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에 살면서 감수해야 하는 여러 가지 불편함 중 두 번째는 단연코 TV다. 부모님은 TV를 좋아해도 너무 좋아하신다. 거실과 안방에 각각 크지 않은 TV가 있는데 눈을 뜨는 순간부터 TV를 트셔서 눈감고 주무실 때까지 보신다. 주무실 때는 끄니까 다행이라 해야 할까. 문제는 내가 TV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학생 때는 종종 TV를 보곤 했지만 정말 가끔만 본 거라 나는 항상 보지도 않는 TV, 앉지도 않는 소파가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거실이 항상 집에서 데드스페이스로 느껴졌다. 대체 왜 거실에는 TV와 소파가 있어야 하는 걸까. 나중에 내 집이 생기면 나는 TV를 사지 않아야지. 거실의 서재화라는 열풍이 불기도 전에 15년 전부터 나는 미래의 내 집을 그렇게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역시 미취학아동에게도 TV가 좋지 않다는 사실 역시 누구나 알고 있다. 이전 신혼집에는 77인치의 거대한 TV가 있었지만 나에게는 아무 쓸모없는 가전이었다. 아기 아빠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TV를 사긴 했지만 육아휴직을 하고 내가 하루종일 집에서 아기를 보는 동안 집 안은 고요했다. 몇 달 동안 혼자 집에서 대화할 사람이 없자 TV를 한 번 틀어보긴 했는데 TV를 틀어놓고 나는 바운서에 누워있는 아기만 바라봤던 이후로 다시 TV는 콘센트가 뽑혔다. 나는 조용한 집이 좋다.
처음에 우리가 친정에 왔을 때는 부모님은 TV도 켜지 않고 하루종일 아이와 놀아주시기 바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원래의 생활패턴으로 돌아갔다. 요즘에는 하루종일 집에 TV가 켜져 있다. 어쩔 수 없이 아이가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은 친정에서 살기로 한 이상 내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그 노출되는 미디어가 대체로 트로트 예능, 바둑, 중국 드라마라는 것에는 굉장히 불만이 많았지만.
아이가 "엄마 TV 봐도 돼요?"라고 물으면 아이가 아니라 부모님에게 대답하듯 "안돼. 오늘 30분 봤으니까 내일 보자"라고 크게 말하곤 한다. 그러면 내가 가진 불만을 알아챈 아빠가 TV를 꺼주실 때도 있지만 엄마는 얄짤없다. 내 집에 들어온 건 너니 나는 내 라이프스타일을 지키겠다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엄마가 얄미우면서도 틀린 말은 아닌지라 수긍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통탄스럽다. 가끔 부모님이 함께 집을 비우신 날에는 고요한 집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때는 너무나도 행복해서 빨리 독립을 하고 싶다는 의지가 샘솟는다.
청각이 특히 예민한 나는 그 의미 없는 바보상자에서 나는 소음이 너무 거슬린다. TV시청 자체가 싫지만 부모님에게 내가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순 없는 노릇이니 가만히 있지만 눈은 감을 수라도 있지 소음을 나까지 견뎌야 한다는 게 너무 싫다. 방에서 보시면 차라리 나았지만 거실에서 놀다가도 TV소리가 들리면 아이는 할머니 방으로 뛰어가곤 하는 것도 싫다. 하지만 유튜브에 비하면 차라리 TV가 낫다. TV를 못 보는 상황(예를 들면 부엌이나 화장실에 계실 때)은 미디어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엄마는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켰다. 에어팟 따위는 사용하지 않으시는 엄마는 집주인답게 핸드폰 볼륨을 한껏 키워놓고 부엌에서 화장실로 화장실에서 방으로 이동하곤 하셨다. 예전에는 유튜브를 보시다가 도경완(장윤정 배우자)이 홍진영(트로트 가수)이랑 바람이 나서 장윤정이랑 이혼을 한다나 뭐라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셔서 나랑 크게 싸운 적이 있다. 뭐 그런 걸로 싸우기까지 하냐고 하면 지나고 보니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허튼소리를 세상의 진리처럼 얘기하시는 게 마치 사이비 교주 같아서 아빠까지 참전한 3자 대전으로 이어진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시트콤이 따로 없지만 나는 이것이야말로 미디어가 불러온 가정불화의 예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이를 키우면서 미디어 사용을 아예 안 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아이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낮잠시간도 없고 하니 내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라도 미디어의 힘을 빌리곤 한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항상 틀어져있는 TV소음은 역시 정말 싫다. 하숙생인 나는 오늘도 나는 집 안의 TV를 끄기 위해 고군분투한다.