 듯 얼른 손을 거두었다. 

   유튜브에서 선생님 채널 자주 봤어요. 예전에 여기 위에 있는 호텔에서 일했거든요. 그때는 여길 창고로 썼는데…….

   구독 좋아요, 하고 남자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창민은 쌓인 카드 가운데 한 장을 뽑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좋네, 한마디 던지고는 카드를 섞어 부채 모양으로 뿌렸다. 그리고 남자에게 세 장을 뽑으라고 했다. 남자는 인내 카드와 두 장의 펜터클 카드를 뒤집었다. 창민이 미소를 지었다. 좀 힘들더라도 견디다 보면 사방이 환해지겠네. 여기, 돈 문제도 곧 풀리겠고……. 

   냄새 때문에 창민이 일어나 문을 비스듬히 열어 놓았다. 냉장고 쪽으로 간 창민이 맥주 캔을 꺼내는 것을 보고 남자의 입 꼬리가 실룩거렸다. 오래된 친구 집에 온 사람처럼 편안하게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엘리자베스 호텔에서 일하면서 한동안 사정이 좋았다고 했다. 낯선 사람들이 왔다가더니 건물 사장이 바뀌고 백패커로 리모델링되었다고 했다.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빈손으로 쫓겨났다고, 밀린 임금을 떼먹으려는 현지인들이 흔히 하는 수법이었는데 모르고 당했다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창민이 카드를 한 장 더 뒤집으며 말했다.

   파동이 맞지 않았던 거지.  

   남자는 신기하다는 듯이 의자를 바짝 끌어당기면서 다가왔다. 무슨 말이든지 좀 해달라는 표정이었다. 

   이것 봐요. 다섯 개나 되는 막대기를 힘들게 지고 가는 거. 일은 많아도 하는 일마다 소득은 없었네. 피곤하다, 피곤해. 그리고 여기 무임승차 하려는 사람은 누구지? 

   남자는 그동안 호주에서 겪었던 일을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장황한 이야기에 밤을 새우고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창민은 턱을 괴고 무심히 카드를 한 장 더 넘겼다. 그리고 덤덤한 표정으로 수레바퀴 그림을 두드렸다. 

   남자가 카드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그게 뭐냐는 눈빛이었다.

   터닝 포인트라는 말이지. 곧 인생의 전환점을 맞겠네! 

   남자의 입 꼬리가 흔들렸다. 거울 속에 남자의 등과 어깨가 서서히 펴지는 듯 보였다. 창민은 이곳에 처음 오던 날, 자신의 뒷모습을 본 기분이 들었다.   

   어딜 좀 다녀와야 하는데…….

   조심스럽게 창민이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는 이제 겨우 궁둥이 붙이고 앉았는데 벌써 일어나야 하느냐는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좀 계실 수 있어요? 며칠만 봐주면 되는데……. 

   순간 남자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사이에, 얼마든지요. 그는 창민의 손등을 슬쩍 쳤다.   

   아닌 게 아니라 창민은 그와 한 시간 남짓 같이 있었을 뿐인데 오래 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익숙한 기분이었다. 남자는 1층 로비로 올라가서 씻으면 되는지 물었다. 창민이 내부에 있는 집기를 설명하려 하자 남자가 지루한 듯 하품했다. 알았으니 그만 꺼지라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에게 창민은 침낭을 내주었다. 배너를 아직 들여놓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창민은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카메라를 챙긴 창민은 타로하우스를 둘러보며 소리 없는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사는 건 이어달리기라고 닥터 백이 그랬었다. 

   계단을 올라가자 거친 바람이 창민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안경에 부딪힌 빗줄기에 어둑한 거리가 순식간에 흐릿하게 뭉개졌다. 가로등 불빛이 사방으로 번져 보였다. 멀리서 마지막 트램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입술을 굳게 다문 창민은 지퍼를 목까지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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