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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지 Apr 23. 2024

행복은 어떻게 촉발하는가

생각과 감정의 메커니즘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동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뇌가 시스템화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각적 자극을 마주하게 되면 그 알아서 무의식이 작동하여 생각을 떠오르게끔 하고 그 생각으로 인해 우리의 '감정'은 인출된다. 감정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거창한 것이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의 프로그램화된 사고방식에 따라 인출되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다.

함수박스를 예로 들자, 우리는 함수박스에 x라는 값을 넣으면 그와 동시에 y값이 인출된다. y값은 x값의 영향을 받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것이다. 따라서 프로그램화된 뇌가 자신의 방식대로 넣어 특정한 값을 인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무의식적으로 생각이 번뜩 들고 그에 따라 감정이 자동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사고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저장된 프로그램에 따라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프로그램은 어린 시절 트라우마(좋은 기억), 가족관계, 부정적인 장기적(긍정적) 기억으로 세팅된다. 20년을 살았다면 태어난 순간부터 경험한 모든 기억들이 단기기억에서 장기기억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에 따라 뇌는 세팅되며 그에 따른 무의식적인 반응으로 감정이 인출되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라고 한다. 좋은 학벌, 번지르르한 직장, 잘생기고(예쁜) 배우자, 의지할 수 있는 친구 수 이러한 유무형적인 것의 집착하는 것도 결국 행복이라는 하나의 목표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불행한가? 우리가 만약 불행하다면 어떤 이유로 불행할 수 있을까? 그들은 외모가 예쁘지 않아서, 뚱뚱해서, 좋은 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친구가 많지 않아서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과연 진실인가? 외모가 예쁘지 않고 뚱뚱하고 좋은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친구가 없는 것은 과연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객관적인 기준은 누가 명확하게 제시하는가.


우리는 매 순간 '생각'의 속임수에 걸려든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한 생각이 바로 감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게 과연 진실일까? 예쁘지 않고 뚱뚱하고 친구가 많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한 것이 아니고, 예쁘지 않고 뚱뚱하고 친구가 많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한 것이다. 우리는 별로 잘나지 않고 열등해 보이는 사람이 자존감 높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럼 그들도 객관적인 '사실' 때문에 불행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매 순간 끊임없는 속임수에 말려들어가고 있다. 사회문화적인 관습과 질서가 우리를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그 사회문화적인 기준의 토대에 따라 사람의 외모는 우열이 가려지고, 좋은 학교별로 줄 세워지곤 한다. 물론 사회문화적인 가치를 터부시 할 수는 없다. 그러한 가치도 결국 생존해야 하는 우리 사회에서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발판이 되고, 기폭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사람 존재의 절대적 가치이다. 사회문화적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회의 기준에, 존엄한 내가 흔들린다면 그것은 더더욱 중요한 사람 자체의 절대적인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다. 기준에 따라 변화하는 유동적 가치보다 불변한 가치를 가진 사람이라는 그 자체로 너무나 완벽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때로 잊어버리곤 한다.


우리는 '생각'을 조심해야 한다. 만약 아내가 남편 때문에 불행하다고 가정해 보자, 아내는 매일 남편에게 양말은 벗어서 제자리에 가져다 두라고 말하지만 그 말을 무시하고 거실 한복판에 벗어대기 일쑤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의 말은 듣지도 않는다며 힘들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남편이 양말을 제자리에 안 두고 나를 무시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사고를 전환해보자. 남편이 양말을 제자리에 갖다놔야하는 이유가 과연 있을까? 우리가 생각을 할 때, 상대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아니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고 틀을 가져다 놓고 상처를 받는다. 함수를 예로 들면 남편의 행동이 출력될 때마다 자동으로 아내는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럴 땐 꼭 그래야 한다는 고정불변한 생각보다는, 남편의 행동에 대한 평가를 '바람'으로 바꿔보자.


- 나는 남편에게 양말을 제자리에 가져다 뒀으면 좋겠지만, 아니면 말자.

이렇게 그 생각과 감정의 주체성을 '나'로 가져오는 순간 생각과 감정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또 다른 예시로, 어떤 음식점에 갔는데 직원이 불친절하다고 해보자. 물론 불친절하다는 사실이 누구에게도 썩 좋은 상황으로 와닿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고정불변한 자신의 생각에 갖히다보면 그 생각에 따른 인출물인 감정까지 부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꿔보자.


- 직원이 나에게 친절했으면 좋겠지만, 불친절하구나. (나의 문제로 가져오지 말고) 오늘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

이렇게 상대방의 행동과 감정을 상대에게 돌려주고, 남의 생각을 함부로 예단하고 판단하는 행동을 멈췄더니 기적이 일어난다. 물론 자극에 따른 순간적인 감정이 없어지지는 않지만, 과거의 행동과 생각보다는 불행한 감정이 덜해진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오늘 직장 면접시험에서 떨어서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해서, 자기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면 이러한 방법을 이용할 수도 있다.


- 면접이 없었다면, 나의 면접 실력도 제대로 알 수 없었을 거고 떨어진다고 하면 성공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면 충분하다.

이런 식으로 긍정적으로 사고를 전환해 주면, 곧바로 긍정 회로가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난 상황에서도 건강한 자기비판이 가능하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비하가 아닌, 자신의 행동의 '건설적인 비판'을 하는 것이다. 때로는 자신에게 정말 실망하고 무력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럴 땐 훌륭한 사람의 바보 같은 실수일 뿐이라고 자신을 다독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라고 하지만,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해 통찰하고 돌아보고 감정을 조절하는 것을 배우지는 못하는 것 같다. 학교폭력의 원인을 단편적으로만 여기는 게 그 예다. 학교폭력을 오로지 상대방을 존중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다면적으로 본다면, 자신을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마음의 단단함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는 행위도 스스로를 위해 중요하다. 이러한 것도 교과목에 추가하여 모든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이런 이론적인 몇 문장 되는 이 글에 와닿기라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면서 절대적인 인간 본연의 존엄성보다는 사회가 만들어낸 시시각각 변하는 상대적인 가치에 목을 매고는 한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불행하다면, 우리는 사고의 전환을 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불행한 감정은 '생각' 때문에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 생각, 생각을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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