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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언주 Nov 13. 2022

그리는 손

4화

   「한국어 상담 가능」 

   창민은 세움 간판에 한 줄을 더 써넣었다. 야시장이 열리는 수요일은 밤늦도록 입구에 불을 켜놓았다. 배너를 보고 들어오는 손님이 점점 많아졌다. 주춤거리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앉을 자리를 손짓했다. 출입구 바로 옆에는 전신 거울이 하나 걸려 있었다. 창민이 손님과 마주 앉아 있으면 앞모습뿐 아니라 그들의 뒷모습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호기심에 찬 사람들이 두리번거리기를 마칠 때까지 창민은 기다렸다. 닥터 백이 했던 것처럼, 그들보다 삶에 능숙하다는 투로 말을 걸었다. 간결하게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자신들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잠자코 들어 주기만 하면 됐다. 처음 한동안은 무슨 소리를 해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창민은 자신의 숨겨진 재능에 놀랐다. 이야기를 잘 들어 주고 상대의 감정을 읽어 주면 되는 일이었다. 의도를 가지지 않고 다 알고 있다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운에 줄을 대는 문제라면 이번에는 그냥 운에 맡겨 보기로 했다. 카메라 앵글을 고정하고 가장자리에 수정 구슬을 배치했다. 카드를 뿌리는 손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효과적인 연출을 위해 실시간 점사를 찍는 날은 눈을 강조한 화장을 짙게 했다. 사람들은 얼굴만 나오지 않으면 어떤 영상을 찍든 개의치 않았다. 

   유학생은 학생이라 10% 할인. 워홀러는 워홀러여서, 관광객은 여행객이라 특혜가 있었다. 한 번 다녀간 사람은 친구의 친구까지 데리고 왔다. 창민은 단편영화를 찍는 기분으로 그들의 인생을 연출하고 카드를 뿌렸다. 

   그냥 가만히 있지 그랬어. 머리가 왜 이렇게 자주 아파? 창민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르는 시늉을 한다. 그러고는 아랫입술을 조금 내밀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를 어쩌나 동부보다는 서남쪽에 귀인이 있는데…….

   그라운드에 선 투수는 투구하기 직전 타자의 긴장된 찰나가 한눈에 잡히는 법이다. 앞에 앉은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슬로비디오처럼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불안이나 호기심이 얼굴을 드러낸다. 흘리는 말에도 사람들은 지도 앱으로 호주의 서남부에 어떤 도시가 있는지 확인했다. 창민은 그런 사람들에게 일부러 반말을 했다. 몇 가지 단순한 문장과 표정만으로도 웬만한 인생을 표현하기에 충분했고 돌려막기가 가능했다. 손님이 많아지면서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닥터 백의 여유 있는 몸짓이 그에게도 배어 나왔다. 시간을 더 늘릴 필요가 있을 때는 손가락 끝으로 카드를 가볍게 두드렸다. 

   돌아온다던 닥터 백은 날짜를 점점 미루더니 언젠가부터 연락이 끊어졌다. 항공권만 구하면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던 창민은 닥터 백이 돌아오면 떠날 거라고 생각을 바꿨다, 지하공간이 좁긴 해도 지내기에 불편하지는 않았고, 수입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어느 날인가 테이블 커버를 걷는데 새삼스레 손을 그리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창민은 연필을 들고 그림 위를 따라 그려 보았다. 유리에 연필 끌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그림을 꺼내 보니 연필 밑그림을 따라 그린 종이에 미세하게 잉크가 번져 있었다. 그림 뒷면에 닥터 백의 사인이 있었다. 카드의 주도권은 뽑는 사람이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 있다고 하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창민은 가만히 자기 손을 펼쳐 보았다. 그림을 제자리에 다시 밀어 넣고 한 달만, 딱 한 달만 더 있기로 했다. 

   산책을 나갔다가 브런즈윅 남쪽까지 내려갔다. 아시안 마트에 들러 김치와 컵라면도 샀다. 마트 앞에는 신간 교민 잡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잡지는 읽을거리가 별로 없지만, 구직광고가 많아 종류마다 한 부씩 챙겼다. 

   사무실로 돌아와 위클리 타임지를 펼쳤다.      

   「특종, 워킹 홀리데이 취업 사기」 

   커버스토리가 눈에 들어왔다. 브로콜리 농장과 형도가 떠올랐다. 창민은 목차에서 쪽수를 찾아 다시 넘겼다. 한국계 뉴질랜드 시민권자 K씨와 중국계 호주 시민권자 B씨가 연루된 비자 브로커 국제 취업 사기 사건이었다. 그들 가운데 K씨는 법정 구속이 되었고, B씨는 지명수배가 내려졌다. 이민법에 따라 추방된 사람들 속에 형도가 있었다. 피해자는 한국과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에서 온 워홀러였다. 금액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호주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아 피해를 키웠다. 지명수배 기사와 함께 현상금이 붙은 닥터 백의 사진이 있었다. 머리에 전류 흐르는 소리가 지나갔다. 노트북을 켜서 오지문과 호주의 푸른 바다, 몇 개의 사이트를 뒤졌다.      

   ‘호주로의 유학, 해외 취업. 워킹홀리데이. 계획부터 수속, 비자 신청 가이드 및 출국 전 오리엔테이션까지 여러분의 안전한 해외 취업을 도와드립니다. 여행 비자로 입국하신 분의 상담 및 모든 신청 과정은 무료로 진행됩니다. 0403-921-2700’  

   눈을 감고도 외우는 번호였다. 공을 잘 치는 사람은 생각대로 공이 날아가고, 재수 없는 놈은 걱정한 쪽으로 날아간다더니. 꼰대들이 하는 말은 왜 결정적인 순간에 딱 들어맞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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