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z Nov 22. 2022

산, 산 그리고 산 (1)

2일 차 - 41코스 일부 + 42코스

지난밤 푹 잤던 걸까? 일어나는데 몸이 개운했다. 중간에 깨지 않고 이어서 통잠을 잔 것이 정말 며칠만인지 모르겠다. 알람 맞추는 것을 깜빡해 늦게 일어났지만, 전 날 가방과 옷을 미리 챙겨둔 덕에 금방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첫 둘레길을 걷다가 생겼던 오른쪽 발목 통증도 이젠 다 나은 듯했다.


이 두 번째 둘레길 걷기를 준비하면서, 나는 무엇보다 가장 먼저 버스 시간표를 챙겼다. 지난번 둘레길 41번 코스를 걸을 때 나를 가장 애먹였던 부분이 버스였기 때문이다. 이번엔 다행히 안성시 홈페이지에서 엑셀 형식으로 정리된 버스 시간표를 구할 수 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업데이트된 것인지 알 수 없어 불안했지만, 그래도 믿을 구석이 이 시간표뿐이어서 핸드폰에 그 페이지를 저장해두었다. 오늘은 반드시 성공적으로 100번 버스를 타고 말리라 다짐을 하며, 버스의 예상 도착 시간인 12시보다 30분 일찍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공기가 제법 찼다. 이제 조금 있으면 입김이 나오겠구나 싶었다. 길에서 피로감을 쌓지 않으려고, 길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와 따뜻한 원두커피를 한 잔을 사서, 샌드위치는 가방에 넣어두고 커피를 홀짝거리며 12시가 되길 기다렸다. 그러나 정류장이 바로 내다보이는, 왕복 2차선 길 바로 건너편의 편의점에 있으면서도 영 불안했다. 타려는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까지 1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버스를 놓쳤을 때 생길 수 있는 일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물론 버스를 놓쳐도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초초했다. 변수들을 최대한 없애고 싶었다. 결국 나는 편의점에서 편히 기다리지 못하고, 버스 도착 예정 시간까지 15분이나 남았는데도 버스정류에서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 게 나답다 싶었다.


일이 잘되는 경우보다 안 될 경우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이 떠오르는 것은, 불안도가 높은 내 성격에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 사실 예전엔, 그러지 말아야지,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지, 의미 없는 불안은 느끼지 말아야지, 라며 이성과 합리로 내 불안함을 통제하려 했었다. 그리고 느긋하거나 대범한 사람을 마음 깊이 부러워하며 그 침착함을 닮으려고 애를 많이 썼었다. 그러나 요새는 가급적 내 불안함을 그냥 내버려 두려고 하고 있다. 왜냐하면 생각을 통해 내 감정이 실제로 조절된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안해하는 자신을 타박하지 않고 그 불안함을 수용하고 차분하게 관조했을 때, 불안이 오히려 통제 범위 안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에이그, 내가 또 불안해하는구나. 그래 뭐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라고 가급적 나를 다독거리려고 한다. 남들보다 불안함을 많이 느끼는 것이 약간의 남다름 일뿐 못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려 하고 있다.


버스정류장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서 있으니, ‘파 한 단에 삼천 원 삼천 원, 달걀 한 판에 육천 원 육천 원’ 확성기 소리가 요란한 야채 트럭이 다가와 길 건너편에 차를 세우고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주인아저씨가 녹음된 가격표를 읊고 다니는 저런 트럭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었나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집에 있다가 야채 트럭 소리를 듣고 급히 지갑을 챙겨 나가 달걀이니 두부니 흥정하며 물건을 구입하시던, 이제는 아흔을 넘긴 우리 할머니의 젊었을 적 모습이 오랜만에 기억났다. 그 당시 우리 할머니 나이쯤으로 보이시는 아주머니 한 분이, 까맣고 미끈한 승용차를 몰고 가다 트럭 옆에 차를 세우고는 파 한 단을 구입하는 것이 보였다.


