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어떻게 잘 보낼까 생각하며 집안 분위기도 일찌감치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놓고 크고 작은 이쁜 포인세티아들로 여기저기 자리를 잡아 주고 전등불을 켜두니 따뜻한 불빛이 포근함을 안겨 주었다.
올 일 년도 잘 보냈다고 11월 끝자락에서 혼자 중얼거렸는데 아침에 울린 전화 한 통이 나의 안도감을 조각내고 말았다.
밀양 숙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절임 배추를 한창 팔아야 할 이때쯤에...
서울 사는 숙모님의 딸은 올해 수능시험을 마친 둘째 아들 결과까지 보고 밀양에 내려와 해마다 그랬듯이 푹 쉬며 일손도 보태고 숙모님이 담아주는 김장김치와 채소들을 싣고 가려고 했을 텐데….
마당에 뽑아놓은 튼실한 배추들만 찬바람에 낡은 호랑이 담요 뒤집어쓴 채 쌓여있었다.
수척해진 숙부님의 얼굴엔 숙모님의 죽음이 실제상황이란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일가친척들이 놀라 달려오고 오열할 때마다 같이 따라 우시는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이별은 참 슬프다.
특히 부모님이 떠나실 때 그 슬픔은 더욱 그렇다.
돌이켜 보면 나도 내 엄마가 돌아가신 때가 꽤 오래되었는데도 마치 몇 년 전 일인 것 같고 너무 기억이 또렷해 힘들 때가 많았었다. 부모와의 이별은 시간이 지난다고 묻히거나 잊히지 않는다. 그저 강제적으로 마음속 깊숙이 꾹 눌러 놓는 것일 뿐.
장례식이 끝나갈 때쯤 사람들은 남아있는 사람을 걱정한다. 어떻게 다 감당하며 살 거냐고.
몇 년 전 시작한 야생 딸기를 처음 수확했을 때 가져가서 먹어보라며 싸 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뿐이 아니다. 감나무와 매실나무 그리고 절임 배추까지. 그 모든 것이 시골살이의 수입원이었다. 이제 숙모님이 안 계시니 숙부님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하기엔 불가능할 것이다.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첫 밤을 보낼 때 또 얼마나 놀라실까. 옷걸이에 걸쳐져 있는 몸빼바지며 현관에 벗어놓은 흙 묻은 장화며...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숙부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텐데 말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을 수없이 대뇌이며 자신을 자책할지도 모르겠다.
숙모님은 집안에서 일꾼이라고 할 만큼 집안 대소사의 일들을 맡아 왔었다. 음식솜씨도 좋지만 나눠 주기도 좋아하시던 숙모님은 힘든 일임에도 마다하지 않고 해 오셨다.
“힘들어도 내가 이래 하는 기는 다 내 좋아서 하는기다. 이래하믄 희경이, 희준이가 낭중에라도 복 안 받겠나.”
숙모님한테는 조상께 바치는 제사 음식은 마치 신께 기원하는 제물과도 같았다. 갖가지 귀한 생선과 과일들, 그리고 반찬들을 바리바리 싣고 와 사촌까지 일일이 포장해서 나누어 주셨다. 또한 누구든 숙부님과 숙모님이 계시는 밀양집을 방문하면 나라님이라도 맞이하듯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리셨다.
나는 장례식장에 멍하니 앉아 숙모님은 과연 본인의 운명을 알고 계셨을까? 하는 질문을 끝없이 했다.
절임 배추 판매가 끝나갈 무렵 숙모님이 힘들어하니까 숙부님은 병원에서 며칠 입원해 있으면서 영양주사도 맞고 좀 쉬었다 오라고 입원시켰다.
병원 가는 길에 이웃에 사는 숙모님의 시누이 집에 먹을 것을 해서 전달하고 올해는 배추 농사가 잘되었으니 이십 포기씩 뽑아 누구누구에게 주라고 숙부님께 일러두고 가셨다고 하니 그 누구누구 속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치 마지막으로 베풀고 가는 듯한 모습이 아른거려 마음이 더욱 아팠다.
숙부님은 명령을 하달받은 충실한 부하직원처럼 전화했다. 배추를 부쳐 주시겠다고. 숙모님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남편은 김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만 받겠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다음 날 숙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카톡 부고 문자를 받았다.
사인은 심장마비.
입원한 날 바로 그날, 병원 화장실에서.
남편과 나는 장례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숙부님 집을 들러 그토록 주시고 싶어 했던 배추 두 통을 차에 싣고 왔다.
차를타고 돌아오는 길 내내 ‘있을 때 잘해라’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것은 부모를 위해서가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떠난 뒤 잘하지 못했던 것들로부터 괴로워하지 않으려면, 후회를 최소한 줄이려면 그리해야 한다는 것을.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린 놓친 뒤에야 알게 된다.
만약 숙모님의 딸이 아들 수능이 끝나고 바로 숙모님께 왔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이젠 남아있는 사람들끼리 다시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
세월이 약이란 말은 여기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일 뿐이니까. 숙부님께는 위로가 필요할 때이다. 너무 깊은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마지막을 지키지 못 했다는 죄책감에 매몰되지 않도록...
홀로 살아가야 할 삶에 평안함이 있기를 바란다.
혹독한 겨울이 괴롭혀도 동백나무의 열매는 맺히고 꽃은 피듯이 숙부님의 아픔이 자신을 쓰러뜨릴 만큼 크다고 할지라도 고통의 통로를 잘 지나가고 있음을 느낄 때 갑자기 홀로 떠난 숙모님에 대한 충격이 그리운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