커피를 다 마시고 빈 컵을 주섬주섬 배낭에 넣자마자, 핸드폰 화면 속에서 반짝이는 점으로만 보였던 100번 버스가 나타났다. 저게 진짜로 운행하기는 하는구나, 싶어 안심이 되었다. 버스에 무사히 오르고 나서야, 아침부터 나를 볶아대던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풀려날 수 있었다. 100번 버스는 지난번 내가 걸었던 궤적을 따라 달렸다. 마둔 저수지 윗길도 저수지의 물 건너 언뜻언뜻 보였고, 진하게 탄 미숫가루 색의 물이 흐르던 공사장도 지났다. 나는 종일 걸었던 길을, 버스는 10분 20분 만에 지나는 것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안성 시내를 출발한 지 25분 만에 석남사 입구가 있는 버스 종점, 상중리 상리에 도착했다.



이번 계획은 석남사를 거쳐 서운산 정상을 찍고 최소한 청룡사까지 가서 41번 코스를 완주하는 것. 일단 첫 번째 목적지인 석남사를 향해 걸었다. 평일이어서인지, 걷는 동안 차와 거의 마주치지 않아 도로를 내가 전세 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코스는 주로 산을 지나니, 오늘은 걷는 내내 이렇게 조용하고 나무 내음이 날 것이라는 기대로 마음이 설렜다. 길 옆으로 흐르는 계곡의 청량한 물소리를 들으며 완만한 포장도로를 약 20분쯤 걸으니, 드디어 석남사가 보였다.


석남사는 굉장히 아담한 절이었다.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을 이곳에서 했었다는 안내판이 절 초입에 세워져 있었지만, 난 그 드라마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보다는 석남사의 독특한 구조에 더 관심이 갔다. 석남사의 천왕문은 가파른 경사 바로 아래 놓여있다. 그래서 절을 방문하는 사람은 절의 입구에 해당하는 그 천왕문을 나섬과 동시에 네 단으로 이루어진 계단들을 연속해서 오르게 되어있었다.  이런 구조 때문에 어둑한 천왕문을 지나자마자 나타난 그 계단은 하늘을 향하는 길처럼 보였고, 그 하늘 끝에 대웅전이 놓인 것만 같았다. 산비탈의 경사 때문에 경내가 넓지는 않았지만, 이런 구조 덕에 석남사 특유의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나는 따로 의지하는 종교는 없지만, 웬만하면 성당에 들어서서는 성호를 긋고 절에선 삼배를 하려고 한다. 그래서 석남사에서도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를 올렸다. 삼존불에 삼배를 마치고 뒤로 돌아서니, 불상이 보고 있던 풍경이 내 눈에도 들어왔다. 활짝 열린 대웅전 문 밖으로는. 내가 올라온 계단과 그 아래 천왕문이 차례로 내려다 보이고, 천왕문의 너머로는 고운 단풍을 걸친 서운산 자락이 펼쳐졌다.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그 구도가 참 독특했다. 석남사 대웅전의 부처님은 사계절 바뀌는 것을 여기서 이렇게 다 내려보시겠구나 싶었다.

절을 한 바퀴 둘러보다가 절의 역사가 적힌 안내판이 놓여 있길래 그것도 읽어보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고려시대에 처음 짓고 그 뒤로 개축이 많이 되었다는 것 외에는 기억에 남은 것이 별로 없다. 아마 역사에 대한 기초 지식이 거의 없기 때문이겠지. 이럴 땐 상식 부족과 나쁜 기억력이 참 원망스럽다. 하지만 역사를 모르고도, 석남사의 위치나 구조는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지난번에 마치지 못한 41번 코스의 마지막 구간을 끝내기 위해, 나는 절을 나와 산에 들어섰다. 등산길 초입에 11월부터 1월까지는 멧돼지들의 교미기간이니 멧돼지를 주의하라는 경고 문구가 세워져 있었다. 이런 산에도 멧돼지가 있나 싶어 신기했고, 마주치는 일이 실제로 있나 싶어 의아했다. 석남사를 나와 작은 계곡을 건너면 그때부터 서운산 등산로가 시작되는데, 초반에는 계단 없이 완만한 경사로만 있어 걷기 쉬웠다. 게다가 지그재그로 오르는 길의 양 옆에 키가 많이 크지 않은 단풍나무가 그 가지를 터널처럼 드리우고 있어, 완만한 굽잇길을 노랗고 붉은 단풍 터널이 아름답게 장식해주고 있었다. 주말에는 어떤지 모르지만 주중에는 등산길이 굉장히 한산했는데, 그 덕에 단풍 터널을 사진에 담아내기 정말 좋았다. 예쁜 단풍도 두세 잎 따서 수첩 사이에 소중하게 끼워두었다. 이 멋진 단풍 터널은 석남사에서부터 1.5km 가까이 이어져 있어, 가을에 참 방문해볼 만한 것 같다.


서운산 정상에 오르는 길의 2/3 정도는 완만한 경사로, 나머지 1/3은 등산로다운 경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석남사를 방문한 사람들 대부분이 단풍만 즐기고 가는지 단풍 터널을 지나 정상을 향하는 동안 사람과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 혼자 이 산을 전세 낸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공사하는 소리도 차 달리는 소리도 없었다. 새소리와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 알 수 없는 동물이 부스럭대는 소리만 들렸다. 걷는 내내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스럭 소리는 상당히 자주 들렸는데, 문득 이 산길에 나 혼자라고 생각했던 게 실은 상당히 인간 중심의 사고는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이 산에는 분명 새들, 다람쥐, 곤충 등의 작은 동물들이 많겠지. 만약 그들 하나하나에게 모두 방울을 달아놓는다면, 이 산에서 나는 방울 소리로 내 귀는 떨어질 듯하지 않을까. 사람들에게 산은 도시의 반대 개념과 가까운 곳이지만, 이 산의 생물들에게 산은 일종의 도시 같은 공간이리라. 복닥복닥 치열하게 모여사는 공간.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순간 내가 남의 터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이 훅 와닿았다. 그들이 주인이고 내가 방문객이니, 실례합니다만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가급적 조용히 산을 즐기고 흔적은 최소한으로만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상까지 500m 남았다는 안내판이 보였다. 길은 처음보다 눈에 띄게 가파라지고 있었다. 그즈음 갑자기 날이 흐려지고 바람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비라도 오려는 것일까. 주변의 공기가 냉랭하게 바뀌며 당장이라도 비가 내리는 게 이상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산에 사는 생물들 생각을 하며 걷던 중이라 그런지, 동물들이라면 비가 올지 안 올지 예보 없이도 알 수 있을 텐데, 싶었다. 사실 사람도 동물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쩌다가 다른 동물들은 가진 기본적인 눈치를 잃게 된 걸까. 날씨가 그저 잠시 거칠어진 것인지, 비의 전조 증상으로 거칠어진 것인지 나로선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비에 대응할 수 없는 신발과 옷을 걸치고 있는 터라, 만약 비가 많이 내린다면 나는 41코스 완주를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비만 내리지 않으면 좋겠다고 계속 어두운 하늘 눈치를 보며 정상으로 향했다. 갑자기, 지난주 해 질 녘 내가 이 길을 걸으려고 했었다는 게 기억났다. 이 정도로 구름이 짙게만 끼어도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지고 겁이 나는데, 내가 어둑할 때 이 길을 걸었으면 어땠을지 떠올려보자 갑자기 기분이 서늘해졌다.


석남사로부터 한 3~4km쯤 걸었을까. 계속 사나울 것만 같았던 날씨가 소강상태에 들던 오후 2시경, 나는 서운산 정상에 도착했다. 날이 흐려 가시거리가 좋지 않은 것은 아쉬웠지만, 정상이 주는 개방감에 기분은 개운했다. 정상엔 나뿐이었다. 정상 귀퉁이에 있는 벤치에 잠시 짐을 풀고, 아까 사두었던 샌드위치를 먹었다. 바람에 땀을 식히며 사람 소리 하나 없는 정상에서 즐기는 샌드위치와 물 맛은 달콤했다. 정상에서의 전망과 분위기를 혼자 한껏 즐긴 뒤 내려갈 채비를 하고 있자니, 그때서야 사람 몇몇이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이 살짝 소란스러워질 때 즈음 나는 올라온 방향과 반대쪽으로 나있는 등산로를 이용하여 하산을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대와는 너무도 달랐던 첫 경기둘레길 걷기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